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아성찰’이 원동력…좋아하는 음악 지속할 터" [예술인플러스] 플루티스트 김규향 동아보건대 교수 전라도인 admin@jldin.co.kr |
| 2020년 04월 19일(일) 17: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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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호 제83호 =정채경 기자) 그의 인생은 음악을 빼놓고서는 설명할 수가 없다. 노래를 부르던 학창시절부터 플루트를 벗 삼아 연주자로 무대에 서는 등 그의 삶 곁에는 언제나 음악이 자리했기 때문이다.
플루티스트 김규향씨는 3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플루티스트의 길을 걸은 데 이어 현재는 동아보건대 실용음악과 교수로 예비 음악인들을 양성하는 데 앞장서는 한편, 2014년부터 전남실용음악협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동아보건대 실용음악과가 개설될 때부터 현재까지 학과장인 그는 갓 스무살이 된 예비 음악인부터 오랜 꿈을 꿔온 만학도까지 여러 학생들을 맡고 있다. 저마다 사연을 갖고 있다.
전남 신안 암태도에서 학교를 오가며 수업을 듣는다는 한 학생부터 완도 보길도에서 전복을 캐던 손으로 드럼 채를 쥔다는 이야기까지 다양하다. 김 교수는 아코디언 연주를 해온 78세 어르신이 입학해 전공자가 됐다거나, 생활 전선에 일찍 뛰어들었지만 늘 가슴 속에 음악가로서의 꿈을 안고 있었다는 어느 세탁소 부부의 이야기 등 가슴 먹먹해지는 사연을 들려줬다.
애정 어린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는 학생들을 자랑스러워하며, 그들로 인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자문하는 시간이 많다고 했다. 그가 학생 한 명, 한 명의 사연에 귀 기울일 수 있고, 온 마음을 다해 학생들을 보듬는 한편, 이들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은 그만큼 김 교수의 품이 온전히 넓다는 의미가 아닐까.
학생들에 대한 이같은 관심은 개개인에 맞춘 교육 뿐만 아니라 융복합 교육과정을 개설해 운영하는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전남 해남 출신인 김 교수는 어린 시절부터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 대표로 독창 대회에 나가 동요 ‘나비노래’를 부른 것을 시작으로, 학교 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교내 합창단을 고(故) 정춘길 선생님이 지도해 주셨는데, 그 분을 보며 마음 속으로 ‘나도 음악 선생님이 돼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합창단을 이끄는 것과 함께 아이들의 실력을 키우는 모습이 대단해 보였던 모양이다.
그 뒤 피아노 등 여러 악기와 무용을 배우면서 다양한 장르의 예체능을 꾸준히 경험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늘 스스로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은 음악이라는 걸 잊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그러다 중학생 때 플루트를 전공한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플루트에 관심을 갖게 됐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본격적으로 플루트 레슨을 받았다.
"초등학교 때 음악을 좋아할 수 있게 해주신 고 정춘길 선생님은 물론, 첫 플루트 레슨을 받았던 배혜경 선생님 등 좋은 스승님들을 만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분들은 제게 음악적 싹을 틔워준, 고마운 분들이에요. 늘 고마움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목포대 음악학과에서 플루트를 전공한 김 교수는 목포시립교향악단과 실내악 연주자로 다양한 공연 활동을 했다. 또 제자들을 양성해 오케스트라 단원과 음악 교사, 방과후 강사, 대학 강사 등으로 활동하게 했다.
그러다 그는 전문성을 기르기 위해 대학원 진학을 선택한다. 경희대 음악대학원을 다니면서 목포와 서울을 오갔다. 그는 2000년에 목포에서 첫 플루트 독주회를 펼쳤는데, 당시 열린 연주회가 목포에서 처음으로 진행된 플루트 독주회였다고 한다. 플루트 음악 불모지였던 목포에서 대중화의 물꼬를 튼 셈이다.
이어 2002년에는 목포 플루트 앙상블을 창단해 다수의 공연을 연 가운데 ‘희귀·난치병 어린이를 위한 음악회’라는 부제를 내건 정기연주회를 열어 지역사회에 귀감이 되기도 했다. 감동후불제를 실시해 발생한 수익금은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어린이들을 돕는 데 썼기 때문이다. 이같은 활동으로 목포 지역의 플루트 저변확대에 많은 기여를 했다.
"제자들을 무대에 세워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 목포 플루트 앙상블을 창단하게 됐어요. 기획부터 홍보, 진행 등을 도맡았고, 우연한 계기로 나눔을 시작했다가 취지가 좋아 지역 아이들을 후원했죠. 플루트를 통해 앙상블 연주회를 진행하는 한편, 의미있는 음악회도 하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그의 난치병 어린이돕기 음악회 활동이야말로 나누는 기쁨을 실천한 데다 음악으로 따뜻한 기운을 지역사회에 전파한 것이어서 의미있게 다가왔다. 음악인으로 자리매김해 안정적인 삶을 살던 그는 그동안 준비해왔던 2006년 이태리 유학길에 오른다. 항상 마음 속에 지니고 있었던 오랜 꿈을 행동으로 옮긴 것.
