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만들어준 정당…다시 일으켜 세울 것"

‘승용불패’의 신화 간직 ‘원칙주의·현장중심’ 내세워
대기업 제의 거절 낙향 세계박람회로 여수 부흥 견인
‘국민의당’ 탄생 모티브 제공…"민원은 경청이 으뜸"

김성오기자
2017년 10월 09일(월) 11:05
주승용 국회의원(4선, 여수을)은 국민의당 원내대표를 지낸 간판 정치인이다.
그의 이력은 세 번이나 무소속으로 출마해 일군 ‘승용불패’의 신화, ‘여수반도 첫 통합시장’, ‘여수세계박람회 유치’ 등 꽤 눈부신 것들이 많다.
하지만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학입시 실패, 연이은 경선 패배와 공천 탈락, 여수시장 재선 실패 등도 있다.
그는 종종 시련과 마주쳤지만 늘 보란 듯이 돌파했다. 돌부리에 차이고, 허방에 빠지기도 했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달려온 여정이다.
지난 5월 대통령선거에서 그가 속한 국민의당은 패했고, 대선이 끝난 뒤 당 지지율은 바닥에 떨어졌다.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나? 그의 얘기를 들어보았다.

"국민의당은 호남이 만들어준 정당입니다. 2년짜리 신생 정당으로서 재정도 당원도 민주당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죠. 하지만 호남이 다당제의 기초를 만들어 준 겁니다. 정권을 잡지 못해 실망을 안겨준 것은 죄송하지만, 정기국회를 잘하면 다시 힘을 줄 것입니다. 국민의당이 다시 일어서도록 힘쓰겠습니다."

사실 주 의원은 국민의당이 탄생하는데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했다.
지난 2015년 2월 새정치민주연합(더불어민주당의 전신) 당 대표 경선에서 문재인 후보와 박지원 후보가 경쟁하며 주류인 친노세력과 비주류인 비노세력 간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경선 결과 문 후보가 당선됐고, 함께 치러진 최고위원 선거에서 주 의원은 1위로 당선됐다.
그는 4·29재보선 패배 이후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그는 ‘친노패권 정치’의 폐단을 지적하며 문재인 대표에게 혁신을 요구했다. 그런데 그에게 정청래 의원이 "사퇴할 것처럼 해놓고 공갈치는 게 더 문제"라고 공격했고, 그는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 최고위원직을 내려놓았다.
호남이 친노세력과 함께 갈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사건이었고, 이는 결국 총선에서 호남 지역민들이 국민의당에게 표를 던진 단초가 됐다.
그는 "당시 지도부에서 호남 민심을 대변하는 사람은 나 혼자인데, 호남 민심을 전달해줘도 문 대표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며 "호남의 뜻을 반영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고, 그로 인해 어떤 불이익이 오더라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몸담았던 당을 떠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정치인에게 탈당은 ‘최후의 카드’라고 여겨온 그는 지역구 민심을 수렴했다. 13개 읍면동을 돌며 "탈당하는 게 좋으냐?, 문 대표와 함께하는 게 좋으냐?"고 물었다. 돌다리를 두드리고 또 두드렸고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이후 닥친 총선에서 호남은 녹색바람이 불었고, 국민의당은 승리했다.
대선 이후 국민의당 지지율이 바닥을 치고 있지만, 그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이번 정기국회를 잘하고 내년 지방선거를 잘 준비하면 된다. 40석의 정당이 120석의 정당과 107석의 정당을 견인해내는 역할을 잘하면 승산이 있다는 것이다.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캐스팅 보트를 쥔 국민의당이 곤욕스러운 것은 이래도, 저래도 마찬가지라고 그는 해석한다. 운명이다 생각하고 정진하면 나중에 국민이 알아줄 것이라고….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얘기다. 국민의당이 탄생하게 된 배경부터 다시 살피고, 눈앞 당리당략보다는 멀리 크게 봐야 한다는 처방이다.
도의원 두 번에 민선 군수, 민선 시장, 네 번 국회의원에 당선된 관록일까. ‘정치인으로서의 덕목’을 물으니 그는 ‘네 가지’라고 답한다.
△초심을 잃지 않고 겸손하라 △청렴하라 △공부해서 배우고 익혀라 △부지런해라. 돌아가신 어머니 말씀이란다. 어머니가 정치인으로서의 덕목을 새겨주실 정도라면…, 그는 처음부터 정치인으로 길러진 것이 아닐까?
주 의원은 뜻밖에도 아니라고 한다.
젊은 시절 그는 정치에 입문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해군 장교로 제대하면서 대우 삼성 등 대기업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전자공학과를 나왔고 군에서 첨단 레이더 전문지식을 익혔기에 파격적인 대우를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여수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고 있던 아버지가 ‘이제 장남인 네가 사업을 맡아야 한다’며 고향으로 돌아오라는 말씀에 응했다.
"고민 고민하다가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아마도 제 인생에 전환점이 된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요. 지방자치시대에 서울로 가서 미래를 맡기는 것보다는 지역에서 지역발전을 위해 일하는 것도 보람이 있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아버님은 얼마 후 제11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얼마나 실망이 컸던지 그에게 "이장 선거에도 나오지 마라"고 했고, 돌아가실 때까지 소주로 시름을 달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1991년, 30년 만에 부활한 지방선거에 그는 출마한다. 주변의 권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려야 한다며 강권해서다.
"성격은 물론이고, 돈과 조직이 필요한 선거는 적성에도 맞지 않았습니다. 제자를 키우면서 연구에 정진하는 교수나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는데…, 그런 길로 와버린 거죠."
주 의원은 정치를 상대방 약점을 끝까지 물고 넘어지는 ‘하이에나’에 비유하고,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것과 같다’고 했다. 소싯적엔 숫기가 없어 여럿 모인 자리에선 발표도 못하는 여린 성품이었다.

