"민중미술의 길 간단치 않지만 향후 작업 영역 넓혀갈 것"

남도예술인(20년만에 전시 여는 화가 김경주 동신대 교수)
강진 아트홀 초대로 오랜 침묵 깨고 개인전…이달 오월미술관서
회화 입문 50년 1980년대 오월시집 제작 참여 ‘판화의 힘’ 확인
광미공 창립 운영 관여·안티비엔날레 기획 진행…사진전 5회도

전라도인 admin@jldin.co.kr
2021년 09월 06일(월) 17:50
(2021년 9월호 제100호=글 고선주 기자)

‘생각해보면 한심한 노릇이지만 나는 한동안 계절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 살았다. 일상이 바쁘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성장이 멈춰버린 추운 곳의 나무처럼 겨울 어느 무렵에 시간이 정지해 버린 듯 내 바깥의 사물에 눈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는 아무 것도 자라지 않았고 아무런 꽃도 피지 않았다. 당연히 나는 아무런 생각도, 작업도 할 수 없었다. …중략… 몸은 가시처럼 마르고 성깔 또한 날카로워졌다’
이는 20년 만에 개인전을 마련한 그가 때마침 펴낸 화문집 ‘결핍과 유폐’(찬란 刊) 149쪽에 실린 ‘탱자나무 가시에도 꽃은 핀다’의 글 일부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지만 그를 깊게 아는 사람들은 그가 그림 속에 글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이는 엉뚱하게 그의 그림보다, 그의 글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의 감칠맛나고 융숭깊은 문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다. 은근히 화문집을 넘기며 실망하는 사람들 또한 있을 터다. 거의 전반부에는 그림만 실려 있어서다. 어쩌면 그의 그림은 마지막 붓질이 아니라 글 한수, 또는 시 한수일지 모른다. 이처럼 그가 은밀한 글 솜씨를 가지고 있는 것은 오월시 동인 준회원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금방 수긍이 갈 게다. 오월시이니까, 시인들의 결집체이지만 준회원 3명이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회자된다. 세명 중에 한명이 그다. 주인공은 동신대에서 후학들을 양성하며 눈과 마음으로 그림을 그려온 전남 강진 출생 김경주 교수. 여기서 눈과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는 개인전을 열지 못하는 20년의 세월, 정신적 본업인 화가로서의 삶을 궁여지책으로 살아내기 위해 눈과 마음으로 그림을 그릴 수 밖에 없었다는 저간의 사연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는 동안 그의 속에는 훨씬 더 선명하게 그림이 새겨져 박히지 읺았을까 싶다. 그를 찾아가게 된 이면에는 강진아트홀(제6회 개인전 8.2∼29)과 광주 오월미술관(제7회 개인전 9.1∼29 ‘목화는 두 번 꽃핀다’ 타이틀)에서의 전시가 잡혀 있다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전시가 20년 만에 열리는 전시여서 그에게는 각별한 의미를 더하는 자리였다.
한 여름 오후 햇볕은 야속하게 강렬했다. 그가 주로 머물고 있는 금호지구 한 아파트에서 만나 20년 만에 여는 전시 소회와 작업 일상을 들어볼 수 있었다.
전시 소회를 묻자 "작업 겨를이 없었다"는 답이 돌아온다. 그도 그럴 것이 또 몸이 자주 아팠다고 한다. 그러니 도무지 작업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는 것이 실감이 됐다. 1995년 동신대에 공채로 들어가 전임강사를 했는데 그게 끝나기가 무섭게 박물관장과 기획처 과장(홍보대외협력 담당)을 맡아야 했다. 그에게는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그는 짐이 무거웠다는 표현으로 대신했다. 이번 강진과 광주 전시는 그가 2002년 다섯번째 전시를 열고는 그대로 멈춰 버린 이후 처음이다. 그림을 할 수 없어 우선 카메라를 들었다. 사진을 찍으며 돌고 돌아 그림에 가닿고자 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짐작됐다. 돌아보면 순탄치 않은 지난 20년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그런 시간들이 얼룩처럼 새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다.
"그동안 사진전을 한 5회 정도 열었죠. 그런데 지난해 강진 출신 작가들을 대상으로 한 초대전이 강진아트홀에서 진행돼 왔는데 마침 제게도 제안이 와 응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20년 만의 전시라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어요. 그리고 코로나19 정국이고 해서 비대면 수업이 이뤄지다 보니 약간의 시간이 주어져 오래 묵은 화구들을 꺼내 꼼지락 꼼지락 하며, 일주일에 한점씩 정도 작업을 하게 된 것입니다. 작품이 조금 모이니 전시를 열어도 되겠다 생각했구요."
그림 그리는 것을 제하면 그의 일상은 매우 단출하다. 혼자 살다보니 집에서 식사하기 어려워 대충 때운다는 그의 말에서 일상의 단면들을 추정해볼 수 있었다. 오히려 그런 단출함이 생각의 온갖 곁가지들을 잘라낼 수 있는 지름길일지 모른다. 오히려 그림에 집중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어쨌든 그는 20년 만에 다시 전시를 성사시켰다. 전시 소감을 묻자 "소박하게 그렸다"고 했다.


