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호 제96호=글 박세라 기자)

최근 묵직한 책 하나를 받았다. (사)광주영화영상인연대에서 발간한 광주영화구술아카이브의 첫 번째 자료집이었다. 책은 지역 영화의 주요 인물들을 구술아카이브로 정리, 엮은 것이다. 책을 후다닥 펼쳐보고선 두 번 감격했다. 하나는 지역 영화인들이 "참 대단해"서 였고, 또 하나는 이 대대적인 작업에 착수, 결국 "첫 결과물을 내 놓았구나" 싶어서다.
많은 예술 장르가 그렇다지만, 광주는 영화 분야의 불모지였다. 영화·영산 산업은 촬영부터 편집까지, 기본적인 인프라가 갖춰줘야만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를 행하는 인력은 물론이고 기반 시설이 따라줘야만 작품 활동이 가능한 분야다. 그러니, 지역에서 영화판을 키우는 일은 참 고달픈 일이다.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을 (사)광주영화영상인연대가 열과 성을 다해 해내고 있다. 광주독립영화제·광주여성영화제·광주극장영화제 등 굵직한 영화 축제가 매년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2018년에는 ‘광주독립영화관’이 문을 열었다. 영화를 열심히 만들어도 ‘상영할 곳’이 없어 헤매던 영화인들이 힘을 보태 결국 극장 문을 연 것이다. 지역 영화의 발전을 위해 한 마음으로 움직인 영화인들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사)광주영화영상인연대는 광주여성영화제·광주독립영화협회·광주극장·사회적기업 ‘필름에이지’, 문화콘텐츠그룹 ‘잇다’, 영화사 ‘길동무’ 등 6개 단체로 이뤄졌다. 단체 구성원들과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감독들까지 100여 명이 활동한다.
공식적인 설립은 2017년이지만 그 역사는 2007년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윤수안 광주영화영상인연대 상임이사(사회적 기업 ‘필름에이지’ 대표)는 당시를 ‘카메라 좀 만진다’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 때라 기억했다.
"그 해 광주시청자미디어센터가 생겼습니다. 이전에는 작품 활동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죠. 촬영 장비들, 함께 작업할 스태프진들 등 인력풀도 전무했으니까요. 당시 센터에서 동영상 제작 강의 등이 이뤄졌는데 강사진들, 수강생들까지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광주에 숨은 ‘영화인’들을 발견한 때였죠."
‘모일 곳’이 생기자 자연스레 일이 벌어졌다. 먼저 2009년 지역 영화감독들을 중심으로 광주독립영화협회가 생겼고, 곧이어 여성 영화인들이 뭉쳐 ‘여성영화제’의 출발을 알렸다. 다른 지역은 소위 영화전공자들을 중심으로 각 단체들이 만들어진 것에 반해 광주는 여성운동이나 사회운동을 했던 이들이 단체 설립부터 함께했다는 점이 돋보인다. 영상콘텐츠를 하나의 메시지를 담아내는 매개체로 접근한 것이다.
"영상 제작 기법을 배우면서, 영상이 가진 ‘힘’들을 목격한 것이지요. 영상을 통해서 여성주의를 전파하는 방법들을 익히게 됐고, 그러면서 하나 둘 영화란 타이틀을 가진 작품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저마다의 메시지를 넣은 것들이죠. 여기다 어르신들이 모인 ‘광주영상미디어클럽’까지 창단됐고요."
전문 영화인들을 물론, 성별과 세대를 넘는 단체가 하나 둘 꾸려졌다. 이들이 하나의 법인체로 그 모습을 가다듬은 것은 조금 모순적이게도 지역 영화계가 한창 시끄러울 때였다. 2016년 광주국제영화제는 시 보조금 운용에 불법적인 정황이 포착되면서 한창 논란을 빚었다. 그때 영화영상인연대는 ‘시민모난테이블’을 꾸리고 영화제는 물론, 지역 영화계의 문제점, 시 지원책들의 한계점들을 하나 하나 짚었다. 이때 영화인들은 연대하고 뜻을 모은 힘이, 긍정적으로 발현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렇게 2017년 4월 사단법인 광주영화영상인연대가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이들 활동의 가장 큰 성과를 꼽자면 단연 ‘광주독립영화관’이 문을 연 것이다.
