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호·제71호=박세라 객원 기자)그가 양림동에서 살 것이라고 선언했을 때, 사람들은 그저 흘려들었을 뿐이었다. 서울사람이 ‘일’ 탓에 광주에 잠시 머무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서울살이를 접고 본격적으로 광주에 터를 잡았다. 아내와 함께 내려왔는데, 이제는 아이까지 나고 자라 단란한 세 가족이 됐다. 양림동 주민이 된 지 벌써 7년째다.
이한호 쥬스컴퍼니 대표에게 좋은 문화기획이란, 문화로 재미난 일을 벌이고 또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 일에서 끝나지 않는다. 나아가 기획자 자신마저도 "이곳에 살고 싶다"는 머묾의 욕구가 일 때야 말로 그 어떤 ‘수치적’ 성공보다 값진 결과물이다.
미세먼지가 걷힌 3월의 어느 날 광천동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꼭 안 그래야지 싶으면서도, 처음 물은 것은 그의 고향이었다. 문화예술축제 ‘1930양림쌀롱’부터 시티투어버스 ‘광주100년 이야기’ 등 우리 지역과 가까운 일들을 벌이는 이 대표이기에 늘 그의 고향이 궁금했던 탓이다.
서울 토박이인줄 알았는데 그의 고향은 부산이었다.
"고향은 부산이고, 쥬스컴퍼니 본사는 서울에 있어요. 광주와 첫 연을 맺은 것은 2006년 제6회 광주비엔날레 개폐막 파티를 도맡으면서였어요. 이외에도 대인예술시장·주상절리대 장소브랜드화·광주김치축제 홍보 등 다양한 일들을 벌였죠. 그러면서 서울에서 광주를 내려다 볼 때와, 광주 안에서 다시 광주를 바라볼 때 차이를 온 몸으로 체감하게 됐습니다."
이 대표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진정성’에 대해 자문했다. 일회적이고 이벤트성의 문화기획이 아니라, 도시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중장기적인 프로젝트에 관심이 갔다.
그때 서울이란 둥지를 벗어나 지역으로 내려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역시 첫 후보지는 고향인 부산, 다음은 전통문화도시 전주, 그리고 그 다음이 광주였다.
"아시아문화중심도시 광주라는 도시비전에 끌렸어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생겼고 7대 권역별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있었죠. 그 거시적인 틀 안에서 제가 함께 움직인다면 좋은 시너지가 날 것이라 보았습니다. 2012년 쥬스컴퍼니 광주 사무소를 열었죠."
한 달 여 간은 부산과 광주를 오갔다. 무작정 터를 잡기보다는, 먼저 마을과 친해지기 위한 일종의 준비 기간이었던 셈이다. 그러다 이 대표가 본 것은 양림동이 가진 날 것의 매력이자, 가능성이었다.
"마을을 산책하다가,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서 잠시 멈췄어요. 20여 분 정도가 모셔져 있었는데,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분들이 양림동에서 본 것은 무엇일까. 또 어떤 힘들이 이들을 이역만리 타국에 머물게 했을까. 그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 양림동의 새로운 미래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줄곧 양림동을 사랑했다. 광주에서 활동하는 문화기획자 대부분이 주목하는 1980년의 광주가 아니라 1930년 양림이었다. 이 대표는 청년기획자들과 함께 양림동에 대해 깊이 공부했다. 스토리클럽을 운영해, 양림동 골목에 깃든 이야기를 발굴했고 이는 ‘모단걸다이어리’란 연극으로, ‘청춘달빛투어’란 프로그램으로, 또 ‘양림쌀롱콘서트’라는 공연으로 빛을 보았다. 양림쌀롱에는 3년여 간 100여 명(팀)의 아티스트들이 함께했고, 1000명의 청년 기획자들이 힘을 보탰다.

