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다운' 정치 펼치기 위해 노력"

[커버스토리] 송갑석 국회의원
2011년 '광주학교' 개교 입소문 인기…시민운동 축적
학생운동권 출신 세번 낙선 끝 2018년 이어 재선 고지
"위기가 오면 두렵지만,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밝혀

전라도인 admin@jldin.co.kr
2020년 06월 04일(목) 02:35
(2020년 6월 제85호=이성오 기자)“(상략)…송갑석 의원이 광주학교 교장시절 쓴 ‘무등산 역사길이 내게로 왔다’라는 책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받은 날 새벽 3시까지 다 읽었습니다. 정치인 책 중에 이렇게 저를 감동시킨 책도 근래 없었습니다. 호남의 의로운 선배들의 결기와 애국심에 눈물이 났습니다. 풍부한 인문․역사 지식으로 동서양의 문화를 비교해 ‘개미(보통 음식맛과는 다른 특별한 맛) 있게’ 풀어가는 저자의 솜씨는 임진택 명창의 판소리 한 판을 듣는 기분이었습니다.
임란 의병장 김덕령 장군을 연상하게 하는 호남의 인재로 커 나갈 송 의원의 좋은 책을 도저히 저 혼자만 읽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 100권정도 사려 했더니 송 의원이 보내주었습니다. 공유하고자 선물로 보냅니다. 작가 송갑석과 추천인 송영길의 정성을 봐서라도 한번 꼭 읽어보시면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무등산을 둘러싼 호남의 의로운 기운이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구나. 구한말 의병운동, 광주학생의거, 광주민주화항쟁이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구나. 책을 읽고 나면 왜 이순신 장군께서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고 말씀하셨는지 공감이 갈 겁니다.…(하략)”

민주당 중진 송영길 의원이 지인들에게 송갑석 의원(광주 서구갑)의 책을 보내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이다.
책을 읽어보니 바로 알 수 있었다. 첫 페이지를 열자마자 시나브로 손에서 책을 내려놓기가 어려워졌다. 막힘이 없는 문체에 공력이 가득 담겨 있었다. 송갑석 의원에게 혹시 누가 도와주었느냐고 물었더니 손사래를 친다. 굉장한 이야기꾼이다.
송 의원은 지난 2011년 ‘광주학교’의 문을 열었다. ‘광주는 세상에서 가장 큰 학교’라는 뜻이다. 무등산 옛길 제3구간 중 후반부 길(충장사~원효계곡~금곡동~충효분교~충효동~환벽당~취가정) 트레킹에 역사문화 스토리텔링을 입혀서 만든 ‘답사프로그램’이다.
그는 평소 혼자서 5㎞ 이상을 걷는 것을 즐긴다. 이 길도 그러다가 우연히 알게 됐다. 아기자기하고 평탄한 6㎞ 코스에 역사와 문화가 서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광주학교 프로그램을 구상했다.
프로그램 출시를 위해 그는 호남 의병들과 조선 중기 사림 선비들 , 분청사기, 무등산수박, 충효분교 등에 대해 자료를 모으고 공부하며 코스를 하나하나 완성해 갔다.
그 후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한 번 다녀간 이들로부터 입소문을 타면서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얼마 후엔 외국인들이 참여하는 ‘광주역사투어’라는 1박2일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무등산 역사길에 광주비엔날레, 양림동 투어가 결합했다. 지금까지 광주학교는 250회 정도 운영됐고, 7000~8000명이 다녀갔다.

“광주다운 정치를 하고 싶습니다.”
송 의원은 지난 4월 제21대 총선에서 두 번째 금배지를 달았다.
그는 2000년 제16대 총선에 첫 도전한 이래 지난 2018년 첫 금배지를 달기까지 국회의원 선거에 세 번 떨어졌다. 맨 처음 서른다섯에 출마할 때는 무소속이었다. 이후 두 번의 선거(19대, 20대 총선)에서 각각 무소속과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도전했지만 실패했지만 의지를 꺾지 않았고, 단단한 결실을 맺었다.
그는 4년 전 ‘국민의당’ 일색이었던 광주가 다시 ‘민주당’ 품으로 돌아선 이번 총선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해석했다.
“광주는 ‘광주다운 정치인’이 나오기를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낡은 정치로는 안 된다는 경고이자, 광주정신을 제대로 구현할 이를 찾는 신호탄입니다.”
광주다운 정치? 5․18민주화운동의 광주정신을 체험한 시민이라면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을까. ‘광주학교’와도 연계성이 있어 보인다.