"이곳이 개관하기 전, 지역에서 만들어진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은 영화제뿐이었죠. 영화인들이 열심히 작품을 만들었더라도, 빛을 보지 못하는 게 태반이었던 겁니다. 광주독립영화관은 지역 영화인들에게 ‘내 작품을 올리고 싶다’는 창작욕을 불러일으키면서, 시민들과 작품에 관해 논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이 돼주고 있어요. 실제로 젊은 영화인들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들이 운영하는 ‘영화학교’는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해 초 처음으로 선보인 제1기에는 100여 명이 넘는 시민들이 문을 두드렸다. 프로듀서·연출·시나리오 등 영화 제작에 실질적인 기술부터 조명·미술·음악·영화제 기획 등 세부적인 부분까지 교육을 진행, 예비 영화인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이와 함께 시민교육, 영화비평가 교육 등에도 꾸준한 참여가 이어지고 있다. 광주에 영화에 대한 수요가 이렇게나 많았나,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놀라는 부분이라 한다.
"더 이상 ‘광주는 영화 불모지’라는 명제가 통하지 않게 됐죠. 영화인들이 힘 모아 일궈낸 것들을 돌아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현재 4호까지 발간된 광주영화비평지 ‘Scene 1980’은 1000부가 인쇄돼 전국 단위의 영화 관련 단체들에게 배포되고 있습니다. ‘광주에서 이런 걸 만들어?’ 하는 반응들이 속속 들려옵니다. 영화학교 강연을 위해 초청하는 영화인들에게 ‘광주가 부르면 가겠다’는 대답을 들을 때면 뿌듯한 마음이죠."
잡지에는 영화비평, 지역 감독들의 작품세계, 광주전남의 대안 영화 공간 소개, 영화인 인터뷰 등이 다양하게 실린다. ‘Scene 1980’은 앞으로 계간지로 본격적인 창간 준비에 들어갔다.
앞서 소개한 ‘광주영화구술아카이브’ 작업도 돋보인다. 최근 문화예술계에 아카이브가 화두이긴 한데, 대부분 "늦었지만, 지금이라도!"라는 뒤늦은 기획이 아쉬웠다면, 지역 영화계는 비교적 발 빠르게 진행되는 감이 있어 반가운 마음이다.
"중앙 중심으로 ‘영화사’가 서술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렇다면 ‘광주의 영화사는 무엇일까’에 대한 답을 찾기 시작했죠. 그것이 바로 광주 영화인을 조명하는 구술 아카이브 작업의 시작입니다. 그 첫 주자로 광주독립영화의 든든한 맏형 조재형 감독이 기록됐고요."
이와 함께 지역 작품들에 대한 데이터베이스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각 개인 감독들에게 소장돼 있던 작품들을 한데 모아 각 주제별로 아카이빙 중이다. 이는 영화제나 상영회 등을 열 때 손쉽게 꺼내볼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지역 영화사·정책 연구 자료로 사용된다. 이 같은 영화관련 정보들을 ‘한 눈에’ 만나는 온라인 플랫폼은 내년 선보일 계획이다.
광주영화영상인연대는 앞으로도 할 일들이 많다. 본격 OTT(인터넷으로 영상을 제공하는 서비스)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지역 영화계는 새로운 기회 앞에 있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이젠 쓸모없는 콘텐츠가 없습니다. 배급사를 통해야 관객을 만날 수 있었던 시절은 지났기 때문이죠. 잘 만들어진, 좋은 콘텐츠라면 단편이라도 여러 편 엮어서 세상에 내보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광주만의 이야기를 담은 경쟁력 있는 콘텐츠로, 광주 동시대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는 한편, 지역 영화사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데 힘을 모을 작정입니다."

전라도인 admin@jld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