그는 이태리로 떠나며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갔다. 서양 악기를 다루는 음악인으로 서양 음악의 본 고장인 이태리의 문화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 시기가 "삶의 터닝포인트가 됐다"는 그는 "마음 속 염원을 위해, 후회없는 삶을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소회했다.
이태리에서 그는 A.M.I아카데미아 전문연주자 과정을 거쳐 7년 과정인 피에트로 마스카니 국립음악원(P. Mascagni)에서 디플로마를 취득하는 쾌거를 이뤘다.
로마 오페라극장과 밀라노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의 수석 연주를 역임, 국립음악원 정교수인 플루티스트 안토니오 아멘두니(Antonio Amenduni)가 그의 스승이다. 한국인으로는 그의 첫 제자라는 김 교수는 돈독한 사제지간을 유지, 그를 목포로 초청해 제5회 정기연주회로 열린 ‘희 귀·난치병 어린이를 위한 음악회’를 함께 장식하기도 했다.
"제5회 정기연주회에는 200여 명의 연주자들이 한 무대에 올랐습니다. 교수님이 흔쾌히 참여해주셨고, 목포를 방문해 연주를 들려주셨던 것이 기억에 남아요. 제 스승인 교수님과 제자인 단원들, 단원들의 제자 등 사제지간이 한 데 모여 무대에 올라 선사한 그 울림은 잊지 못할 거예요."
이어 기억나는 무대로 2012년 전남도립국악단과의 협연 무대를 꼽았다. 북한 작곡가가 만든 곡을 한국에서 김 교수가 연주한데다, 원래 단소곡이던 원곡을 플루트곡으로 편곡해 국악단 반주에 맞춰 무대에 올려져 음악으로 남과 북의 화합, 동·서양의 만남을 이뤄내 의미가 남달랐다는 것이다.
그의 이같은 활동은 스스로를 인정하는 데에서 비롯됐다. 자신을 돌아본다는 그는 "‘자아성찰’이 이 모든 일을 해낼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의 바람을 드러내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교육자이기에 지금처럼 후학에 힘써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힘든 산을 넘어야 할 때 혼자 넘는 것 보다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넘으면 쉽죠. 저는 그때 제자들에게 그 손이 돼 주고자 해요. 좋아하는 음악을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계속하고 싶습니다."
플루티스트 김규향씨는 3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플루티스트의 길을 걸은 데 이어 현재는 동아보건대 실용음악과 교수로 예비 음악인들을 양성하는 데 앞장서는 한편, 2014년부터 전남실용음악협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동아보건대 실용음악과가 개설될 때부터 현재까지 학과장인 그는 갓 스무살이 된 예비 음악인부터 오랜 꿈을 꿔온 만학도까지 여러 학생들을 맡고 있다. 저마다 사연을 갖고 있다.
전남 신안 암태도에서 학교를 오가며 수업을 듣는다는 한 학생부터 완도 보길도에서 전복을 캐던 손으로 드럼 채를 쥔다는 이야기까지 다양하다. 김 교수는 아코디언 연주를 해온 78세 어르신이 입학해 전공자가 됐다거나, 생활 전선에 일찍 뛰어들었지만 늘 가슴 속에 음악가로서의 꿈을 안고 있었다는 어느 세탁소 부부의 이야기 등 가슴 먹먹해지는 사연을 들려줬다.
애정 어린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는 학생들을 자랑스러워하며, 그들로 인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자문하는 시간이 많다고 했다. 그가 학생 한 명, 한 명의 사연에 귀 기울일 수 있고, 온 마음을 다해 학생들을 보듬는 한편, 이들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은 그만큼 김 교수의 품이 온전히 넓다는 의미가 아닐까.
학생들에 대한 이같은 관심은 개개인에 맞춘 교육 뿐만 아니라 융복합 교육과정을 개설해 운영하는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전남 해남 출신인 김 교수는 어린 시절부터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 대표로 독창 대회에 나가 동요 ‘나비노래’를 부른 것을 시작으로, 학교 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교내 합창단을 고(故) 정춘길 선생님이 지도해 주셨는데, 그 분을 보며 마음 속으로 ‘나도 음악 선생님이 돼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합창단을 이끄는 것과 함께 아이들의 실력을 키우는 모습이 대단해 보였던 모양이다.
