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호 아픔 헛되지 않도록 노력…삶의 치열한 현장 담보한 시 쓸터" 세월호 아픔 잇따라 詩로 형상화 장헌권 목사시인 전라도인 admin@jldin.co.kr |
| 2016년 10월 26일(수) 16: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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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사제’로 불리는 장헌권 목사(광주 서정교회)는 인권이 유린되고, 정의가 탄압받는 곳은 어디든 가리지 않고 찾아가 우직한 맏형처럼 자리를 지킨다. 또한 아프고 상처입은 사람들 곁을 쉬이 떠나지 못한다. 그렇게 걷고 또 걷는 그의 의로운 발자국마다 시(詩)의 눈물꽃이 피었다. 이는 나희덕 시인(조선대 교수)이 그의 시집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평하면서 밝힌 내용이다. 장 목사는 성직자의 삶과 직분에 충실하면서도 주변의 어둡고 음습한 삶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함께’와 ‘더불어’라는 정신을 온전히 실천하며 간다. 그 실천에는 늘 시적 감수성이 동행한다. 내면 깊숙이 결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이번 시집에 관한 이야기와 앞으로 활동계획 등을 들어봤다.
시인이기 전에 ‘길 위의 사제’로 불리는데…
이 말은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면서 광우병 촛불과 불법 부정대선 국기문란 등으로 촛불을 들 때 주변에서 저를 이야기할 때 길거리 목사라고 하면서 불리워지게 된 것입니다. 매일 집회와 1인시위 기자회견에 빠지지 않고 참석을 했지요.
고난의 현장에 늘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 것입니다. 1987년 6월 항쟁 때 목회자 단식을 최초로 했구요. 18대 대선 당시 불법부정선거에 국가기관, 특히 국정원이 개입할 때인 2013년 8월22일 광주 국정원 앞에서 삭발을 했습니다. 이런 초유의 사태 앞에서 교회나 설교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자주 만나게 되다 보니 이런 별칭이 생긴 것 같습니다.
목사이자 사회참여운동가로 줄곧 지평을 넓혀왔는데요.
세월호 참사로 이제 익숙해진 진도가 고향입니다. 아버지가 진도에서 염전을 했구요.
초등학교 2학년 때 광주로 이사를 왔는데 전남중학교 재학시절 청소년 적십자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때 남을 위해 봉사를 하며 산다는 것이 보람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구요. 유신 정권 말기 서석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 당시 해직교수와 해직 언론인들의 강의도 놓치지 않고 경청했죠. 아마 고3때부터 한완상, 김동길, 함석헌, 안병무, 송건호, 문익환, 리영희, 성래운 교수 등의 강의가 열렸는데 녹음을 하면서 경청을 할 정도로 열의를 불태웠다고 봐야죠. 아마 역사의식과 사상을 만들어 가는 출발점이 된 같습니다.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는 민중들의 아픔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데 신학교 3학년 재학 때 1980년 광주 민중항쟁이 일어났어요. 서슬퍼런 군부독재의 감시를 피해 지하 강의실에서 기도회를 열어 광주 민중항쟁의 진상을 이야기했는데 이런 과정에서 길위의 사제, 길거리의 목사가 될 수 있는 동기가 된 것입니다.
채플시간에 김준태 시인의 ‘아아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시 전문을 구입해 낭독을 했던 것도 기억에 남아요.
또 광주 진상규명에 앞장서며 6·10항쟁 등 민주화운동에 참여했습니다. 1984년부터 9년간 장성 옥천교회에서는 농민들과 함께 농민운동도 했구요.
이후 광주로 와 광산구 통일 한마당 상임대표와 6·15 남측위원회 광주 지부 공동대표를 맡아 통일운동에 매진하는 한편, 도가니 사건이 터진 인화학교 대책위와 근로정신대 시민모임 자문으로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광주기독교협의회(NCC) 회장과 인권위원장을 맡고 있고, 세월호 진상규명과 사드배치 반대 운동도 펼치고 있습니다.
시집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작가의 말에서도 밝혔듯이 2014년 4월16일 이후 우리에게 봄은 더 이상 봄이 아닙니다. 4월과 5월은 잔인하며 슬픔과 고통의 시간입니다.