"사는 것이 녹록지 않더군요. 그래서 눈으로, 마음으로 그림을 그려 왔습니다. 이번 전시는 그간의 그림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실제 작업을 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됐어요. 강진아트홀에서의 초대와 집에 머무른 시간이 많은데다 모아둔 한지가 계기가 된 셈이죠. 20년 작업을 못하다가 하니까 쑥쓰럽다는 이야기예요. 50년 전 첫 작업하던 심정으로 소박하게 그려냈다고 보면 됩니다."
이런 그의 과거가 궁금했다. 어떻게 그림에 입문했는지 말이다. 그는 중학교 시절 미술교사로부터 ‘미술 한번 해봐라’ 해서 쥔 붓이 시작이었다. 호기심에 미술교실에 갔다. 시작은 그야말로 엉겁결에 이뤄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미술을 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부모님이었다. 처음에 적극 반대해서다. 화구를 가지고 집에 가면 쌀가마니에 숨기기 바빴다는 술회다. 숨겨놨다가 몰래 꺼내 쓰곤 했다. 조대부중을 거쳐 미술부가 있는 조대부고로 진학해 미술공부를 계속 이어나갔다. 장학생 4명이 있었는데 그 역시 거기에 들었다. 고등학교 내내 미술부 활동을 지속해나갔다. 원했던 대학을 떨어진 후 다른 대학에 진학해 디자인 전공을 택했다. 그에게 잠시의 다른 일이었는지는 모르나, 전남매일 수습기자로 1년 남짓 언론사 생활도 덧붙여 들려줬다. 군대를 다녀왔는데, 제대하고 돌아와 보니 언론은 통폐합돼 더는 언론사와 연을 지속해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원래 하던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조그만 미술학원을 하면서 그림 작업을 해 나갔다. 그러다가 이영진 시인 등이 선배고 친구들이어서 오월판화시집에 삽화로 가담했다. ‘가슴마다 꽃으로 피어 있어라’가 단행본으로 출간됐고, 거기에 넣었던 삽화가 여러 대학에서 사용되던 것을 목격했는데 이때 판화가 갖는 힘을 재확인했다는 귀띔이다.
"그림은 오리지널로 1점만 있게 되지만 판화는 미술 장르에서 복사가 가능하죠. 그 쓰임이 많았던 만큼 1980년대에는 판화 작업을 줄곧 펼쳤죠. 제2집을 냈고, 1988년 목판화 개인전도 열었습니다. 이때 이태호 교수와 유홍준 교수가 와서 특강까지 해줬어요. 이 교수는 한국 전통미술 중심으로, 유 교수는 목판화운동 사례중심으로 각각 강연을 한 것이죠. 반미성향의 작품을 하는 등 판화작업을 계속 전개해 나갔죠."
당시 서양화로 미술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전통회화를 가지고 미술운동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만큼 김 교수에게 전통회화로 미술운동을 해볼 것을 권했다는 설명이다. 1991년에는 전주와 광주, 서울을 순회하며 개인 전시를 열었다. 그의 회화는 1980년대 민중미술운동을 펼쳤고, 1990년대 매체만 바꿔 현실주의 시각에서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정리된다. 1995년에 광주비엔날레를 창립한다고 했는데 거기에는 5·18 지우기 흔적이 일부 있는 것 같아 ‘안티비엔날레’를 기획해 진행했다. 또 1989년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광미공) 창립과 운영에 깊이 관여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는 그의 미술인생에서 가장 격정적인 시기로 보였다.
추후 열릴 전시에서 문명사적으로 미술이 어디에 서야 할지를 투영해볼 작정이라는 그는 마지막으로 민중미술의 길을 밝히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의도적으로 뭐 해야겠다고 하기보다는 작가들 자신의 미적 가치를 탐색하는 게 당연하죠. 민중미술의 길을 간다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다고 봐요. 사회적 모순을 이미지로 다 보여주는, 화면에서 사실 과학적 접근을 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거는 이데올로기 봉합으로 보다는 자기 생각이 있고, 생물학적 존재로 부딪침과 떨림이 있는데 그것을 건져 올린다고 보죠. 향후 그간 생각했던 것들, 신체적으로 허락하는 한 작업 영역을 넓혀 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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