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를 꼭 와야만 볼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아트인] 광주미협 회장 된 조각가 박광구 전라도인 admin@jldin.co.kr |
2022년 03월 06일(일) 17: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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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호 제106호=고선주 기자) 3월부터 가장 분주해지는 시간을 보내야 하는 작가가 있다. 이달부터 광주미술협회 제12대 회장으로서의 임기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 분주함에 앞서 그의 일상과 작가로서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 전남 담양 고서 소재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작업실을 방문한 날도 이미 인수인계를 받는 시점이라 매우 분주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그와 관련한 전화가 연이어 걸려왔다. 실제 그는 ‘다음달에 인터뷰를 하면 안되냐’고 물어왔을 정도였다. 다행히 오전 일정이 비어있어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광주 토박이이자 지역을 연고로 꾸준하게 작품을 펼쳐온 조각가 박광구씨의 이야기다.
그는 원래 교육자였다. 광주 석산고에서 34년을 재직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창작활동을 병행해온 것이다. 그 역시 다른 작가들처럼 일찍 미술에 눈을 뜬 셈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각종 미술 실기대회에서 다수 수상을 하면서 그의 삶은 서서히 미술로 기울었다. 고등학교 은사였던 김재형 선생(호남대 교수)으로부터 화가의 길을 추천 받으면서 미술부에 들어가 활동을 하게 됐고, 1979년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처음에는 서양화를 전공했다. 대학 3학년 때까지 서양화를 하다가 당시 조소과 교수였던 고정수·정윤태 등 이 두분으로부터 6개월 간 권유받으면서 대학 4학년 때부터 조각에 본격 뛰어들었다. 남들보다 늦은 전과일 수 있으나 그의 재능을 알아본 두 교수의 강력한 권유를 믿고, 조각가로의 길에 뛰어든 것이다. 그는 유년시절 나무 생선상자를 주워 썰매를 만들거나 중학교 기술시간에 목재를 이용해 책꽂이를 제작했다. 또 함석을 이용해 쓰레받기를 만들었다. 한번은 쓰레받기를 만들었는데 전교에서 최고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특출한 소질을 발휘했다. 이런 것들이 그의 조각 자양분이 돼 전공을 쉽게 바꾸기 어려운 흐름이 있었는데, 이를 극복하고 조각가로서 새로운 길을 택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1983년에 대학을 졸업했지만 그의 프로 작가로서의 활동은 1990년대로 꼽힌다. 그는 첫 개인전을 1992년 광주 인재미술관과 서울 후인갤러리에서 각각 진행했다. 굳이 그의 작품세계를 세 시기로 쪼개자면 제1기에 속하는 때다. 첫 개인전이 그의 초창기 조각세계를 대표하는 전시로 이해된다. 이때 그는 노인들의 삶에 주목했다고 들려줬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광주공원에 갈 일이 있었는데 그때 공원에서 접한 노인들에 그의 시선이 꽂혔다. 노인들이 할 일이 없이 장기나 바둑을 두는가 하면, 쪼그려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작품에 투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노인들을 보면서 저분들이 너무 많이 고생한 세대들인데 사회로부터 대접을 받지 못한 채 공원에서 소일거리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고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이 노인들의 삶에 대한 형상화는 2000년 직전까지 이뤄졌다.
꾸준하게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창작활동을 병행하다 보니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2000년에 접어들어 작품 변화를 시도한다. 계속해서 노인들의 삶에만 매달릴 수 없겠다는 판단에서다. 똑같은 주제로만은 안되겠다는 확신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는 이때부터 10년 동안 자연과 인간들의 삶 그리고 동심을 상징하는 어린이를 풍경과 함께 형상화하는데 천착했다. 화랑미술제는 한 때 권위있는 미술제로 통용됐다. 우후죽순 미술제가 생겨나기 직전이어서다. 이때 한국을 빛낼 미술작가 10명에 선정돼 동력을 얻었을 뿐 아니라 제1기 때의 활동이 중견 조각가로서의 자기 위치를 확보하는데 큰 도움이 됐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또 다시 그는 작업에 대한 열망을 의욕적으로 분출하던 시기로 해석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인물 조각이면 인물조각인데, 그는 이 인물조각에 풍경을 더했다. 인물과 풍경이 만나는 조각의 패턴은 박 조각가가 처음 시도하다시피해 조각계로부터 관심을 받았다. 인체를 다루는 사람들은 인물만 다뤄서다.
그는 이같은 작업패턴을 2011년부터 집중해 2022년까지 끌어오고 있다. 이게 제3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제3기에 대해 제1, 2기 했던 작업을 되돌아보는 시기로도 규정했다.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 것이라는 설명을 잊지 않았다.
이런 그는 교직을 결코 핑계삼지 않았다. 교육을 구실삼아 게을리하고 나태하게 작업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보였다. 교육과 창작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최선을 다했다.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에는 아침 출근을 세 손가락에 들 정도로 빨리해 작업시간을 확보했다. 작업을 진행한 뒤 다시 아이들의 지도자로 돌아온 것이다.
