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호·제73호=박세라 객원 기자)‘지구발전오라’란 거한 뜻의 공간을 찾아 나섰다. 꼭 여름 같이 뜨거웠던 봄날의 일이다. 네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곳에 당도, 차에서 내리자 아주 어렸을 때 보았던 마을 골목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지구 발전을 논하기에는 조금 소박한 곳이라, 골목을 기웃거린다. 잘못 찾아왔나 싶을 참에 "여기예요"란 반가운 소리가 들린다. 내부 공사가 한창인 주택가를 지나 목적지에 다다랐다. 정겨운 대문을 통과해 현관으로 들어서니, 정갈한 가정집의 모습이다.
지구발전오라는 대인예술시장에서 활동했던 김영희·김탁현 부부가 공들여 꾸며놓은 곳이다. 작가들의 창작 무대가 되는 레지던스 공간이자, 다양한 예술 활동이 기획돼 영글어 가는 복합예술공간이다.
2015년 문을 열어 지난해 11월까지 대인예술시장에 자리해 있다가 올해부터 발산마을로 넘어와 새 보금자리가 완성 중이다. 거실 창 쪽에 자리한 소파에서 김영희 지구발전오라 공동대표와 마주 앉았다. 이곳을 함께 운영하는 그의 부군이자 공동 대표 김탁현씨는 출타 중이었다.
먼저 지구발전오라란 공간이름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 놓았다. 김 대표는 "지구발전오라에서 ‘지구’란 Earth가 아니라 Area를 뜻한다"고 말해준다. 인류가 살고 있는 행성 지구가 아니라 지역의 한 구획을 일컫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자 지구발전오라가 왜 이곳 양동의 발산마을에 새 둥지를 틀게 됐는지 단박에 이해된다.
"이곳은 저희와 작가들이 지역 안에서 함께 성장해보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광주에는 레지던시를 진행하고 있는 곳이 많지만 실상 지역의 작가들과 장기적으로 협업할 수 있는 구조인가에 대한 부분에서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작가들이 ‘돌아갈 곳’을 만들어주자는 거예요. 각 레지던시에 참여한 뒤 종료가 되면 소위 말해 갈 곳을 잃게 되더라고요. 레지던시가 일종의 한 줄의 ‘스펙’과 같이 되면서 안정적으로 머물며 창작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습니다. 말하자면 작가들에게 ‘집’이 돼 줘야겠다는 생각을 투영한 곳이죠."
본인이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다는 점에서 이곳은 정말 내 집 같은 편안함을 준다. 개인 작업실을 둔 작가들에게도 작업공간은 늘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공시지가가 꾸준히 오르듯 월세 또한 상승할 수밖에 없는 구조 탓이다.
그런 면에서 경제적 비용 부담 같은 것은 생각지 않고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은 작가들에겐 큰 선물과 같다.
지구발전오라는 현재 공사가 모두 완료된 것은 아니지만, 작가들이 머무는 1층은 게스트하우스로, 2층은 작업 공간인 창작스튜디오로 꾸며졌다. 단독주택 건너편에는 총 세 개로 나뉘어진 다른 건물이 있는데, 이곳은 전시실, 세미나실 및 커뮤니티 룸으로 꾸며질 계획이다.
원래 건물의 주인은 서구청인데, 그들의 좋은 기획에 뜻을 함께 해 준 덕에 5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내부 인테리어 공사비용은 지구발전오라에서 마련했다.
늘 재미난 프로젝트가 벌어져 시끌벅적하던 이전의 대인시장보다, 발산마을은 작가들이 작업하기에 더 맞춤하다. 골목이 주거 공간으로 이뤄져 있어 조용한데다, 쾌적하기 때문이다.
머무는 데 딱히 정해진 기간은 없지만 최소한의 의무는 있다. 1년에 60만원씩 작가들이 내놓는 비용이다. 이들은 이를 ‘책임 값’이라 명했다.