아직도 세월호 안에 미수습자 9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은화·허다윤·남현철·박영인 학생과 양승진·고창석 선생님, 그리고 권재근 ·권혁규·이영숙씨 등 일반인들이 그들이죠. 그 가족들의 절박함이라고 하는 것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습니다. 머리카락이라도, 손톱 하나라도 찾아 가슴에 품고 싶어하죠.
뿐만 아니라 아직 해결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정부에서는 특조위 활동을 종료시키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서는 가족들이 사생결단으로 20일째 단식농성을 했는데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세월호 선체에 130개 구멍 뚫기와 선체 절단 및 9월말 특조위 조기 강제해산을 강행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보고 저는 시집 제목을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했죠. 아직 진실이 밝혀지고 있지 않는 데 마치 끝난 것처럼 흔적 지우기를 하고 있는 셈이죠. 단원고 교실을 비롯한 모든 상횡들 말입니다.
세월호에 대한 기억과 약속의 305일 동안 희생자 305명을 위해 매일 한명씩 이름을 부르고 기억하면서 보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실천들이 이번 시집의 근간이 된 것이겠죠.
제가 최근에 발간한 시집보다 2015년에 발간한 시집이 있습니다. ‘차마 부를 수 없는 꽃’이 그것입니다.
참사가 일어난 후 한겨레 신문에서 세월호 추모 기획으로 ‘잊지 않겠습니다’ 연재를 시작했는데 그것을 읽다가 무엇을 할까 생각하던 중 한명씩 시를 쓰자 마음을 먹었고, 연필을 이용해 육필로 썼습니다. 제 진정성을 위한 것이었죠.
친밀해진 유가족들에게 자녀들이 좋아하는 음식, 꿈 등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라고 해 그것을 수집했는데 그게 마중물이 돼 시집 ‘차마 부를 수 없는 꽃’이 됐지요. 시집에는 엄마, 아빠들의 자필이 수록돼 있기도 합니다.
305명의 이름을 날마다 부르면서 기억과 약속의 305일을 새겼죠. 미수습자를 시작으로 305명을 매일 아침에 상주 단체 카톡방에 이름과 사진, 그리고 사연을 올려 더 오래도록 기억을 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시집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제일 뒷장에는 ‘그리운 이들의 이름을 아껴 불러 봅니다’라는 타이틀 아래 305명의 명단을 수록했어요. 그 가운데 우리는 304명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살한 것으로 처리된 단원고 교감 고 강민규 선생님도 기억해야 합니다. 좀더 적극적으로 기억을 하기 위해 매일 단톡방에 올라온 내용을 필사하죠. 아울러 간단한 편지인 ‘손바닥 편지’도 쓰면서 3행시로 이들을 기억해 나가고 있습니다.
문화예술 속 세월호의 아픔이 어떻게 승화돼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진실규명이 돼 치유와 회복이 되는 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예술문화적으로 유가족들의 마음을 담보한 영화나 노래를 통해 온 국민이 공감하고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외국에서도 세월호에 대한 관심이 많이 있어 그곳의 작가가 세월호에 대한 작품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현재 진행중인 ‘2016광주비엔날레’에 스페인 작가가 녹두서점을 재현, 당시의 사회과학 지식이 민주화 운동에 밑거름이 된 것처럼 세월호의 아픔이 헛되지 않도록 해나가는 노력을 꾸준하게 경주해야 합니다.
절망스러웠던 그날과 그럼에도 희망을 봐야 하는 그 이유를 좀더 문화적으로 기억하는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을 합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떼어내 가족들과 함께 나누는 것, 그것이 가장 좋은 진실문화라고 이름을 부르고 싶습니다. 가족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했습니다.
그 유가족들 곁에 늘 머물고 싶은 마음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지만 끝까지 함께할 각오입니다.
시집에는 ‘오월 광주 정신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저의 시집 1장은 세월호에 대한 것이고, 2장은 현시대 현실에 대한 것입니다.
기형도 시인이 ‘우리 동네 목사님’이라는 시에서 성경에 밑줄 긋는 목사가 아니라 생활에 밑줄 긋는 마음으로 길거리에서 쓴 시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광주 5·18에 관한 시입니다. 광주는 오월에서 통일입니다. 통일이 되기전 까지는 오월 광주는 미완입니다.
