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동화 접한 사람들이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광주작가] '광남일보' 신춘문예 출신…첫 동시집 낸 김명희 전라도인 admin@jldin.co.kr |
| 2019년 02월 12일(화) 18: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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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호·제69호) 보통 문학인의 삶은 굴곡진 경우가 많다. 여기 다루고자 하는 문인 역시 굴곡진 삶으로 말하자면 어느 누구보다 뒤지지 않을 인생 행로를 보여준다. 경상도 출신으로 전라도로 넘어와 뿌리내리며 살아야 했고, 어려운 여건을 딛고 문예지와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해 현재 문학의 자리까지 내달려온 족적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경북 포항 출생으로 부산에 거주하다가 산 낯설고, 물 설은 전남 강진으로 이주해와 타향살이를 하며 문학의 꿈을 키워야 했다. 문학 전공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장르 넘나들기 혹은 여러 장르 통섭하기 등 문학 안에서의 부침이이어져야 했다. 이런 행보 또한 그의 삶만큼이나 힘겨우면서도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는 시인이자 아동문학가로 활동 중인 김명희씨의 이야기다. 그의 문학적 삶은 순전히 전라도에서 키워졌다. 부산에서 거주하다 전남 강진 출생의 남편을 만나 22세 때 강진으로 이주하면서다. 강진에서는 목포대에 출강하던 황학주 시인이 주축이 돼 결성된 문학동아리 ‘남촌시’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10여명과 함께 문학활동을 펼쳤다. 당시 남촌시의 아지트는 김명희씨가 운영 중이던 김정문알로에 교육장에서였다. 이때 그는 문학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등 기본을 익히는 시기로 보인다. 강진에 머무는 15년 동안 이런 과정은 지속된다. 물론 훗날 그에게 큰 문학적 자양분이 됐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문학적 갈증이 있었다. 기본기를 익히되, 체계적인 학습을 받을 수 없다는 한계와 아쉬움이 교차했다.
그래서 광주YMCA 문예창작반을 노크하게 된다. 체계적으로 문학을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쉽게 찾지 못해 YMCA 같은 곳에 가면 문학의 길이 보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우선했다.
서른 일곱이 되던 해에 문예창작반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광고전단을 보고 그 길로 가 바로 등록한 뒤 당시 지도교수였던 전원범 광주교대 교수의 문하로 들어가면서 체계적인 문학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시를 쓰지 못하니까 긴 글을 썼는데 장르로는 수필이었다. 그리고 나서 전원범 교수로부터 시를 쓸 것을 권유받고 시에 본격 입문하게 된다.
광주YMCA는 그에게 문학인의 삶을 놓을 수 있게 만든 출발지일 수 있고, 그가 오늘날 문단에 정식 데뷔해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든 주춧돌인 셈이다. 이때의 과정을 거쳐 2004년 계간 ‘시선’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호수가 있는 집’, ‘길 없는 길’, ‘푸른 발자국’ 등 세권의 시집을 펴내는데까지 이른다.
이런 그는 어렸을 때 일기 잘 쓴 상을 항상 받았다고 한다. 어느 날은 밴드부가 멋있어 찾아갔더니 당시 선생님이 너는 문예반으로 가라고 돌려보낸 뒤 그는 줄곧 문예반 활동을 펼쳤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건국대학교에서 언니, 오빠(선생님이라 부름)들이 봉사활동을 나왔는데 마을회관에서 글쓰기를 시켰다. 글쓰기에서 1등을 했고, 한 선생님으로부터 ‘소월시집’을 선물받기도 했다. 이 무렵의 기억이 그를 문학의 길로 접어들 게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인으로 활동하면서도 문득 문득 떠오르는 그때가 엊그제 일처럼 선명하게 생각난다는 반응이다.
다시 문학인의 삶으로 돌아와 시를 창작하다
가 동화와 동시라고 하는 아동문학의 영역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 지 궁금했다. 그가 동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13년 광주교대 대학원에 입학하면서였다. 그가 처음부터 동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아니고, 먼저는 동시였다. 6개월은 동시를, 또 6개월은 동화를 Tm는 식이었다. 2014년 후반기부터 본격적인 동화 쓰기에 돌입한다. 그리고 3년 만에 ‘2017 광남일보 신춘문예’ 동화에 당선되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해 그는 강원일보 신춘문예 동시부문에도 당선돼 겹경사를 맞았고, 시인에 이어 아동문학인으로서의 삶까지 정식으로 추가하게 된다.