그 뒤 피아노 등 여러 악기와 무용을 배우면서 다양한 장르의 예체능을 꾸준히 경험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늘 스스로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은 음악이라는 걸 잊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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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중학생 때 플루트를 전공한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플루트에 관심을 갖게 됐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본격적으로 플루트 레슨을 받았다.
"초등학교 때 음악을 좋아할 수 있게 해주신 고 정춘길 선생님은 물론, 첫 플루트 레슨을 받았던 배혜경 선생님 등 좋은 스승님들을 만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분들은 제게 음악적 싹을 틔워준, 고마운 분들이에요. 늘 고마움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목포대 음악학과에서 플루트를 전공한 김 교수는 목포시립교향악단과 실내악 연주자로 다양한 공연 활동을 했다. 또 제자들을 양성해 오케스트라 단원과 음악 교사, 방과후 강사, 대학 강사 등으로 활동하게 했다.
그러다 그는 전문성을 기르기 위해 대학원 진학을 선택한다. 경희대 음악대학원을 다니면서 목포와 서울을 오갔다. 그는 2000년에 목포에서 첫 플루트 독주회를 펼쳤는데, 당시 열린 연주회가 목포에서 처음으로 진행된 플루트 독주회였다고 한다. 플루트 음악 불모지였던 목포에서 대중화의 물꼬를 튼 셈이다.
이어 2002년에는 목포 플루트 앙상블을 창단해 다수의 공연을 연 가운데 ‘희귀·난치병 어린이를 위한 음악회’라는 부제를 내건 정기연주회를 열어 지역사회에 귀감이 되기도 했다. 감동후불제를 실시해 발생한 수익금은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어린이들을 돕는 데 썼기 때문이다. 이같은 활동으로 목포 지역의 플루트 저변확대에 많은 기여를 했다.
"제자들을 무대에 세워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 목포 플루트 앙상블을 창단하게 됐어요. 기획부터 홍보, 진행 등을 도맡았고, 우연한 계기로 나눔을 시작했다가 취지가 좋아 지역 아이들을 후원했죠. 플루트를 통해 앙상블 연주회를 진행하는 한편, 의미있는 음악회도 하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그의 난치병 어린이돕기 음악회 활동이야말로 나누는 기쁨을 실천한 데다 음악으로 따뜻한 기운을 지역사회에 전파한 것이어서 의미있게 다가왔다. 음악인으로 자리매김해 안정적인 삶을 살던 그는 그동안 준비해왔던 2006년 이태리 유학길에 오른다. 항상 마음 속에 지니고 있었던 오랜 꿈을 행동으로 옮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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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태리로 떠나며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갔다. 서양 악기를 다루는 음악인으로 서양 음악의 본 고장인 이태리의 문화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 시기가 "삶의 터닝포인트가 됐다"는 그는 "마음 속 염원을 위해, 후회없는 삶을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소회했다.
이태리에서 그는 A.M.I아카데미아 전문연주자 과정을 거쳐 7년 과정인 피에트로 마스카니 국립음악원(P. Mascagni)에서 디플로마를 취득하는 쾌거를 이뤘다.
로마 오페라극장과 밀라노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의 수석 연주를 역임, 국립음악원 정교수인 플루티스트 안토니오 아멘두니(Antonio Amenduni)가 그의 스승이다. 한국인으로는 그의 첫 제자라는 김 교수는 돈독한 사제지간을 유지, 그를 목포로 초청해 제5회 정기연주회로 열린 ‘희 귀·난치병 어린이를 위한 음악회’를 함께 장식하기도 했다.
"제5회 정기연주회에는 200여 명의 연주자들이 한 무대에 올랐습니다. 교수님이 흔쾌히 참여해주셨고, 목포를 방문해 연주를 들려주셨던 것이 기억에 남아요. 제 스승인 교수님과 제자인 단원들, 단원들의 제자 등 사제지간이 한 데 모여 무대에 올라 선사한 그 울림은 잊지 못할 거예요."
이어 기억나는 무대로 2012년 전남도립국악단과의 협연 무대를 꼽았다. 북한 작곡가가 만든 곡을 한국에서 김 교수가 연주한데다, 원래 단소곡이던 원곡을 플루트곡으로 편곡해 국악단 반주에 맞춰 무대에 올려져 음악으로 남과 북의 화합, 동·서양의 만남을 이뤄내 의미가 남달랐다는 것이다.
그의 이같은 활동은 스스로를 인정하는 데에서 비롯됐다. 자신을 돌아본다는 그는 "‘자아성찰’이 이 모든 일을 해낼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의 바람을 드러내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교육자이기에 지금처럼 후학에 힘써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힘든 산을 넘어야 할 때 혼자 넘는 것 보다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넘으면 쉽죠. 저는 그때 제자들에게 그 손이 돼 주고자 해요. 좋아하는 음악을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계속하고 싶습니다."
전라도인 admin@jldi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