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해정 극단 토박이 대표

(2020년 5월 제84호=임해정 극단 토박이 대표)남들과 똑같이 평범한 일상을 누림에도 불구하고 내 몸은 월력에 따라 달리 반응했다. 어떤 달에는 세월호의 참혹한 슬픔을 기억해 울고, 또 어떤 달에는 신기루 같은 ‘절대공동체’의 총소리와 같은 저항에 불끈 힘이 돋고, 또 이번 달에는 33년 전, 그러니까 1987년 6월 내내 이 거리에서 온 몸에 최루탄을 뒤집어쓰며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던 함성의 몸짓을 몸이 저절로 기억해 냈다.
기억은, 지난 33년간 책장을 넘기거나 키보드를 두드리는 데 최적화되어 버린 줄로만 알았던 내 팔뚝으로부터 돌아왔다. 언제 불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민중가요를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르는 입술로부터 돌아왔고, 광장 분수대 위에서 타오르는 횃불의 매캐한 연기 냄새를 반기는 코로부터 돌아왔다. 신체가 정치적으로 재구성되는 듯한 느낌, 그것은 매우 감격적인 감각이었다.
1987년 6월 하순의 어느 날인가 싶다. 금남로 광주은행 사거리에서 수십만의 시민들과 함께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해 본 사람은, 그 순간의 기이한 감각을 절대 잊을 수 없는 법이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당장 죽어도 좋을 것 같은 충만감, 그저 분노라고만 부르기에는 이상할 만치 정당한 관용, 격하게 뛰는 심장에도 불구하고 마치 역사처럼 지치지 않던 다리,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이 내뿜는 체온의 합이 만들어내던 무방비의 연대감, 그런 것들은 몸에 각인되어 영원한 획득형질이 된다.
비유로서가 아니라 생물학적으로도 1987년 6월의 경험은 우리 세대에 대해, 그 신체에 대해 ‘구성적’이었다. 그 획득형질이, 내 몸속에서 다시금 새록새록 깨어나고는 했다.
생물학적으로 말해 획득형질은 유전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내 몸에서 빚어진 일을 보건대, 역사적 진실은 그 반대였던 모양이다. 농간 당한 무능한 정부의 대통령을 끌어내리던 촛불광장을 돌이켜보면 무대에 올라 자유 발언을 하는 시민들 중 절대다수가 청소년들이었다.
수능 끝난 고교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다섯 살 된 동생 손을 잡고 무대에 올라 엄마가 첨삭만 해준 문장들을 또박또박 읽고 내려오는 초등학생도 있었다. 고귀했는데, 말하자면 획득형질이 유전되거나 교육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시 한 번 회고해 보자니, 4·19에서 5·18로, 다시 6·10으로 이어지는 저항을 새긴 몸의 기억이 없었다면, 어제의, 오늘의, 내일의 수많은 촛불들이 광장에 또 있었을 리 없다. 이겨 본 적 있는 자들이 대체로 승리를 확신한다. 몸에 새겨진 저항과 승리의 기억은 민주주의의 무기다. 또다시 6월이 왔다!

전라도인 admin@jld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