물론 그는 1999년 ‘예향’ 수기 공모, 2014년 ‘동서문학’ 맥심상(동화부문)과 2015년 KB창작동화제 입선 등 두루 입상한 경력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런 저런 문학적 족적이 오늘의 그를 있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는 2014년 초반부터 시작하게 됐구요. 동화는 예전에 긴 글을 써봤던 가락이 있어 시창작 활동을 벌이면서 틈틈이 썼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했던 것도 순전히 글을 위해서였죠. 대학원에 진학한 뒤 문학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동시는 시를 쓴 덕분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죠."
이미 그의 문학적 삶에서 확인된 것이지만 세 장르를 운명처럼 끌고 가야 한다는 마음이 커보인다. 이는 그에게 불변이 될 듯 싶다. 필자로서는 여러 장르를 하니 어지럽지 않을까부터 물었다. 그도 사람인지라 예상했던 답들이 돌아왔지만 크게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제가 성인이라 성인의 생각과 그 감성을 그대로 옮겨 쓸 수 있는 게 좋습니다.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시를 보면 시가 보이고, 동시를 보면 동시가 보이며, 동화를 보면 동화가 보여요. 전반적으로 구성을 짜는 게 향상됐고, 내용적 깊이도 좋아졌다고 볼 수 있죠."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한곳에 집중하기 어려운 점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고 했다. 혹여 ‘죽도, 밥도 안될까’하는 걱정이 있어서다. 다만 그는 세 장르는 상보하며 공존시켜야한다는데 공감을 표한다. 각각의 약점을 보완하는 법을 알아가는 것 같았다. 동시나 시의 완결성이 좋아졌고, 동화를 쓰면서 집중력까지 강화됐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나도 안될 것처럼 우려하지만 그는 ‘문학은 한덩어리이고, 서로 상호작용이 되더라’고 귀띔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인생시 혹은 대표시로 ‘반달’을 언급했다. 광주에 올라와 힘들 때 그 시절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어서다. ‘반 쯤 녹아 없어진 가슴 하나가 상수리 나무에 거꾸로 걸려 있네’라고 노래한 시다. 자신의 삶의 지표 그 자체라는 설명이다. 어려운 시절 쓰여진 시여서 지금도 가장 마음에 남는 시로 꼽았다.
"그동안 이방인으로 살아왔지만 이제 문학 만큼은 알아가고 있고, 가슴으로 느끼는 단계입니다. 제 동화를 접하는 사람들과 독자들이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그는 최근 첫 동시집 ‘집속의 집’을 펴낸 데 이어 오는 12월 첫 동화집 ‘꼬복이’(가문비)를 펴낼 계획이다. 여건이 되는대로 장편동화 출간도 예정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경북 포항 출생으로 부산에 거주하다가 산 낯설고, 물 설은 전남 강진으로 이주해와 타향살이를 하며 문학의 꿈을 키워야 했다. 문학 전공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장르 넘나들기 혹은 여러 장르 통섭하기 등 문학 안에서의 부침이이어져야 했다. 이런 행보 또한 그의 삶만큼이나 힘겨우면서도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는 시인이자 아동문학가로 활동 중인 김명희씨의 이야기다. 그의 문학적 삶은 순전히 전라도에서 키워졌다. 부산에서 거주하다 전남 강진 출생의 남편을 만나 22세 때 강진으로 이주하면서다. 강진에서는 목포대에 출강하던 황학주 시인이 주축이 돼 결성된 문학동아리 ‘남촌시’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10여명과 함께 문학활동을 펼쳤다. 당시 남촌시의 아지트는 김명희씨가 운영 중이던 김정문알로에 교육장에서였다. 이때 그는 문학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등 기본을 익히는 시기로 보인다. 강진에 머무는 15년 동안 이런 과정은 지속된다. 물론 훗날 그에게 큰 문학적 자양분이 됐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문학적 갈증이 있었다. 기본기를 익히되, 체계적인 학습을 받을 수 없다는 한계와 아쉬움이 교차했다.
그래서 광주YMCA 문예창작반을 노크하게 된다. 체계적으로 문학을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쉽게 찾지 못해 YMCA 같은 곳에 가면 문학의 길이 보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우선했다.
서른 일곱이 되던 해에 문예창작반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광고전단을 보고 그 길로 가 바로 등록한 뒤 당시 지도교수였던 전원범 광주교대 교수의 문하로 들어가면서 체계적인 문학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시를 쓰지 못하니까 긴 글을 썼는데 장르로는 수필이었다. 그리고 나서 전원범 교수로부터 시를 쓸 것을 권유받고 시에 본격 입문하게 된다.