"교직에 있으니까 작품을 오히려 더 여유롭게 했다고 봅니다. 규칙적으로 출근하는 등 생활을 해야 했어요. 재직할 때 학교에 작업장이 있어 짬짬이 작업을 했죠. 하루에 두세시간 작업을 했는데 그게 쌓이면 엄청난 시간이 되잖아요. 그러다 최대 99.2㎡(30평)까지 작업장을 썼는데 아이들의 급식소를 지으면서 결국 학교 밖에서 작업을 해야 했어요. 담양 창평 광덕리 소재 폐교된 창평북초등학교에서 2년 가까이 작업을 했습니다. 거기서 2년 정도 체류하며 열심히 작업했죠. 퇴근하면 그곳에 다시 출근해 방학 때까지 머물며 작업을 했었죠."
창평북초등학교가 공매돼 팔리면서 그는 그곳을 나와야 했다. 그래서 새로운 작업실을 물색하다 현재의 자리에 작업실을 만들었다. 처갓집인데 장인어르신에게 양해를 구한 뒤 새롭게 건물을 지어 작업실 문제를 해결했다. 보통 예술가들에게 큰 고민은 창작공간인데, 창작공간이 이렇게 해결되자 작품 활동이 안정화됐다는 귀띔이다.
여기다 조각 작품은 판매처가 없는데 재료비가 만만치 않아 제작비를 절감하기 위해 부조에 채색을 하는 쪽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몰입해 왔다.
다시 그에게 교직 전반에 대해 물었다. 문화적 역량을 키우는 데 중점을 뒀고, 다소 자유로운 시간의 부족은 아쉬움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사실 미술 과목은 전문인을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을 통해 정서적인 것이 중요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실기평가도 중요하겠지만 감상을 통해 세계적인 미술의 흐름을 파악하고 문화적인 역량을 키우는 데 중점을 뒀던 것 같아요. 특히 전업작가보다는 안정적인 경제활동이 이뤄지다보니, 하고 싶은 작업을 마음껏 할 수 있어 좋았고, 규칙적인 일과를 꾸려 많은 작품을 할 수 있었지 않았나 싶어요. 반면에 교직에 묶여 있어 전국적인 전시나 작품활동을 전개하는데는 다소 어려웠죠."
그동안 흙을 많이 다뤄온 작가는 테라코타 작업을 선호하는 가운데 흙으로 표현해 청동으로 제작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펼쳐왔다
이런 그에게 ‘앞으로 해보고 싶은 작업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광주를 꼭 와야만 볼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노르웨이 오슬로에 조성된 아돌프 구스타브 비겔란 (1869~1943) 조각가가 1년에 걸쳐 200여 점의 조각으로 자연과 잘 어울리게 인간의 희로애락을 표현한 작품이 있는데 오늘날 엄청나게 관광에 기여하는 작품이 됐죠. 저도 이런 작품을 해보는 게 바람입니다."
그는 원래 교육자였다. 광주 석산고에서 34년을 재직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창작활동을 병행해온 것이다. 그 역시 다른 작가들처럼 일찍 미술에 눈을 뜬 셈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각종 미술 실기대회에서 다수 수상을 하면서 그의 삶은 서서히 미술로 기울었다. 고등학교 은사였던 김재형 선생(호남대 교수)으로부터 화가의 길을 추천 받으면서 미술부에 들어가 활동을 하게 됐고, 1979년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처음에는 서양화를 전공했다. 대학 3학년 때까지 서양화를 하다가 당시 조소과 교수였던 고정수·정윤태 등 이 두분으로부터 6개월 간 권유받으면서 대학 4학년 때부터 조각에 본격 뛰어들었다. 남들보다 늦은 전과일 수 있으나 그의 재능을 알아본 두 교수의 강력한 권유를 믿고, 조각가로의 길에 뛰어든 것이다. 그는 유년시절 나무 생선상자를 주워 썰매를 만들거나 중학교 기술시간에 목재를 이용해 책꽂이를 제작했다. 또 함석을 이용해 쓰레받기를 만들었다. 한번은 쓰레받기를 만들었는데 전교에서 최고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특출한 소질을 발휘했다. 이런 것들이 그의 조각 자양분이 돼 전공을 쉽게 바꾸기 어려운 흐름이 있었는데, 이를 극복하고 조각가로서 새로운 길을 택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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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에 대학을 졸업했지만 그의 프로 작가로서의 활동은 1990년대로 꼽힌다. 그는 첫 개인전을 1992년 광주 인재미술관과 서울 후인갤러리에서 각각 진행했다. 굳이 그의 작품세계를 세 시기로 쪼개자면 제1기에 속하는 때다. 첫 개인전이 그의 초창기 조각세계를 대표하는 전시로 이해된다. 이때 그는 노인들의 삶에 주목했다고 들려줬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광주공원에 갈 일이 있었는데 그때 공원에서 접한 노인들에 그의 시선이 꽂혔다. 노인들이 할 일이 없이 장기나 바둑을 두는가 하면, 쪼그려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작품에 투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노인들을 보면서 저분들이 너무 많이 고생한 세대들인데 사회로부터 대접을 받지 못한 채 공원에서 소일거리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고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이 노인들의 삶에 대한 형상화는 2000년 직전까지 이뤄졌다.
