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지나쳐 소외된 것들 영화에 담고 싶죠”

[영화인]광주 출신 신예 영화감독 이승준
키오스크 소재 디지털약자 조명…‘부산국제단편영화제’ 선정
시청자미디어센터 청소년동아리 ‘동그라미’ 활동하며 꿈 키워
2017년 ‘물꽃’·2022년 ‘도움닿기’ 등 연출…“장편이 다음 목표”

전라도인 admin@jldin.co.kr
2023년 10월 05일(목) 15:58
(2023 9월 124호=글 김민빈 기자) 지난 7월 광주 출신 이승준 감독의 ‘이력’이 제24회 대구단편영화제 국내 경쟁 부문에 선정됐다. 제40회 부산국제단편영화제 한국 경쟁 부문에 선정된 데 이은 또 한 번의 성과다.
영화 ‘이력’은 그의 여섯 번째 연출작이다. 무인계산대 키오스크를 소재로 마트계산원으로 일하는 딸 혜림과 재취업을 준비 중인 엄마 강심의 이야기를 그렸다.
어느 날 혜림이 일하는 마트에 무인계산대가 들어오고, 함께 일하는 중년의 동료 미진은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한다. 엄마 강심 역시 재취업을 위해 무인발급기 사용법을 배우려 애를 쓰고, 혜림은 기계 앞에 무력해진 주변 사람들의 상황을 지켜보며 여러 감정을 느낀다.
이 감독은 처음 작품을 기획하면서 자신과 같은 청년들의 공통 관심사이자 최대 이슈인 일자리 문제로 스토리를 구상했다. 그러다 취업은 단순히 청년이나 사회 초년생들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닌 모든 세대의 공통분모임을 깨달았다. 재취업을 고려하거나 은퇴 없는 삶을 사는 중년층도 많을 뿐더러 직장을 다니면서 이직을 고민하는 것은 흔한 일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키오스크와 관련된 모녀의 일화를 담은 기사를 보게 됐다. 햄버거집에서 키오스크로 주문을 하려고 20분 동안 헤매다 결국 포기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딸에게 울면서 전화를 했다는 어머니에 대한 내용이었다.
“키오스크 등 디지털기기의 발달로 시대가 빠르게 바뀌면서 디지털 약자에 대한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돼왔잖아요. 이 기사를 접하고 나서 관점을 조금 달리하게 됐죠. 단순히 기계 조작이나 디지털 약자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이 지금까지 쌓아오고 능숙해져 경험이 된 무언가가 어느 날 나타나 말없이 서있는 터치스크린 기계 앞에서 너무나 쉽게 무너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중년 세대가 디지털 기술에 뒤쳐져 도태되고, 젊은 세대들은 그걸 잘 이용한다는 이야기는 뻔했다. 엄마 강심을 기술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려고 하는 인물로, 젊은 세대 혜림을 오히려 그러한 변화를 막으려 하고 불안해하는 정서를 가진 인물로 뒤바꿨고,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더욱 잘 살릴 수 있었다.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은 메시지는 편집하고 상영될 때쯤에야 정리가 됐어요. 이런 문제들이 결국 편견의 문제라는 거죠. 우리 사회는 디지털 기기 조작이 서투른 이들을 디지털약자라고 부르고, 그들을 교육시키고 적응시켜야 한다고 바라봐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평생 그러한 기계나 기술 없이 능숙하고 편리하게 잘 살아왔을 이들을, 방금 만들어진 기술에 빨리 적응하지 못한다고 해서 ‘약자’라고 지칭하는 것이 맞는 건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건 시대 흐름이 만든 편견 아닐까요.”
이렇게 만든 작품이 과연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을까제작 과정에서 불안감도 들었다. 편집하는 도중에도 몇 번이고 마음이 흔들렸다. 확신을 준 건 최선을 다해 임해준 배우와 스텝들이었다. 그는 영화 속 인물이 돼 열연을 펼쳐준 배우들이 작품의 설득력을 만들어줬다며 공을 돌렸다.
“제가 하는 이야기를 많은 분들이 들어주고 관심 가져주신 것에 감사하면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누구에게도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많이들 공감해주셨죠.”
이번 작품은 지난해 광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의 영화제작지원사업 지원을 받아 제작됐다. 광주에서 올 로케이션으로 촬영했는데 지역민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스튜디오나 세트촬영이 아니다 보니 장소를 섭외하는 게 가장 큰 어려움이었는데,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계림1동 행정복지센터와 동명동 리얼버거, 지산동 FM마트 등 많은 곳에서 무상으로 장소를 내주었다. 또 IT기업 디투리소스는 가장 중요한 소품인 키오스크를 무상으로 빌려주고 영화에 맞게 연출적인 부분들까지 세심하게 살펴주며 도움을 줬다. 디투리소스 직원은 직접 광주독립영화제에 찾아와 영화를 관람하고 앞으로 팀원들과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제품이나 소프트웨어를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지 연구해보겠다며 진심어린 피드백을 주기도 했다.
이 감독이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을 가진 것은 10년 전이었다. 어릴 적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그럴 때면 텔레비전에 나오는 영화들을 주야장천 봤다. 영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나 인물들의 행동을 보면서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사람들과 소통하고 마음을 나누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를 따라 우연히 광주시청자미디어센터의 청소년 대상 영화교육 수업을 듣게 됐고, 청소년영상제작단 ‘동그라미’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처음 영화를 만들었다.
친구들과 영화를 제작하면서 태어나서 해본 것 중 제일 열심히 하고 있는 자신을 봤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참 재밌고 기적 같은 일이구나’ 생각했다. 이후 동그라미 단장을 맡는 등 누구보다 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영화가 너무 보고 싶을 때면 하교길 학원을 빠지고 광주극장으로 향하곤 했다. 막연히 공부에만 열중해왔던 평범한 학생이 그렇게 꿈을 찾았다.
단국대 영화과에 입학한 이후, 광주와 서울을 오가며 단편영화 제작에 매진해왔다. 2014년 ‘그날, 그때, 그곳에’, 2015년 ‘잉걸’, 2017년 ‘물꽃’, 2019년 '세상을 구한 여자' 등을 연출했다. ‘세상을 구한 여자’는 충주단편영화제 본선진출상, 충무로 단편영화제 음향상 등을 수상하고, 대한민국 청소년 영화제 대학부 경쟁부문, 도시영화제 등에서 상영됐다.
지난해 완성한 작품 ‘도움닿기’는 제대하고 복학한 후 영화진흥위원회의 제작 지원을 받아 만든 작품이다. 재밌는 점은 영화 속 주인공 역시 제작지원을 받아 영화를 찍는다는 설정이다.
“영화과를 졸업하고 취업도 못하고 있는 남자가 지원을 받아 영화를 찍게 되는데요. 제작 피디가 촬영 전날 조모상을 당해서 자리가 비게 되고, 그 자리에 주인공의 엄마를 투입시키죠. 모자가 함께 영화를 만들면서 서로를 이해해가는 이야기죠. 제 현실적인 고민과 경험, 생각들을 녹여 만든, 소중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촬영현장에서 디렉팅 중인 모습