‘어떻게 해서 학생운동을 하게 됐느냐’고 물었더니 “운동권이 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송 의원은 66년 고흥에서 태어나 초․중학교를 다닐 때는 물론이고 광주에서 고교를 다닐 때도 그런 기질이 아니었다.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나 근현대사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손위 형이 대학교에 다니며 학생운동을 했기에 운동에 대한 환상도, 편견도 없었다.
대학교에 입학해서도 시위 참여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운동하는 형의 동생이라고 알려져 운동권의 우선 포섭 대상이었다. 선배들에게 술 얻어먹는 재미에 맛을 들일쯤 학습이 시작됐는데 근현대사, 철학 공부 등에 흥미가 생겼다. 고교수업의 연장이나 별반 다를 게 없는 학과나 교양 공부에 물렸던 그는 자유롭게 토론하며 지식을 찾아가는 학습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에 그의 인생을 통째로 바꿀 사건이 발생한다.
그 당시 대학교 1, 2학년 학생들은 교련수업을 받아야 했다. 교련수업의 하이라이트는 전방입소교육이다. 1학년 때는 주변 군부대에서, 2학년 때는 최전방 군부대에서 집체훈련을 받아야 학점을 취득하고 군복무기간 단축 혜택을 받았다.
그런데 1986년 4월 전국의 대학에서 전방입소교육 거부 투쟁이 벌어졌다. 일부 학생은 분신했고, 부산에서는 대학 연합 시위가 전개되기도 했다.
이듬해 4월 전남대학교 2학년생에 대한 전방입소교육이 시작됐다. 훈련지는 경기도 ○사단이었다. 일반 승객은 한 명도 없었고 경영․사법․자연대 3개 단과대학 학생들만 탄 특별열차였다.
시위는 열차가 학생들의 점심 식사 등을 위해 정차할 때 벌이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 그는 유인물을 배포하는 일을 맡았다.
수원역에 열차가 멈췄고 도시락이 전달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시위를 주도하기로 약속한 학생이 좀처럼 나서지 않았다. 그는 주위를 살펴보며 ‘나라도 나설까’ 하고 한동안 망설였다. 식은땀이 흘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남북교류협력위원회 발대식에 참가한 송 의원