꾸준하게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창작활동을 병행하다 보니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2000년에 접어들어 작품 변화를 시도한다. 계속해서 노인들의 삶에만 매달릴 수 없겠다는 판단에서다. 똑같은 주제로만은 안되겠다는 확신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는 이때부터 10년 동안 자연과 인간들의 삶 그리고 동심을 상징하는 어린이를 풍경과 함께 형상화하는데 천착했다. 화랑미술제는 한 때 권위있는 미술제로 통용됐다. 우후죽순 미술제가 생겨나기 직전이어서다. 이때 한국을 빛낼 미술작가 10명에 선정돼 동력을 얻었을 뿐 아니라 제1기 때의 활동이 중견 조각가로서의 자기 위치를 확보하는데 큰 도움이 됐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또 다시 그는 작업에 대한 열망을 의욕적으로 분출하던 시기로 해석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인물 조각이면 인물조각인데, 그는 이 인물조각에 풍경을 더했다. 인물과 풍경이 만나는 조각의 패턴은 박 조각가가 처음 시도하다시피해 조각계로부터 관심을 받았다. 인체를 다루는 사람들은 인물만 다뤄서다.
그는 이같은 작업패턴을 2011년부터 집중해 2022년까지 끌어오고 있다. 이게 제3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제3기에 대해 제1, 2기 했던 작업을 되돌아보는 시기로도 규정했다.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 것이라는 설명을 잊지 않았다.
이런 그는 교직을 결코 핑계삼지 않았다. 교육을 구실삼아 게을리하고 나태하게 작업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보였다. 교육과 창작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최선을 다했다.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에는 아침 출근을 세 손가락에 들 정도로 빨리해 작업시간을 확보했다. 작업을 진행한 뒤 다시 아이들의 지도자로 돌아온 것이다.
"교직에 있으니까 작품을 오히려 더 여유롭게 했다고 봅니다. 규칙적으로 출근하는 등 생활을 해야 했어요. 재직할 때 학교에 작업장이 있어 짬짬이 작업을 했죠. 하루에 두세시간 작업을 했는데 그게 쌓이면 엄청난 시간이 되잖아요. 그러다 최대 99.2㎡(30평)까지 작업장을 썼는데 아이들의 급식소를 지으면서 결국 학교 밖에서 작업을 해야 했어요. 담양 창평 광덕리 소재 폐교된 창평북초등학교에서 2년 가까이 작업을 했습니다. 거기서 2년 정도 체류하며 열심히 작업했죠. 퇴근하면 그곳에 다시 출근해 방학 때까지 머물며 작업을 했었죠."
창평북초등학교가 공매돼 팔리면서 그는 그곳을 나와야 했다. 그래서 새로운 작업실을 물색하다 현재의 자리에 작업실을 만들었다. 처갓집인데 장인어르신에게 양해를 구한 뒤 새롭게 건물을 지어 작업실 문제를 해결했다. 보통 예술가들에게 큰 고민은 창작공간인데, 창작공간이 이렇게 해결되자 작품 활동이 안정화됐다는 귀띔이다.
여기다 조각 작품은 판매처가 없는데 재료비가 만만치 않아 제작비를 절감하기 위해 부조에 채색을 하는 쪽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몰입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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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에게 교직 전반에 대해 물었다. 문화적 역량을 키우는 데 중점을 뒀고, 다소 자유로운 시간의 부족은 아쉬움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사실 미술 과목은 전문인을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을 통해 정서적인 것이 중요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실기평가도 중요하겠지만 감상을 통해 세계적인 미술의 흐름을 파악하고 문화적인 역량을 키우는 데 중점을 뒀던 것 같아요. 특히 전업작가보다는 안정적인 경제활동이 이뤄지다보니, 하고 싶은 작업을 마음껏 할 수 있어 좋았고, 규칙적인 일과를 꾸려 많은 작품을 할 수 있었지 않았나 싶어요. 반면에 교직에 묶여 있어 전국적인 전시나 작품활동을 전개하는데는 다소 어려웠죠."
그동안 흙을 많이 다뤄온 작가는 테라코타 작업을 선호하는 가운데 흙으로 표현해 청동으로 제작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펼쳐왔다
이런 그에게 ‘앞으로 해보고 싶은 작업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광주를 꼭 와야만 볼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노르웨이 오슬로에 조성된 아돌프 구스타브 비겔란 (1869~1943) 조각가가 1년에 걸쳐 200여 점의 조각으로 자연과 잘 어울리게 인간의 희로애락을 표현한 작품이 있는데 오늘날 엄청나게 관광에 기여하는 작품이 됐죠. 저도 이런 작품을 해보는 게 바람입니다."
전라도인 admin@jld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