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에 주자학 전파한 강항 배향 [문화재 다시보기]영광 내산서원 전라도인 admin@jldin.co.kr |
| 2023년 09월 25일(월) 1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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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8월 123호=글 여균수 기자)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의 유학자 수은 강항을 배향하는 내산서원(전남도 기념물)은 영광군 불갑면 소재지에서 불갑사 가는 길가에 위치해 있다.
강항 사후 18년째 되던 1635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태생지이자 선영이 있던 불갑면 금계리 서봉마을에 용계사란 이름으로 건립됐다.
1702년에 대대적인 중수를 했던 용계사는 1868년에 다른 서원들과 마찬가지로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철폐돼 그 터만 유지해 오다가 1974년 후손과 유림들의 발의로 현 불갑면 쌍운리에 복원하고 내산서원이라 개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항은 1567년 강희맹의 5대손으로 태어나 1588년(선조 21) 진사가 되고 159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교서관박사·전적을 거쳐 1596년 공조·형조 좌랑을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분호조판서 이광정의 종사관으로 남원에서 군량보급에 힘쓰다가 남원이 함락된 뒤 고향 영광으로 돌아가 김상준과 함께 의병을 모집해 싸웠다. 전세가 불리하자 통제사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기 위해 남해로 내려가던 중 왜적에게 잡혀 가족과 함께 포로가 됐다.
일본 오사카로 끌려갔다가 1598년 교토 후시미성에 이송돼 학식 높은 승려들과 교유하며 유학을 가르쳤다.
그 때 만난 승려 중 슈쿠는 강항에게 유학을 배운 뒤 승려를 그만두고 유학자가 되었는데, 그가 바로 일본 주자학의 선구자 후지와라 세이가(1561~1619)이다. 이 때문에 강항은 지금까지 일본에 주자학을 본격적으로 전파한 조선인으로 꼽히고 있다.
강항은 일본에서의 유폐생활 중 일본의 역사, 관제, 지리 등을 알아내어 ‘부중견문록’을 작성, 조선으로 보내기도 했다.
1600년(선조 33) 유배에서 풀려나 가족과 함께 귀국했으나 그의 충절을 알아주는 이가 없자 자신을 죄인으로 자처하면서 귀향해 후학 교육에 전념했다. 인물화와 소나무화 등 그림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내산서원 앞에 조성된 연못과 정자가 한폭의 그림 같다. 쌍운마을 낮은 야산을 배경으로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외삼문과 용계사(사당)를 중심축으로 외삼문, 내산서원, 내삼문, 사당 순으로 배치, 전학후묘의 형식을 따랐다.
강항을 배향한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으로 아담하고 소박하며, 서원은 정면 4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이다.
내산서원 장서각에는 강항 집필했던 ‘강감회요’ 목판과 ‘간양록’, ‘수은집’, ‘운제록’, ‘문선’ 등의 필사본이 보관돼 있다. 이중 ‘강감회요’ 목판은 강항이 중국의 역사서인 ‘자치통감’과 ‘통감강목’ 등을 보완해 정리한 사서로 전남도 유형문화재이다.
1980년 문화방송은 ‘간양록’이란 제목의 일일 드라마를 만들어 강항의 일대기를 세상에 알리기도 했다.
강항 사후 18년째 되던 1635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태생지이자 선영이 있던 불갑면 금계리 서봉마을에 용계사란 이름으로 건립됐다.
1702년에 대대적인 중수를 했던 용계사는 1868년에 다른 서원들과 마찬가지로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철폐돼 그 터만 유지해 오다가 1974년 후손과 유림들의 발의로 현 불갑면 쌍운리에 복원하고 내산서원이라 개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항은 1567년 강희맹의 5대손으로 태어나 1588년(선조 21) 진사가 되고 159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교서관박사·전적을 거쳐 1596년 공조·형조 좌랑을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분호조판서 이광정의 종사관으로 남원에서 군량보급에 힘쓰다가 남원이 함락된 뒤 고향 영광으로 돌아가 김상준과 함께 의병을 모집해 싸웠다. 전세가 불리하자 통제사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기 위해 남해로 내려가던 중 왜적에게 잡혀 가족과 함께 포로가 됐다.
일본 오사카로 끌려갔다가 1598년 교토 후시미성에 이송돼 학식 높은 승려들과 교유하며 유학을 가르쳤다.
그 때 만난 승려 중 슈쿠는 강항에게 유학을 배운 뒤 승려를 그만두고 유학자가 되었는데, 그가 바로 일본 주자학의 선구자 후지와라 세이가(1561~1619)이다. 이 때문에 강항은 지금까지 일본에 주자학을 본격적으로 전파한 조선인으로 꼽히고 있다.
강항은 일본에서의 유폐생활 중 일본의 역사, 관제, 지리 등을 알아내어 ‘부중견문록’을 작성, 조선으로 보내기도 했다.
1600년(선조 33) 유배에서 풀려나 가족과 함께 귀국했으나 그의 충절을 알아주는 이가 없자 자신을 죄인으로 자처하면서 귀향해 후학 교육에 전념했다. 인물화와 소나무화 등 그림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내산서원 앞에 조성된 연못과 정자가 한폭의 그림 같다. 쌍운마을 낮은 야산을 배경으로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외삼문과 용계사(사당)를 중심축으로 외삼문, 내산서원, 내삼문, 사당 순으로 배치, 전학후묘의 형식을 따랐다.
강항을 배향한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으로 아담하고 소박하며, 서원은 정면 4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이다.
내산서원 장서각에는 강항 집필했던 ‘강감회요’ 목판과 ‘간양록’, ‘수은집’, ‘운제록’, ‘문선’ 등의 필사본이 보관돼 있다. 이중 ‘강감회요’ 목판은 강항이 중국의 역사서인 ‘자치통감’과 ‘통감강목’ 등을 보완해 정리한 사서로 전남도 유형문화재이다.
1980년 문화방송은 ‘간양록’이란 제목의 일일 드라마를 만들어 강항의 일대기를 세상에 알리기도 했다.
전라도인 admin@jldi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