결국 그가 나섰다. 전방입소교육 부당성을 알리며 학생들에게 구호를 외치면서 열차 밖으로 나올 것을 권유했지만 열차 출발이 임박해 성공하지 못했다. 뒤늦게 나섰고 준비한 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도 있었다.
풀이 꺾였고, 얼마 후 열차는 마지막 역에 도착했다. 역에서 30분 정도를 걸어 ○사단 연병장에 집결했다. 사단장 훈시를 듣고 나니 소대, 분대별로 분류돼 각각 내무반으로 배치되는 시점이 됐다.
이때 연병장에서 한바탕 전방입소교육 거부 투쟁을 벌이기로 사전 약속이 돼 있었다. 군에서 이를 저지하면 우리는 △이름을 부를 때 번호나 이름으로 부르지 말고, ‘누구 학생’ 이라고 부를 것 △반말하지 말고 경칭을 사용할 것 △매일 학생들에게 토론할 시간을 줄 것 등을 요구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또 약속이 어긋났다. 예정된 시위 주도자가 나서지 않은 것이다. 속절없이 시간이 흘렀고,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는데 속이 타기 시작했다. ‘수원역에서 내가 대신해 시도한 적이 있으니까 또 나설까, 아니 이대로 말아야 하나’ 갈등이 시작됐다.
한참을 망설이다 그는 돌연 일어서서 앞으로 나갔다. 학생들 이름을 부르는 장교의 마이크를 뺏었다. 한바탕 연설을 하니 학생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요구사항을 제시하자 군은 말도 안 된다며 나가려만 나가라고 했다.
3개 단과대학 각 과별로 토론이 시작됐고, 우리는 마침내 퇴소를 결정했다.
지금 퇴소하면 3개월 군복무 단축 효과가 사라지는 상황인데도 퇴소를 감행한 것이다. 다만 전체의 20% 정도는 퇴소 결정에 따르지 않았다. 주로 사범대와 자연대 의예과 학생들이었다.
어깨가 무거워 졌다. 엄청난 일을 하고 있다는 무게감이 그를 짓눌렀다. 모두들 인근 초등학교로 가서 짐을 풀었다. 돈을 걷어 먹을 것을 사왔다. 한편으로 학교에 연락해 귀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학교 측은 일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회유작전을 펼쳤다. 한밤에는 퇴소 결의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초교에 집결한 학생들 가운데 60%가 퇴소결정을 번복하자며 하나 둘 목소리를 내는 상황이었다.
새벽이 밝았다. 이제 그가 최종 결정을 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
사단장을 만나러 갔다. 사단장에게 최소한의 요구 조건을 제시하고 이것을 받아들이면 입소하겠다고 했다. 사단장은 요구 조건을 받아들였다. 초교로 돌아와 이런 내용을 발표했더니 퇴소를 고집하던 나머지 40% 학생들도 반발하지 않았다. 동이 텄다. 광주에서 온 스쿨버스가 도착했고, 그걸 타고 모두 부대로 들어갔다.
그는 홀로 퇴소했다. 스쿨버스 7대가 올라왔는데 혼자 버스를 타고 광주로 내려갔다. 한탄강을 지나는데 분하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고, 홀가분하기도 한 복잡한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한동안 오열했다.
이후 그는 가도 오도 못하는 운동권이 됐다. 총학생회장이 됐고,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이 됐다.
그리고 90년 10월부터 95년 12월까지 수감돼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지내던 91년 동부 유럽이 무너지고 사회주의 이념이 흔들리는 세상이 왔다. 당시 학생운동에는 확실히 사회주의적 경향이 있었다. 물론 개인적인 농담의 차는 있었다. 그는 스스로의 가치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남은 형기는 ‘전대협 의장답게 사람다운 모습으로 감옥생활을 하자. 다만 생각에 있어서는 이념적인 기존 사고를 고집하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하니 책을 많이 읽게 됐다. 편향된 것을 제외하고는 문학이든 역사든 경제든 좌우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택해 원 없이 읽었다. 평생 자산이 됐다.

“이번 국회에서는 8명의 광주 의원들이 원팀이 돼 ‘광주다운’ 정치를 펼치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쉽지 않을 텐데요’라고 하자 송 의원은 “국회 등원 직후 지역 현안인 5․18관련 법안들을 전남 의원들까지 18명이 함께 ‘1호 법안’으로 제출하기로 했다”고 답한다.
이 중 4개 법안은 그가 20대에 냈던 법안이다. 송 의원은 “우선권은 제게 있지만 그런 걸 주장하면 팀플레이가 깨진다”며 “팀을 이끌어가는 리더십을 보여야 한다. 리더십의 요체는 나부터 비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21대 국회가 해결할 광주 현안으로는 △5․18관련법 강화와 5․18진상규명 △미래산업 기반 구축 △명실상부한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을 강조했다.
송 의원은 존경하는 인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꼽는다. 그는 90년 3당합당 직후 서울 서교호텔에서 만났던 DJ를 기억하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정치를 하면 할수록 더 커지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로는 △시대를 앞서간 통찰력과 신념 △평생을 ‘색깔론’에 시달렸음에도 비전향장기수의 인권을 보살핀 점 △노태우 대통령이 스스로 공약한 중간평가로 부담스러워 할 때 지방자치제 실시와 장기수 석방으로 타협한 일 등을 들었다.

“위기가 오면 언제나 두렵고 망설이게 되지만, 결국 내가 나서야 한다면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그는 어려운 일이 닥치면 전방입소교육 거부 투쟁을 벌이던 그때의 일이 떠오른다고 했다.
“산악인들은 매번 산이 두렵지만, 산을 오릅니다. 경험이 있다고 안 두렵겠습니까, 안 망설여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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