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분간 ‘사물시’에 주력 시인의 삶에 충실할 더"

[광주작가] '과일'시 창작 몰입 고성만 시인
33년째 시업 교직 퇴직 후 과일 소재 시쓰기 집중
“울림이 큰 시 쓰고 싶어…다시 시의 시대 올 것“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 ‘시단 침체 극복’ 힘모아야

전라도인 admin@jldin.co.kr
2018년 10월 04일(목) 17:23
창작적 소재의 한계는 없다. 상상력의 끝 지점이 아닐싶다. 예술가들 저마다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소재를 찾아 떠난다. 때로는 예술가들끼리 겹치기도 한다. 그만큼 소재의 발굴은 상상 못지 않게 어렵다. 존재하는 것에 한번씩의 표현만 주어진다면 언어전쟁이 날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 표현의 자유는 광활하다. 언어는 널려 있다. 누가 예술적 사유를 통해 예술적 언어로 창작하느냐가 관건일 뿐이다. 똑같은 사물을 놓고 서로 다른 표현들이 차고 넘친다. 어쩌면 예술은 출발점에서부터 서로 상이함을 확인하는데서 그 의미를 찾는지도 모른다. 별별 소재와 창작이 허용되는 공간이 예술이다. 그 소재가 이번에는 달콤하고 상큼한 과일이다. 최근 ‘과일’을 시적 소재로 활발하게 창작하는 이가 있다. 그는 오랫동안 국제고등학교 등 교직에 몸담다 2년전 자유로운 시적 사유를 통한 시쓰기를 위해 교단을 나와 창작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고성만 시인이 그다.
고 시인은 최근 과일에 관한 시 8편을 창작했다. 처음에는 한 두편으로 맛을 표현해본 것. 아마 추상성을 구체화시키고 싶은 욕망의 발로였던 셈이다. 달콤한 것을 맛있다고 느끼는데 구체적 사물로 바꾸다 보니 과일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무언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일시를 쓰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그 과일을 근본적으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는 흔한 과일에 대한 단편 외에는 알고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공부 아닌 공부를 했다. 그 과정에 깨친 사실도 여럿이다. 과일의 삶을 추적한 것이다. ‘체리’를 시로 형상화했을 정도다. “전통적 과일이나 외국유입종 등 과일의 종류가 많은데 처음부터 국산도 있지만 유입돼 토착화가 이뤄진 것도 많죠. 과일의 삶을 추적하면 우리네 삶을 반추해볼 수 있겠다 싶었어요. 최근 국내에 들어와 시판되고 있는 체리는 국내에 재배농가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익숙하면서 새로운 맛 때문에 ‘체리’ 시까지 창작하게 됐습니다. 키위도 과거 동양에서 자라던 ‘다래’가 뉴질랜드로 건너갔다가 키위가 돼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게 됐죠.”
그는 ‘체리’ 시에서 ‘도대체 이 맛은 누가 번역하였을까’라고 노래한다. 그는 체리는 달콤하고, 키위는 쌉싸름하다고 말한다. 키위는 ‘숙성’돼야 맛있다는 것도.
그에 따르면 키위를 냉장고에서 숙성해 놓으면 더 맛이 있게 되는 것처럼 우리들의 삶도 ‘숙성’돼야 제 맛이 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요즘 그의 시밥상에는 체리와 키위 외에도 수박, 자두, 블루베리, 감, 사과, 버찌 등 과일이 올려져 있다. 이 시들에서 ‘인생은 과일맛’이라는 것을 추출하고 싶었던 듯하다.