"레지던시 자체가 지원없이 시작한 것이라서, 작가들에게 일정 비용을 받았어요.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절감한 것이 작가들의 입장에서 필요한 것들을 기획해야겠다는 것이었어요. 무작정 ‘레지던시에 참여하세요’, ‘좋은 프로그램입니다’ 하고 내놓는 것들이 사실상 작가들에겐 큰 도움이 안 되는 경우도 많더라고요. 그래서 ‘자발적 레지던시’란 이름하에 작가들이 필요한 것에 맞춤형 프로그램을 기획할 수 있도록 책임 값이란 것을 받게 됐죠. 이 금액은 대부분 작가들이 원하는 프로젝트나 해외교류전 등에 페이백 형태로 돌려줬습니다. 책임 값이란 이름처럼 우리도, 또 작가들도 기획에 대한 책임감을 깊게 가지고 갈 수 있었죠. 결과적으로 높은 만족도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창작스튜디오와 게스트룸 내부

지구발전오라에서는 지역 및 해외 작가들의 개인전은 물론, 롯데갤러리 판매전 ‘Noma+Jean’, 지난해 진행됐던 ‘( )과 그 이후’, 창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집중한 ‘무형, 디지털, 파인아트, 그리고 페어’란 이름의 페어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들을 진행했다.
이 같은 기획 전시들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는 부부 기획자들과 작가들 간 긴밀한 소통과 교류에 키가 있다. 김 대표는 그가 중점적으로 해야 할 일로 "잘 들어주는 것"을 꼽을 만큼 늘 작가들에게 귀를 활짝 열어둔다.
지속적으로 의견을 나누고 합의점을 찾아가는 일이야말로 좋은 작품을 탄생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고, 나아가 재미난 전시를 펼치는 데도 든든한 힘을 실어줄 수 있어서다. 이 ‘지구’에서 함께 ‘발전’해 나가자는 그들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들이다.
"저희 부부에게 가장 많이 질문하는 게 있어요. 바로 ‘왜 그 일을 하느냐’는 것이죠. 작가들은 작품으로 결과물들을 만들어내는 데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이냐는 의미이겠죠. 김탁현 대표는 이런 레지던시 공간을 운영하는 것이 오랜 꿈이었다고 하는데 제 경우에는 아니에요. 동상이몽이랄까요. 다만 작가들과 함께하는 기획들을 통해서 재미난 일들을 끝마쳤을 때 참 보람을 느끼죠. 이 안에서 마냥 작가들을 서포팅하는 게 아니라, 작품에 대해서 공부하고 하나의 큰 그림을 협업해 완성해가는 작업이라 생각해요.
그러니까 레지던시에 머무는 작가들이 아니라 우리는 ‘한 식구’인 것 이죠."
이곳에는 6명에서 8명 정도의 작가들이 머물 수 있다.
새 둥지를 꾸밀 때 가장 공들인 부분이 아늑함이다. 콘셉트라 할 만한 것은 없지만 기본적으로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진짜 집처럼 완성하고 싶었다 한다. "없을 건 없고, 있을 건 다 있다"는 게 김 대표의 설명이다.
차차 공간을 채워나가는 데 부부인 두 사람의 의견이 늘 일치한 것은 아니다. 자주 싸우는 편이라는 그는 "아마 이 형태가 두 사람의 생각이 중간에서 만난 결과물이 아닐까 한다"고 웃는다.
지구발전오라는 모든 공사가 마무리되는 6~7월 즈음부터 마을을 기웃거려 볼 작정이다. 이곳에서 오래 살아온 마을 주민들과 어울려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일지 머리를 맞댈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이곳에서 이루고픈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김 대표는 "묵묵히 자기 할 일을 잘 해나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을 덧붙인다.
"특별히 이곳이 어떻게 발전해 갔으면 한다는 멋들어진 청사진을 그리는 건 아니에요. 그저 자기 자리에서 그 역할을 다 해내어서 결국엔 좋은 결과물들을 선보이는 게 목표이죠. 특히 여전히 지역에서는 여성 작가들의 활동 범위가 좁습니다. 또 청년 작가들은 선배들이 닦아온 길에서 멀어지면 혹시 도태되지는 않을까 하는 조바심들로 힘들어하죠. 적어도 이곳 지구발전오라는 마음 놓고 작업할 수 있는 곳이 돼 줬으면 좋겠어요. 작가들의 역량이 이곳에서 빛을 발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 저희의 기획들이 꽃을 피우는 곳이요. 지구발전오라에서 ‘공생’할 수 있는, 공생의 가치가 피어나는 공간이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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