지역에서 영화감독을 꿈꾸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시청자미디어센터 교육이나 동그라미 활동 등을 통해 꿈을 키워올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다양한 지원과 교육 프로그램들이 있지만 영화를 직접 만들어 볼 기회를 주는 게 가장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밝혔다. 생활 예술처럼 영화나 영상 제작을 가까이서 접해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영화 제작에 아예 관심이 없던 사람도 만들어 볼 수 있는 기회가 일상 속에 더 많아지면 좋을 것 같아요. 모든 영화에는 만든 사람의 내면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데 그게 영화의 매력이거든요. 전공자가 아니라도 그런 영화적 매력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굉장히 많죠. 기회가 많은 환경에서 자연스레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수려한합천영화제에서 영화 ‘이력’을 상영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빛을 보지 못하고 묻히는 아까운 작품들이 수없이 많은데 자신의 영화가 관객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것이 가장 기쁘고 감사한 점이라고 한다.
그는 사람들이 보기 싫고 감추고 싶은 일들을 드러내 밝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우리가 보진 못하지만 소외되는 것들과 사람들, 무심코 지나쳐버린 것들을 담아내는 것이다. 물론 그러면서도 재미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최근 일본 미야케 쇼 감독의 청각장애인 복서를 소재로 한 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을 재밌게 잘 봤는데요. 저는 영화를 만들면서 배우의 눈과 관객의 눈 그리고 카메라가 바라보는 지점을 잘 들여다봐야 그 사람이 무엇을 말하고 싶고, 느끼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영화가 그걸 아주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복싱에 푹 빠져 복싱장을 다닌지 6개월째. 생활체육대회에서 우승하는 게 새로 생긴 목표다. 그리고 하루 빨리 첫 장편영화를 만들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그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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