오월 광주의 5대 과제가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명예회복, 합리적 보상, 추모 기념사업인 것처럼 세월호 역시 똑같습니다.
역설적으로 광주 민중항쟁도 아직 진상규명이나 책임자 발포 명령을 내린 자가 누군지 잘 모른다고 하는 것처럼 세월호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주정신, 광주이즘, 광주다움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불의에 대한 저항정신입니다. 세월호 역시 무능력하고 비겁한 권력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믿음입니다. 광주 민중항쟁으로 광주가 집단 트라우마가 생긴 것인데 국가폭력의 결과입니다.
안산시도 마찬가지로 집단 트라우마가 생겼죠. 그래서 세월호 가족과 오월 어머니집을 통해 서로 상처를 보듬고, 새힘을 얻기도 합니다. 그것이 더불어 사는 대동정신이 아니겠습니까.
시 장르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가요?
저는 먼저 신학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역을 하면서 전주 우석대학교에서 국어 국문학을 공부했습니다. 지금 안도현 시인이 근무하고 있지만 그 이전에는 정양 시인도 있었지요. 당시에 시인된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졸업 후 목회자들 몇 사람이 모여 시 공부를 한 것이 시인의 첫 시작이었죠. 박덕은 전 전남대 교수가 지도 교수를 기꺼이 맡아 주셨구요. 시 이론을 쉽게 익히면서 바로 쓴 시를 교정하고 창작할 수 있는 길을 배우게 됐습니다. 무엇보다도 시를 쓰기 위해서는 시를 많이 읽어야 하고, 좋아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한 뒤 열심히 시집을 읽고 쓰면서 시의 참맛을 알게 됐지요. 그러다가 2008년 한 문예지 시 신인 문학상에 당선돼 등단을 하면서 시문학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시가 영회를 만나다’ 등 다양한 저술활동을 펼쳐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제가 장성옥천교회에 있을 때부터 매주 토요일 5분 방송칼럼을 했는데 1988년부터 1990년까지 방송내용을 정리해 펴낸 것이 칼럼집 ‘돌로 인해 아름다워지는 개울물소리’입니다.
이에 앞서 70∼80년대에는 제3세계영화들을 집중적으로 만났는데 영화가 세상을 변혁시키는 마중물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시기였죠. 이후 인권영화제 공동대표를 하게 됐고, ‘술잔의 고백’을 비롯해 ‘헌책방에서 만난 사람들’, ‘빗자루 도사와 동지들’ 등 다큐 영화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때 영화를 신문에 연재하면서 정리된 책이 ‘영화치유 이야기’입니다. 시네마 테라피인 셈이죠. 직접 치유하는 것보다는 상처를 드러낼 수 있는 마중물 역할을 영화가 한 것입니다. 또한 영화를 감상한 뒤 시로 쓴 것이 ‘시가 영화를 만나다’ 이구요.
이번 시집 이후 꼭 집필해보고 싶은 분야가 있다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신앙시나 영성 시를 쓰고 싶습니다. 물론 삶의 치열한 현장을 담보한 시들이어야죠. 내면을 살피는 데도 소홀함이 없어야 겠지요. 그리고 아직 ‘차마 부를 수 없는 꽃’ 90명의 학생들이 있습니다. 250명 중에 아직도 쓰지 못한 학생들이 있어 그들을 시로 쓰는 작업도 지속해나갈 것입니다.
앞으로 시인이자 목사, 사회운동가로서 활동 계획을 밝혀주세요.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지속적으로 현장에서 길거리 목사로서의 소명을 다할까 생각 중입니다.
특히 약 35년째 헌책방 순례를 하고 있는데 이 덕분으로 지금 보기 힘든 잡지 창간호들을 제법 많이 수집, 소장하게 됐습니다. 기회가 되면 이를 활용한 전시회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시집 도서관’도 개관해 더 많은 사람들이 시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데도 힘을 보태고 싶어요. 시인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면 더더욱 바랄 것이 없겠죠.
통일운동과 인권 운동을 꾸준하게 펼치는 동시에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 하나의 밀알이 되고 싶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저의 마지막 계획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전라도인 admin@jldi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