지금 그는 과일시라고 하는 영역을 개척하고 있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사유적으로 고민과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올해 시력 33년째를 맞고 있다. 그 기준은 1985년이다. 그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최종심에 기형도와 함께 올라서다. 무언가 될듯 하면서도 안되던 무렵이었다. 이로부터 13년의 시간이 흐른 뒤 그는 1998년 ‘동서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정식 데뷔하게 된다. 그 이전 지역 일간지 신춘문예에 당선돼 이름 석자를 문단에 각인시켰다. ‘올해 처음 본 나비’와 ‘슬픔을 사육하다’, ‘햇살 바이러스’, ‘마네킹과 퀵서비스맨’ 등 네 권의 시집을 펴낸 그이지만 가장 큰 고뇌 역시 시적 사유에 대한 정리였지 않나 싶다. 광주에서 오랜 시간 창작을 해온 예술가들에게 숙명처럼 따라붙던 ‘민중문학’이었다. 민중문학을 제대로 해보고 싶었으나 식상하다는 생각이 앞섰다. 민중문학을 추종하려고만 했던 탓이다. 이를 자성한 뒤 그는 자신만의 시적흐름을 잡아갔다. 생활시로 방향을 설정한 것이다.
“저는 시대정신 구현이 명제였으나 제대로 구현이 안돼 자성하게 됐죠. 그래서 생활시를 쓰게 된 것입니다. 거대한 구호를 벗어나 일상의 감각과 관념을 결합한 시로 방향을 잡았어요.”
여기에는 광주가 가지고 있는 큰 흐름 두 가지와 연관돼 있다는 분석이다. 김현승 시인과 그 제자들이 사유를 위주로 현실을 수용하면서 창작하던 흐름과 1980년대라고 하는 거대담론을 수용한 흐름이 그것이다. 그는 전자를 선택했다. 두 가지 흐름 모두를 아우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다 주변에 있는 사물을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교직을 나온 뒤 처음으로 큰 시적 소재로 다가와 큰 흐름을 만든 과일시 창작도 이런 흐름에서 태동된 것이다.
학교에서는 사명감의 시였다. 모범 정답만 말해야하는 강박이 생겨났을 정도로 학교에 재직하면서 창작을 한다는 것은 여러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매일 출렁이던 마음이 가라앉았고, 쓰고 싶었던 시를 쓰면서 언어의 맛까지 살아나는 느낌을 받는다. 생활을 외면하지 않는 시를 쓰고 싶은 그는 기지와 해학, 감칠맛, 행간의 여운을 살리는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겨놓고 있다. 그는 이런 시에 대해 ‘애증’이라고 표현한다.
“사랑하는 애인이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지만 결코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애증이 교차해도 등을 돌릴 수 없는 게 시입니다.”
사물에서 감각과 의미를 발견한 시편을 다양하게 창작할 복안이다. 그래서 그는 당분간 과일을 위시로 한 사물시에 주력할 방침이다. 이는 숙성된 시집을 펴내고 싶고, 더 울림이 큰 시를 쓰고 싶기 때문이다. 이 숙성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시집을 성급하게 낼 생각은 없다. 차분하게 숙성될 때까지 시인으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갈 각오다.
그러면서 시단의 침체에 관한 자신의 생각도 잊지 않는다.
“시가 1980년대와 1990년대는 시대의 흐름과 밀접했습니다. 말할 수 없던 것이 많았던 시대였잖아요. 근데 이런 것들을 시가 다 말해줬죠. 2000년대 들어와 사람들이 고향대하듯 시를 많이 접했어요, 그래서 자연시가 많이 나왔습니다. 지금은 고향과 자연이 멀어져 시도 멀어졌지요. 현재의 삶은 산문화됐다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다시 시의 시대가 올 겁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상처를 다독여줄 수 있는 게 시이니까요.”
그는 지역시단에 고재종 김선태 정윤천 염창권 등 무게감 있는 시인이 있지만 시단의 침체는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시각이다. 어떻게 좋은 시를 쓰고, 전달할 것인지 고민해야 하는 한편, 거대담론에 대한 의지보다는 문학으로 말해야 하고.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을 내비쳤다.
고 시인은 침체극복의 하나로 순수한 창작을 이야기하기 위한 ‘창작포럼’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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