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호 제81호=글·정채경기자, 사진·최기남 기자)지역 영화계가 몇 년 사이 가장 눈에 띄는 성과를 보인 건 우연이 아니다. 2001년 출범해 광주 간판축제로 자리 잡을 것 같던 광주국제영화제가 내분 등으로 삐걱거린 뒤 2016년 이후 침체를 거듭해 온 게 광주영화계다. 하지만 절치부심. 광주영화계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초심으로 돌아가 다진 기반이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성과는 광주시 영상영화진흥조례가 통과가 아닐까 싶다. 광주독립영화관이 2018년 문을 연 뒤 지난해 6월 지역 영화인들의 오랜 숙원이던 광주시영상영화진흥조례가 통과돼 지속적인 발전 및 정책개발을 위한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이를 위해 사단법인 광주영화영상인연대가 비평지를 창간한 것. 광주에서 처음으로 영화전문 비평지 ‘Scene1980’(‘씬 1980’)이 지난해 9월 창간준비호를 거쳐 11월 창간호를 선보였다. 이같은 영화전문 비평지의 창간은 비평을 찾기 어려운 지역문화예술계에 반가운 신호가 아닐 수 없다. 문화계 안팎의 눈길을 끄는 건 당연하다. ‘씬 1980’의 중심에는 한재섭 편집장이 있다. 광주문화예술계에 종종 미술평론가 또는 미술사학자로 소개돼온 그는 여러 채널을 통해 지역 축제 또는 제도권의 문제점을 짚는 목소리를 내왔다. 광주문화예술인네트워크가 ‘광주프린지페스티벌 혹은 관 주도 행사를 말하다’라는 주제로 연 좌담회에서 패널로 참여해 관 주도 행사의 문제를 꼬집거나 앞서 창간한 ‘행진: 지역공연예술플랫폼’을 통해 비평의 부재를 문제 삼으며 비평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또 광주비엔날레 20주년 특별전시회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풍자해 논란이 된 홍성담 작가의 걸개그림 ‘세월오월’이 전시되지 못한 사태를 비판한 ‘예술의 정치화가 문제인가, 정치화의 예술화가 문제인가’를 크리틱-칼에 발표하는 등 미술을 넘어 문화비평으로 영역을 확장한 듯했다. 예술로 묶이긴 하지만, 미술평론가가 영화비평지의 편집장을 맡은 것이 일반적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이는 비평이란 틀 안에서 보폭을 넓힌 것으로 보였다.

어릴 적부터 영화와 가까웠다는 그는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학창시절을 광주 북구 대인동에서 보냈다. 대인동이 금남로, 충장로와 가까워 현재는 사라진 한성극장과 태평 극장, 무등극장, 아세아극장 등 극장가를 다닐 기회가 많았고, 그럴 때 마다 극장간판과 그 분위기가 묘한 흥분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홍콩영화 붐이 일던 시기로 영화보 는 게 좋아 종종 극장을 돌며 영화를 봤다. 극장이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하루종일 최대 4편까지 본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영화에 관심을 두게 된 건 시네마테크라 할 수 있는 ‘필름리뷰’라는 모임을 통해서다. 한창 감 수성이 충만하던 고2 무렵 ,거기서 김동원 감독의 다큐멘 터리 ‘상계동 올림픽’(27분·1998)을 접하게 된다. ‘1988 서울올림픽’의 이면이 담겨 모두가 국가적 축제를 즐기던 때 이로 인해 집을 잃은 철거민의 모습은 카메라 너머 큰 충격을 안긴다. 알고 있던 세상과 너무 다른 모습에 ‘이런 삶이 정말 존재하는 거야?’, ‘난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지?’와 같은 생각들이 한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는 설명이다.
1995년 당시는 전국민적 화두가 1995년 5·18 특별법 제정(12월)이었다. 이에 앞서 거리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지곤 했다. 이전까지는 머리띠를 두르고, 반대편과 대치하 는 모습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흥미로운 구경거리로 보였다면, ‘상계동 올림픽’을 접한 뒤부터는 시위를 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영화로 인해 그가 사회로 시선을 돌리고, 정치와 경제 및 문화 등을 면밀히 살펴 보게 된다. 이때부터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점차 형성되기 시작했다. 영화로 세상에 재미를 붙인 그는 모임에 꾸준히 참여했다. ‘굿펠리스’와 시네마테크 ‘필름리뷰’, 현재 광주극장을 거점으로 운영 중인 광주시네마테크의 전신인 ‘평화 로 세상보기’가 그것이다. 이들 모임에서 활동하다 대학에 진학한다. 전남대에서 인류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한 그는 명지대학교 대학원에서 민중미술가로 손꼽히는 신학철의 역사화를 연구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국립춘천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근무, 대학원을 졸업한 뒤에는 양평군립미술관의 개관 준비를 맡아 활동했다. 그 뒤 2011년부터 인천아트플랫폼에서 학예팀장을 맡아 젊은 작가 기획 프로젝트 전시총괄과 국제레지던시 입주작가를 지원한 바 있으며, 2014년 광주로 돌아와 3년 동안 광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에서 정책기획팀과 콘텐츠 산업팀을 오갔다. 편집장을 맡기 전에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방문학자로 연구자 레지던스를 진행한 바 있다. 현재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광주영화영상인연대에 소속돼 ‘씬 1980’을 꾸리는 중이다.
그에 따르면 ‘씬 1980’은 김지연 광주영화영상인연대 이사장이 발행인을 맡고, 김수진 전 무비스트 기자와 윤수안 광주독립영화관 관장, 조대영 광주독립영화관 프로그래머, 최성욱 광주독립영화관 대표가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이외에도 행정을 김가희씨가 맡았다.