정치인인 그에게 가장 큰 상처는 지난 2002년 여수시장 선거에서 상대 후보 측이 그에게 씌운 올가미, 이른바 ‘거문도사건’이었다.
당시 딸 둘이 여수여고를 다녔는데 "아빠가 그런 사람인지 몰랐다"고까지 할 때는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고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
재선에 실패한 그는 "다시는 정치를 않겠다"고 했지만, 주변에서 그 일을 가만두면 안된다며 법에 따라 처단할 것을 당부했다. 결국 그 사건을 허위로 보도한 기자들이 구속됐고, 이후에 거문도 ‘거’자도 나오지 않게 됐다.
물론 그에 앞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여천 군수 보궐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총재가 전격 방문해 눈물로 지역민에게 호소한 얘기, 여수시장에 당선되자마자 상대 후보의 친척이 자신이 돈을 뿌렸다며 무고(誣告)해 없는 죄를 뒤집어쓸 뻔했던 얘기 등도 빼놓을 수 없다.

"당내 경선하면 다 떨어졌어요. 정치인은 권모술수라 할까 꼼수라 할까, 그런 것에도 능해야 하는데 그런 걸 못하니 질 수밖에요. 곧이곧대로 내 길만 가는 거죠."
그렇지만 그의 실패는 대개는 더 큰 성공으로 돌아왔다.
세 차례나 무소속으로 출마해 승리했고, 지난 2002년 여수시장 선거에서 떨어졌을 때는 2년 뒤 여수을 지역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돌이켜보면 운도 따랐습니다. 새옹지마(塞翁之馬)가 된 셈이죠. 여수시장 재선에 실패한 그해 6월, 세계박람회 개최지 선정 투표에서 여수가 상해에 밀려 고배를 마십니다. 여수세계박람회를 추진해온 시장 하던 사람(주승용)과 도지사 하던 사람(허경만) 둘 다 떨어진 탓이라는 얘기가 돌았습니다. 장수는 말을 갈아타는 게 아니라는 얘기가 지역민들 사이에 회자 됐죠."
그는 제17대 국회의원총선거에서 광주·전남에서 최다 득표를 얻어 재기에 성공했다.