이 대표가 토크콘서트 ‘판 페스티벌’에서 도시문화재생과 관련한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

"무엇보다 청년예술인들과 기획자들의 데뷔무대 혹은 실험무대가 돼 주었다는 게 가장 큰 기쁨입니다. 매달 열리는 ‘작은 무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양림쌀롱을 거쳐 간 이들이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뿌듯하죠. 7년여 광주에서 머물며 얻은 성과 중 가장 값지다고 생각해요."
올해 ‘1930양림쌀롱’은 계속될 예정이다. 다만 매달 마지막 수요일에 진행됐던 행사가 토요일로 옮겨져 펼쳐진다. 평일 저녁부터 시작된 때와는 달리, 종일 축제로 가족 단위 방문객들은 물론, 외부 관광객들의 발길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함께 이번에 진행되는 ‘광주100년 이야기:시즌2’ 시티 투어의 버스는 1980년 5월로 드라이브를 걸었다. 80년 5월의 흔적을 좇는 사적지 코스는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쥬스컴퍼니의 투어가 주목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장소특정형 퍼포먼스가 함께 하기 때문이다.
"5·18 사적지를 돌아보면서 그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드라마나 영상 그리고 연극으로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해설’이 아니라 직접 보고 듣고 만지고 ‘체험’할 수 있는 5월 투어가 될 거예요. 5월부터 시티투어 버스가 운행되고, 세계수영선구권대회가 열리면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도 진행할 생각입니다."
이 대표는 문화가 가진 힘을 ‘공감’에서 찾는다. 문화라는 것이 결국 공동체들의 끈끈함을 지탱시키는 힘이라 믿는다. 문화예술로서 일상에서는 가질 수 없는 새로운 소통의 기회를 얻고, 또 이를 매개로 교류하게 하는 것이 문화적 힘이라는 생각이다.
"이렇게 맺어진 공감대는 결과적으로 우리네 삶에 영향을 주죠.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시민과 시민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것. 나아가 이 유기성에 합류하고 싶다는 생각 즉, ‘광주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행복한 선택지를 던져주는 것이 문화기획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앞으로도 할 이야기들이 많다. 1930년 양림동에서 1980년 5월 광주, 그리고 2030년 아시아문화중심도시까지. 100년의 역사를 아울렀지만 여전히 문화로서 풀어내고픈 것들에 욕심이 난다.
"광주정신의 원류에 관심이 가요. 호남 선비정신의 뿌리인 월봉서원을 시작으로,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분연히 일어섰던 광주 역사 면면을 다뤄보고 싶습니다. 의병활동·광주학생독립운동 그리고 5·18까지 과거에서부터 오늘날까지 뻗어 나오는 광주정신이 있거든요. 남도가 가지고 있는 ‘삶’과 ‘정신’을 담은 문화기획들을 선보이고 싶어요. 그렇다면 광주 100년이 아니라 500년의 시간을 펼쳐 보일 수 있겠죠."
마지막으로 그는 문화기획자로서 일찌감치 준비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 운을 뗐다. 바로 ‘종전’ 이후의 문화기획이다. 종전 그 이후라니, 그 어감만으로도 짜릿하고 재미나다. 벌써 첫발은 뗀 상태다. 지난해 9월 ‘DMZ 문화로 종전캠프’를 진행, DMZ 국제다큐영화제·투어·종전쌀롱 등 토크콘서트를 벌였다. 올해도 1박2일 캠프를 이어갈 계획이다. 장소·사고·다양성을 제한하던 38선이 없어진다면 문화기획의 판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는 청년기획자들과 함께 그 시대를 맞기에 앞서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분단 상황에서 문화기획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죠. 종전이라는 것은 결국 사고의 확장이에요. 머지않은 미래에 북한 어딘가에서 문화기획을 하고 있을 제 모습을 상상해 봐요. 백두산에서, 금강산에서 문화콘텐츠 발굴사업을 하고 있을 수도 있겠고, 철도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해 유럽으로 가는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을 수도 있죠. 그렇게 더 넓게, 더 크게 문화의 영토를 확장시켜 가면 지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또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하면 재미있을까. 계속해서 할 일이 있다는 것. 그 무한한 상상은 저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에너지가 돼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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