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류동’에 산그늘처럼 가을은 하산 중산과 계곡이 수려한 지점서 한참 머물다

[문득여행] 곡성 도림사의 가을
동악산 자락에 깃든 산사 사찰 진입로 풍경 ‘압권’
조선 후기 계곡에 ‘구곡’ 새긴 춘기와 하정의 결기
단풍들기 시작하고 무수한 낙엽들 절정 맞을 채비

전라도인 admin@jldin.co.kr
2026년 01월 02일(금) 10:51
(2025년 11월 통권 150호=고선주 기자)광주에서 곡성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큰 마음을 먹어야 한다. 담양이나 곡성, 구례 사는 분들은 이웃이어서 군 경계만 넘으면 들락날락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연고도 없는 채 광주에서 분주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따로 시간을 내서 다녀와야 하는 곳이 아닐까 싶다. 광주에 살며 무등산 정상을 안 가보는 사람이 대다수인 것처
럼 곡성은 더더욱 심리적으로 가깝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날 잡아 여행하지 않으면 여행차원의 둘러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런데 큰 마음 잡고 곡성 IC를 넘어서면 그때부터는 생각이 달라진다. 옆 구례에 국내 최고 명산으로 꼽히는 지리산이 있지만 곡성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산세가 만만치 않은 풍경들을 접하게 되면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다 산세 못지 않게 섬진강의 수려한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 곡성이다. 산과 강이 수려한 지점이 곡성으로 발길을 돌리게 하는 이유다.
곡성 IC를 넘어서면 동악산(動樂山) 자락이 펼쳐진다.
동악산은 해발 735m에 달한다. 영암 월출산이 809m이니까 74m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단순 수치로 비교해도 동악산 해발이 낮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높은 산에 사찰이나 암자가 깃들어 있는 것이 국내 명산들의 특징이다. 곡성 역시 유명한 사찰들이 높은 산세에 기대어 많이 분포하고 있다.
시인 조태일(전 광주대 교수)이 태어나고 자란 태안사와 곡성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사찰로는 도림사가 있다. 이번에는 유난히 극성스러웠던 여름을 뒤로 하고 그곳의 가을 풍경을 위해 찾았다.
도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 화엄사(華嚴寺)의 말사로 동악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으며, 삼국시대 원효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말 전라남도의 불교 문화를 조망할 수 있는 조선 후기 괘불탱과 아미타여래설법도를 소장하고 있다. 동악산과 660년(태종무열왕 7) 원효가 사불산(四佛山) 화엄사로부터 절을 옮겨올 당시 풍악이 온 산을 진동했다고 해 동악산이라 불렀고, 도인(道人)이 숲처럼 모여들어 도림사라고 했다고 한다. 유래는 그렇게 전해진다.
이처럼 도림사는 전남 북부 지역 유서깊은 사찰이지만 절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절경이다. 사찰을 가는 내내 동악산을 적시며 흘러가는 계곡이 예사롭지 않다. 계곡 중에 가장 지적이자 학식을 자랑하는 곳이 아닌가 싶다. 여름철에는 계곡 피서지로 최고 환경을 가지고 있는 곳으로 꼽히기도 한다. 계곡이 넓고 수량이 끊이지 않으며 반반한 바위들이 의외로 많이 분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맑은 물이 반반한 암반 위로 흐르기에 이곳을 ‘청류동(淸流洞) 계곡’이라고도 부른다.
반반한 바위들은 그냥 편평하는데 그치지 않고 옛 시문들이 새겨져 있다. 대개의 시문은 여름 호우기를 제외하고는 물 아래로 가라앉지 않기에 직접 접근해 감상할 수 있다. 그래서 예사롭지 않은 계곡이라 했던 것이다. 그냥 피서지 계곡에 가보면 이런 경우는 거의 접하기 어렵다. 또 찾아도 있지도 않다. 전남에서는 독보적인 계곡인 셈이다. 음풍농월을 추구한 시인묵객이 많이 몰렸다는 반증이다.
방문하던 날, 골짜기 곳곳에도 완연하게 단풍은 들지 않았지만 한결 쌀쌀해진 날씨가 곧 겨울이 올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는 완연하게 단풍 들 날이 멀지 않았다는 신호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들판에는 여기 저기 탈곡기들이 한참 벼를 베기 시작했고, 여기저기 빈 들판도 제법 많이 보였다.
사찰 경내로 접어드는 동안 계곡의 시문들을 보기 위해 몇 차례 차를 멎었다. 그리고 계단을 타고 폭이 좁은 곳을 건너뛰어 시문이 적힌 곳을 들여다 봤다. 청류구곡을 만든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곡성에 살던 유학자들로 알려지고 있다. 춘기(春沂) 정순태(丁舜泰)와 하정(荷亭) 조병순(曺秉順)이 그들이다. 춘기 집안은 만석꾼이었고, 하정 가문은 천석꾼이었다고 한다. 이들이 청류동 계곡에 스며있는 선비들의 발자취를 기억하기 위해 청류동 계곡에 구곡을 새겼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구곡은 제1곡(曲) 쇄연문을 시작으로 제2곡 무태동천(無太洞天), 일주문을 지나 주차장이 보이는 곳 부근에 있는 제3곡 대천벽(戴天壁), 제4곡 단심대(丹心帶), 제5곡 요요대(樂樂臺), 도림사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제6곡 대은병(大隱屛), 제7곡 모원대(暮遠臺), 제8곡 해동무이(海東武夷), 청류동계곡 마지막인 9곡 소도원(小挑源) 등이다.
이처럼 춘기와 하정이 사찰 앞 계곡에 글귀를 새겨 그 뜻을 왜 남기고자 했을까하는 생각은 한번 둘러보면 금방 납득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동악산 등산을 위해 이곳을 찾았다가 정작 사찰은 둘러보지 않고 계곡만 보고 간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만큼 계곡이 단순하게 물이 흘러가는 곳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위 하나, 돌 하나 모두 의미가 깃들어 있다는 것으로 읽혀졌다.
계곡을 찾아와서 자연 풍광을 감상해야 하는데 온통 계곡에 새겨진 옛 글귀들은 모두 이해가 되지 않아 피곤함의 지수만 올릴 필요는 없고, 나머지 이해는 다음을 기약했다.