광주YMCA는 그에게 문학인의 삶을 놓을 수 있게 만든 출발지일 수 있고, 그가 오늘날 문단에 정식 데뷔해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든 주춧돌인 셈이다. 이때의 과정을 거쳐 2004년 계간 ‘시선’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호수가 있는 집’, ‘길 없는 길’, ‘푸른 발자국’ 등 세권의 시집을 펴내는데까지 이른다.
이런 그는 어렸을 때 일기 잘 쓴 상을 항상 받았다고 한다. 어느 날은 밴드부가 멋있어 찾아갔더니 당시 선생님이 너는 문예반으로 가라고 돌려보낸 뒤 그는 줄곧 문예반 활동을 펼쳤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건국대학교에서 언니, 오빠(선생님이라 부름)들이 봉사활동을 나왔는데 마을회관에서 글쓰기를 시켰다. 글쓰기에서 1등을 했고, 한 선생님으로부터 ‘소월시집’을 선물받기도 했다. 이 무렵의 기억이 그를 문학의 길로 접어들 게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인으로 활동하면서도 문득 문득 떠오르는 그때가 엊그제 일처럼 선명하게 생각난다는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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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문학인의 삶으로 돌아와 시를 창작하다
가 동화와 동시라고 하는 아동문학의 영역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 지 궁금했다. 그가 동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13년 광주교대 대학원에 입학하면서였다. 그가 처음부터 동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아니고, 먼저는 동시였다. 6개월은 동시를, 또 6개월은 동화를 Tm는 식이었다. 2014년 후반기부터 본격적인 동화 쓰기에 돌입한다. 그리고 3년 만에 ‘2017 광남일보 신춘문예’ 동화에 당선되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해 그는 강원일보 신춘문예 동시부문에도 당선돼 겹경사를 맞았고, 시인에 이어 아동문학인으로서의 삶까지 정식으로 추가하게 된다.
물론 그는 1999년 ‘예향’ 수기 공모, 2014년 ‘동서문학’ 맥심상(동화부문)과 2015년 KB창작동화제 입선 등 두루 입상한 경력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런 저런 문학적 족적이 오늘의 그를 있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는 2014년 초반부터 시작하게 됐구요. 동화는 예전에 긴 글을 써봤던 가락이 있어 시창작 활동을 벌이면서 틈틈이 썼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했던 것도 순전히 글을 위해서였죠. 대학원에 진학한 뒤 문학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동시는 시를 쓴 덕분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죠."
이미 그의 문학적 삶에서 확인된 것이지만 세 장르를 운명처럼 끌고 가야 한다는 마음이 커보인다. 이는 그에게 불변이 될 듯 싶다. 필자로서는 여러 장르를 하니 어지럽지 않을까부터 물었다. 그도 사람인지라 예상했던 답들이 돌아왔지만 크게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제가 성인이라 성인의 생각과 그 감성을 그대로 옮겨 쓸 수 있는 게 좋습니다.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시를 보면 시가 보이고, 동시를 보면 동시가 보이며, 동화를 보면 동화가 보여요. 전반적으로 구성을 짜는 게 향상됐고, 내용적 깊이도 좋아졌다고 볼 수 있죠."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한곳에 집중하기 어려운 점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고 했다. 혹여 ‘죽도, 밥도 안될까’하는 걱정이 있어서다. 다만 그는 세 장르는 상보하며 공존시켜야한다는데 공감을 표한다. 각각의 약점을 보완하는 법을 알아가는 것 같았다. 동시나 시의 완결성이 좋아졌고, 동화를 쓰면서 집중력까지 강화됐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나도 안될 것처럼 우려하지만 그는 ‘문학은 한덩어리이고, 서로 상호작용이 되더라’고 귀띔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인생시 혹은 대표시로 ‘반달’을 언급했다. 광주에 올라와 힘들 때 그 시절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어서다. ‘반 쯤 녹아 없어진 가슴 하나가 상수리 나무에 거꾸로 걸려 있네’라고 노래한 시다. 자신의 삶의 지표 그 자체라는 설명이다. 어려운 시절 쓰여진 시여서 지금도 가장 마음에 남는 시로 꼽았다.
"그동안 이방인으로 살아왔지만 이제 문학 만큼은 알아가고 있고, 가슴으로 느끼는 단계입니다. 제 동화를 접하는 사람들과 독자들이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그는 최근 첫 동시집 ‘집속의 집’을 펴낸 데 이어 오는 12월 첫 동화집 ‘꼬복이’(가문비)를 펴낼 계획이다. 여건이 되는대로 장편동화 출간도 예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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