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현대사 중 가장 정점에 있는 ‘1980년 5월’은 보통 역사극과 시대극으로 영상에 담는다.
5월 16일 개봉한 박기복 감독(56)의 영화 ‘임을 위한 행진곡’은 흔히 같은 의미로 쓰이지만 미묘하게 다른 이들 장르를 모두 담았다.
두 장르는 역사적 사실을 다뤘다는 점에서 같지만 시대극은 인물, 역사극은 극의 흐름에 초점을 둔다.
이 영화는 ‘역사를 관통하는 시대극을 만들면 된다’는 그의 의지를 담아 우리 역사에서 가장 야만적이고 피로 얼룩졌던 1980년 5월 광주와 38년이 지난 2018년 광주를 이야기 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처럼 이 영화를 통해 5·18민주화운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거대담론을 제시한 그를 만나 이번 영화에 대한 숨은 이야기와 평소 지론 등을 들어봤다. <편집자 주>

"5·18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노래는 1982년에 만들어진 곡이예요. 그래서 이 영화 또한 5·18 보다는 그로 인한 피해, 나아가 가장 어두웠던 1980년을 살면서 저마다 지게 된 십자가를 보듬고 치유하자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과 결부 지어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인지 일각에서는 이 영화가 개봉되기에 앞서 화려한 휴가, 택시운전사 등 기존 5·18을 주제로 다룬 영화의 ‘아류’로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2년 이라는 시간적 차이가 있고 박 감독 또한 이 영화를 5·18을 재조명하기 위한 작품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지난 2016년 크랭크 인해 2년여 만에 완성된 이 영화는 기존의 5·18 영화와 확연하게 ‘다름’을 추구했습니다. 이전까지 5·18 영화들이 소위 닫힌 공간, 즉, 1980년 5월이라는 시간적 상황과 광주라는 공간적 배경에서 모든 내용이 벌어졌다면 이 영화는 5·18을 중심으로 1980년 전반을 아우르는 ‘열린 공간’에서 모든 상황이 이뤄집니다."
실제로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5·18과 1989년 발생한 이철규 변사사건이다.
5·18부터 임을 위한 행진곡이 만들어진 2년, 7년 뒤 발생하는 변사사건을 아우르며 1980년의 아픔을 모두 관통하고 있다는 얘기다.
매우 어둡고 침울한 주제이지만 영상은 결코 자극적이거나 선정적이지 않다. 관객의 정서적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풀어가려는 배려도 내포돼 있다.
1980년대 발생한 수 많은 사건들 중 이들 사건을 선택했던 이유는 ‘자신과의 경험과 인연’ 때문이라고 한다.
"5·18은 인생을 살며 겪은 가장 충격적이고, 처참한 사건입니다. 화순에서 나고 자란 저는 처음 진흥고등학교로 진학해 광주에 오게 됐고, 3학년 때 참혹했던 5·18을 마주했습니다. 일요일 날 물건을 사러 광주로 나왔는데 신군부의 독재에 항거하던 대학생들이 유동삼거리 인근에서 연좌농성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렇게 지나쳤는데 이후 칼과 곤봉을 든 군인들이 오가더니 학생들이 순식간에 쓰러졌죠."
어린 나이에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 그 기억은 머릿속에 트라우마로 자리 잡게 됐고, 자신이 보고 느꼈던 당시의 감정과 상황을 그대로 영화에 옮겼다.
그의 말처럼 당시 느꼈던 감정과 상황에 기반을 두다 보니 기존의 영화와 다른 장면들이 많다.
먼저 이 영화에는 ‘총’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개 ‘80년 5월’을 그린 영화들은 대부분 무장을 한 계엄군과 시위대가 서로를 쏘아보며 대치하는 장면을 가장 극적인 장면으로 삽입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본 5·18, 계엄군이 시민들을 칼과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장면을 영화에 강렬하게 그리고 있다.
5·18 당시 도심을 붉게 물들였던 ‘피’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감독 스스로가 고집하는 독특한 연출 방식 탓이 크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누구나 예상 가능한 장면에서의 반전과 인물을 극한 또는 최악의 상황에 몰아넣은 뒤 맨 마지막에 희망을 주는 방식을 주로 쓴다.
즉, 계엄군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맞는다면 당연히 피가 솟구칠 것이라는 생각과 전혀 다르게 상황을 전개해 나가는 방식이다.
일례로 계엄군에 붙잡힌 시민군이 고문을 받는 상황에서 이를 보는 누구나 심한 매질과 쏟아지는 피를 예상하지만 그렇지 않다.
두려움과 공포를 대변하는 ‘피’를 억제하고 다른 장치들로 공포감을 극대화 하는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공포감은 관객들에게 두려움을 넘어 기괴함 마저 들게 한다.
영화의 두 번째 줄기인 1989년 발생한 이철규 변사사건이다. 이 역시 그의 인생과 깊게 맞닿아 있다.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철수)은 군부 독재 타도를 외치다가 당국에 쫓기는 신세가 되고 이후 사복경찰의 지독한 고문으로 숨지지만 이를 은폐하기 위한 형사들의 조치로 단순사고사로 위장된 채 처참한 익사체로 발견된다.

이 장면 또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광주·전남지역 공안합동수사부의 지명수배를 받아오던 조선대학교 교지 편집위원장 이철규씨가 광주 북구 청옥동 제4수원지 상류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노태우 정부 시절 대표적인 의문사 중 하나인 ‘이철규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었다.
특히 그는 주인공 철수를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게 해 그동안 5·18에 덧씌워진 지역적 경계를 허무는 데 주력했다.
또 지인(이철규 열사)의 억울한 죽음을 정확히 밝히고 싶은 의지와 함께 80년 암울했던 그 시기, 군부 타도를 외쳤다는 이유로 혹독한 고문 등으로 수없이 스러져 간 젊은 청춘들을 대변했다.
실제 박 감독은 20대 시절 이철규 열사와 ‘호형호제’ 하던 사이였다.
"대학을 늦게 간 탓(박 감독은 28살에 서울예술대학 극작과에 입학했다)에 매일 사회적 분위기와 행동을 강조한 참여문학 형태의 시를 썼고, 그러면서 광주전남대학연합에서 시 부문의 고문을 맡게 됐죠. 그때 그와 인연을 맺게 됐는데…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곤…."
"영화 제목을 보면 5·18이 주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아요.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노래는 1982년에 만들어진 곡으로 민주화운동보다 2년 이후 일이죠. 즉, 5·18에 국한된 것이 아닌 가장 어둡고 침울했던 80년 전체를 조명하고 당시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치유하고 위로하고 싶어 영화를 만들었죠."
그는 "아픈 시절, 아픈 사건을 담았다고 해서 그저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니에요. 과거의 상처와 여전한 후유증을 비추려면 위로와 치유를 같은 무게로 다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미력하나마 이 영화가 5·18의 상처에서 여전히 앓고 있는 이들의 고통을 치유하고 나누는데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영화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당시 계엄군의 총격으로 37년간 머리에 총알이 박힌 채 살아가는 엄마(김부선 역)와 개그맨 딸(김꽃비 역)이 1980년 5월 엄마의 시절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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