사진에 담아 나중에 정확한 의미를 파악해보기로 하고 발길을 옮겼다. 몇 차례 계곡을 넘나 들었지만 신발이 물에 젖지는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복잡한 도시생활은 잊고 여유가 마음으로 들어오는 듯했다.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이 질려서 가을을 가불을 해다 쓸 수 있으면 쓰고 싶었던 심정이 이곳에서 들었다.
도림사 경내로 접어들자 마침 산사음악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음악회 전에 도착했더니 자원봉사를 나오신 주민들과 보살들의 식사 끝물, 합석해 자연스럽게 공양밥 한 그릇 할 수 있었다. 이날 공양밥은 곤드레밥 같았다.
비빔그릇이 거의 다 나간 상태, 새 밥그릇 하나 구해다 큰 솥에서 비빔밥을 덜어 담아주었고, 된장국 그릇 역시 모두 쓰여서 음악회 참여할 신도들을 위해 커피 용 컵 하나에 국물을 가득 담아 내 주었다. 어영부영 한상 차림이 됐다. 공양밥은 건강식으로 유명하다. 인공조미료를 치지 않고 천연의 것으로만 요리를 하다 보니 그렇다. 간은 약간 심심하다 싶은 생각이 들어 고추장 한 스푼 넣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심심한 맛을 된장국이 균형을 맞춰줬다. 그윽한 산사 절경을 배경으로 놓고 하는 점심 한끼는 그 어떤 부자의 밥상 보다 진수성찬이 됐다.
산사에 와서 드는 생각이 풍경을 눈에 담는 것보다 풍경 사진이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 정상으로부터 타고 내려오는 가을의 징후를 앵글에 담아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다. 사찰 전경과 이파리들을 담아내기 위해 가파른 산을 올라야 해서다. 숨은 턱밑까지 차 올랐고, 구두를 신고 방문하는 바람에 영 불편하기 이를데 없었다.
경내를 한 바퀴 돌고 다시 계곡을 훑었다. 계곡에는 너무빨리 가을을 물들인 나뭇잎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무는 푸르른 이파리들로 우거졌다. 아직 여름과 가을의 경계에 놓인 듯했다. 무수히 나뭇잎들이 지상으로 내려왔다는 것은 겨울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고, 아직 푸르른 이파리들은 가을을 입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신호였다. 나무 껍질은 일찍 찾아온 쌀쌀한 날씨를 견디느라 이미 회색빛 결이 곤두선 듯 보였다.
도림사는 머지않아 단풍으로 샛노랗게 물들 것이다. 산 아래로부터 불타 오를 듯 온 산이 단풍으로 물들 징조다.
짧은 방문이었지만 이날 도림사에서 산그늘처럼 서서히 하산하고 있는 가을과 조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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