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흥선대원군 쇄국사상 홍보

[문화재 다시보기]함평 척화비
고종 개방정책으로 대부분 철거 불구
척화비로는 전남의 유일한 근대유물

전라도인 admin@jldin.co.kr
2023년 08월 15일(화) 16:13
(2023 7월 122호=글 여균수 기자)함평 척화비(전남도 문화재 자료)는 함평읍 함평공원 한 켠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 척화비는 원래 함평읍 석성리 구주포 부근에 세워졌다고 한다. 1977년 함평공원을 정화하면서 군청 뒤뜰에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함평 척화비 바로 옆에는 역대 함평현감과 전라도관찰사 등의 공적비 19가 함께 서 있다.
척화비는 흥선대원군이 외적을 배척하고 쇄국을 해야 한다는 정신을 국민에게 심어주기 위해 1871년 전국 각의 중요 지역에 세운 비석이다.
19세기 들어 서양인들의 천주교 전파와 개방 압력이 이어졌고 서양 선박의 출몰도 빈번해졌다. 이양선의 출몰은 중국의 아편전쟁 소식과 맞물려 조선 정부의 위기의식을 심화시켰다.
개방이 곧 망국이라고 여긴 조선은 서양 세력의 수교 요청을 완강히 거부했고, 조선의 천주교인과 함께 서양 선교사를 죽이기까지 했다. 이는 서양세력의 반발을 불러왔고 병인양요(프랑스 선교사 12명 처형 원인)와 오페르트 도굴사건, 신미양요(제너걸셔먼호 방화 원인)를 겪으면서 당시 조선의 최고 실권자였던 대원군은 타국과의 교류를 완전히 끊는 쇄국을 결심하게 된다.
쇄국 여론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조치가 바로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는 것이었다.
척화비는 배가 드나들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주로 세워졌으며, 전국에 수백 개가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는 윗 부분이 둥근 호패형으로 돼 있으며 크기는 높이 135㎝, 너비 52㎝, 두께 20㎝이고 자경은 큰 글자가 8〜10㎝, 작은 글자가 4〜5㎝이다.

비석의 전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새겼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이 뜻은 ‘서양 오랑캐가 침입할 때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면 매국하는 것이 된다. 우리 만대의 자손에게 경계한다. 병인년(1866)에 짓고 신미년(1871)에 세우다’이다.
임오군란 후 반란군의 배후로 지목된 흥선대원군이 중국으로 끌려가면서 외국과 개방정치를 원하던 고종이 실권을 찾았다.
고종은 적극적으로 서양 각국과 새로운 국제관계를 수립하고자 했고, 이로써 서양에 대한 배척을 상징하는 척화비가 설 자리는 없어졌다.
임오군란이 진압된 직후 고종은 교서를 내려 전국에 있는 척화비를 뽑아버릴 것을 명령했고, 고종의 조치를 기점으로 전국의 척화비 대부분이 철거됐다.
함평 척화비는 전국에 남은 33개(박물관 보관 13개 포함) 척화비 중 하나다.
함평 척화비문은 세월에 많이 닳아져 잘 보이지 않는다. 이곳 척화비는 현재 전국에 남아 있는 척화비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이라고 하며, 척화비로는 전남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개화기의 역사 유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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