영화전문 비평지 ‘Scene1980’(‘씬 1980’) 편집위원들

한 편집장은 편집위원 대부분이 오랜 시간 광주 영화계에 몸담아 온 이들인 만큼 학창시절 영화모임을 통해 만났다고 한다. 이들이 광주영화계의 화두를 다루는 한편, 인물을 조명해 광주문화예술계의 활성화에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참신한 비평을 바탕으로 건강한 담론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고군분투하고 있는 셈이다.
한 편집장은 비평이란 "창작자의 작품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작품을 모르면 이해하기가 힘든 글"이라며 "얼마 전 한 강연에서 ‘세상 재미없는 게 비평’이라고 하던데, 그 이야기에 공감한다"며 웃었다.
그는 이어 비평가의 역할에 대해 언급했다.
"비평가는 영화계와 미술계, 문학계 등 창작자가 열심히 만들어낸 결과물을 장르별로 역사 안에서 경향을 파악하고, 이전의 창작자 또는 이론가와 연계해 작품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 분석합니다. 그런 다음 독자들에게 이 작품은 들여다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알리죠. 창작자와 향유자 를 연결짓는 ‘매개’ 역할이 가장 큽니다."
역사와 창작자, 작품을 총망라해 하나로 통합, 작가와 독자를 맺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됐다. 그렇기 때문에 제도에 의존하거나 개별 작품에 매몰돼서는 안된다 는 것이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언급하면서 제도를 감시하는 역할, 누구나 납득할 만한 적절한 수위를 조절하는 중재자로 바라본다. 그렇기에 비평이 어렵고,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다가왔다.
그는 점점 비평이 사라져 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지역에 비평이 부재하다보니 비평지에 글을 게재할 비평가를 찾기 힘든 실정이어서다. 이에 무작위로 비평글을 받아 회의를 거쳐 비평글을 싣고 있으며, 2년 전부터 영화영상인연대가 영화비평가양성과정을 개설해 비평가를 길러내고 있다. 신진 비평가에 목말라 직접 팔을 걷어 부친 것이다.
당초 두 달에 한 권씩 1년에 총 12권을 낼 계획이었지만, 창간준비호와 창간호를 내면서 지쳤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영화비평지를 이끌며 종종 막다른 벽에 부딪히지만 지속해 나갈 뜻을 잊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광주영화계를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광주 영화계는 상승곡선을 그리는 중이라고 볼 수 있죠. 타 지역 독립영화관들이 광주독립영화관 운영에 대해 묻기도 하고, 허지은, 이경은 감독의 수상으로 인해 지역 창작자들에게 동기부여도 됐죠. 조례가 제정됐으니 광주영화센터건립과 영화문화교육 등 할 일이 많아요. 지금까지 차곡히 쌓아온 활동들을 발판삼아 앞으로의 방향이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전라도인 admin@jld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