앞서 밝힌 ‘곧이곧대로’라는 그의 말은 그저 형용사나 부사가 아니다. 동사다.
그는 원칙에 충실하고, 현장을 중시한다. 여천 군수와 초대 통합 여수시장을 역임하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이다.
여수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많다. 낙후되고 소외된 곳이다. 유인도라고 해봐야 어떤 섬은 사람이 고작 한두 명 사니 예산지원이 어렵다. 그런 곳까지 찾아가 민원을 듣고, 거기서 하룻밤을 자고 왔다.
민원은 약자의 논리다. 백이 없으니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열에 여덟, 아홉은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고도 안 돼서 가져온 것이다. 나로서도 해줄 일이 없지만 경청이 중요하다. 그 어려움을 함께 공감하고 나누는 것만으로도 민원인의 마음이 풀린다. 더구나 함께 자고 오면 평생 잊지 못하는 추억이 된다.
현장에 답에 있다. 앞으로 분권이 확대되고 지방자치가 더 강화된다. 갈수록 민원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많아질 것이다.
그는 소걸음처럼 우직하다. 지난 2013년에 펴낸 그의 자서전은 그래서인지 제목을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라고 붙였다. 여수의 부흥을 이끈 세계해양박람회도 이런 현장중심, 원칙주의에서 비롯됐다.
여천 군수 시절 섬 지역민들이 낙후되고 교통이 불편하다며 다리를 놔달라고 했다. 바다에 다리를 놓는 일은 예산 한두 푼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는 고심 끝에 허경만 지사를 찾아갔다. 여수반도 11개의 섬을 잇는 다리를 놓으면 ‘다리박물관’이 돼 관광객도 늘고 지역도 발전할 것이라며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허 지사는 당장엔 국가가 예산을 보조해주지 않을 것이니, 세계적인 행사를 개최하던지 큰 그림을 그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그는 세계해양박람회를 구상하고 정부에 건의했다.
그는 고(故) 김영삼 대통령부터 박근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다섯 대통령에 걸쳐 여수세계박람회에 대한 지원을 이끌었고, 마침내 지난 2012년 박람회를 성공리에 치러냈다. 변방의 소도시 여수는 세계적인 해양도시로 성장했고, 관광객이 연중무휴 줄 잇고 있다.
애초 목포에는 전남도청이 이전하고, 여수에 해양엑스포를 개최한다고 했을 때는, 목포는 ‘현찰’이고 여수는 ‘어음’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전남 서부 사람들은 어음이 훨씬 낫다며 부러워한다. 그로서도 가장 큰 보람이다.
주 의원이 이렇게 강한 정치인이 된 원동력은 뭘까?
그는 대뜸 가족이라고 말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억척스러운 어머니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고, 아버지에게선 강직한 성품을 물려받았다. 1960년 광주동부경찰서장이던 아버지는 5·16 직후 광주를 접수한 군인들이 포장마차를 일주일 내로 철거하라고 하자 "그들에겐 생계수단"이라며 항거했고, 결국 서장직을 던졌다.
선거 때마다 아내, 여동생들과 딸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 그를 돕는다. 대부분 제 앞가림을 하며 살고 있어 도움 줄 일이 조금도 없고, 오히려 그가 잘하나 늘 감시하며 비판한다고 하니….
그는 아버지가 해오던 정미소와 제재소를 그 자리에서 예전 그대로 잇고 있다. 사양사업이 됐지만 가업이어서다. 집사람이 관리하니 주말이면 빨랫감을 가지고 내려간다. 지역구 관리도 할 겸 항상 여수행 비행기를 탄다. 대한항공은 탑승횟수가 1000번을 넘었고, 아시아나항공도 900번을 넘었다. 단연 전국 최고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란 말이 딱 맞는다.
국회의원 가운데 보기 드문 ‘토박이’다. 고교 때까지 지역에서 자랐고, 서울에서 대학 마치고 해군 제대 후 다시 지역에 돌아왔으니 타지 생활은 10년도 안 된다. 늘 사투리를 달고 살고, 애써 버리려 하지 않는다. 광역의원과 기초자치단체장을 거치며 지방정치를 체험한 몇 안 되는 국회의원이다.
그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좌우명인 ‘상선약수(上善若水)’처럼 목표를 향해 쉼 없이 흘러 어느덧 강물이 이르렀고, 바다를 목전에 둔 듯하다. 시나브로 호남을 대표하는 큰 나무가 되고 있다.
김성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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