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출발점 농민의 삶…지방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커버스토리]신정훈 국회의원
고향 나주서 농민운동…수세 거부운동 벌여 폐지 성과
나주시장 역임…지방자치 참여 ‘지방분권운동’ 앞장
한전공대 첫 제안…“희망 전남 한번 만들어 보겠다”

전라도인 admin@jldin.co.kr
2024년 08월 03일(토) 02:04
(2024년 7월 134호=이성오 기자)
신정훈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 나주·화순)은 지난 4월 총선에서 3선에 성공했다. 제22대 국회 광주전남 지역구 의원들 가운데 유일한 상임위원장(행정안전위원장)이다. 전남도의원, 나주시장,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로서의 이력도 대단하지만 그 이전에 고려대학교에 재학하던 중 참여한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고향에 돌아와 농민들과 함께 벌인 ‘수세 거부운동’, 지방자치에 참여해 앞장선 ‘지방분권운동’ 등도 만만치 않다. 지난달 말 서울 여의도 국회 행정안전위원장실을 찾아가 부단히 달려온 삶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느냐’고 물었다.

“얼마 전 제헌절을 맞았습니다. 대한민국의 법이 처음 세워진 날이죠. ‘법과 제도가 만인에게 평등하다곤 하지만, 여전히 강자에게 치우쳐 있고 약자에게는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힘든 세상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옳다고 믿는 바를 오롯이 실천해 온 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늘 치열하고 고단한 행군이었다. 1985년 5월, 고려대에 다니던 그는 전학련 삼민투 소속 5개 대학교 7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미국 문화원을 기습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학생들은 “미국은 광주학살에 대해 책임지고, 한국 국민 앞에 정중히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5·18 이후 발생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운동권의 과격한 반미투쟁으로 평가된 데 반해 이 사건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신군부 및 독재정권과 미국의 관계를 직격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재판 과정에서도 재판거부, 묵비권 행사, 변호인단 전원 사임 등 소위 ‘재판 투쟁’을 전개해 국내외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1987년 6월 항쟁의 출발점이 됐다.신 의원은 “시대의 특수성이 있겠지만, 수단이 정당화되는 것은 제한적이어야 한다.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려면 무엇보다 절차와 방법의 정당성이 중요하다. 점거 농성 때 우리는 그 원칙을 지키려 했다”고 돌아봤다.
2년 3개월 감옥생활을 한 뒤 1987년 7월 풀려나 고향인 나주 왕곡으로 돌아왔다. 그는 몸을 추스른 뒤 곧바로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감옥에서 아버지 부음을 접하고 농민운동에 투신하겠다고 맘먹은 터였다. 평생을 농민으로 살아온 아버지를 잇겠다는 생각이었다. 수세(水稅) 거부운동을 추켜들었다. 수세는 농지개량조합에 내는 조합비인데, 실상은 농사에 사용하는 물값이어서 농민들은 ‘수세’, ‘물세’라 불렀다. 1917년 일제가 걷기 시작한 수세는 70년 동안 농민들에게 내내 무거운 부담이었다.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이나 다를 바 없었다. 1987년 12월 ‘부당 수세 거부 나주농민결의대회’가 열렸고, 그 결의는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정부는 이듬해 2월 수세를 인하했다. 그렇지만 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그해 11월에 ‘전국수세폐지위원회’가 결성됐고, 1989년 2월 여의도 농민 대투쟁을 통해 300평당 나락 5㎏의 현물로 대체됐다. 그리고 수세는 1997년 완전히 폐지됐다.
“나주에서 발원한 수세 거부운동은 대한민국 농민 운동사의 한 획을 그은 사건입니다. 해방 이후 단일과제에 최대 규모의 농민 대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역사적 운동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구한말 갑오농민전쟁의 도화선이 된 이유도 만석보의 수세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우금치 고개에서 막혔지만, 나주 농민들은 여의도까지 진출하지 않았나요.”
1995년 전남도의회 의원직에 도전했다. 정치에 뛰어든 이유를 묻자 “세상의 구조적인 틀, 즉 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세상은 바뀌지 않으며, 특히 정치의 변화 없이는 나라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정당에 공천 신청은 내지 않고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나를 정치로 이끈 것도 농민운동을 하던 동지였고, 무엇보다 독재에 저항해야 한다는 사명감이었다”고 말했다.도의원에 두 차례 당선돼 활약했고, 이어 2002년 나주시장 선거에 도전했다. 물론 무소속이었고, 2006년 재선에도 성공했다. 응당 민주당 후보가 돼야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는 전라도의 정치환경에서 30대라는 약관의 나이에 무소속으로 올린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그 배경에는 ‘수세싸움’에서 다져진 농민들의 조직과 정서가 함께했다.
“제 정치의 출발점은 우리의 부모님과 할아버님 같은 농민의 삶입니다. 평생 자신의 노동을 바쳐서 이웃과 국민을 먹여 살리는 그런 서민과 농민들로부터 출발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돌려주고 싶은 것이 대단히 많습니다.”
정치의 롤 모델은 누구냐고 물었더니 “정치적으로는 노무현 대통령이라고 볼 수 있고, 청년기에는 안중근 의사일 수도 있다”며 “정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민족과 국가라는 공동체를 위해 헌신했던 분들을 생각했고, 본격적으로 정치를 시작하면서는 ‘정치는 단지 이념적 구호가 아니라 실현과 실천이 가능한 정책이자 그걸 해내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나주시장 재임 시 전국 최초로 ‘친환경 학교급식’을 시작했다. 지난 2003년까지만 해도 전국 모든 학교에서 제공되는 급식은 2~3년 묵은 정부미와 수입농산물로 만들어졌다. 나주시는 시민사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우리 농산물 학교급식 조례’를 준비했으나 행정자치부와 전남도가 WTO 규정 위반이라고 해서 ‘친환경농산물 지원 조례’로 제정했다.전국의 모든 농촌에서 시행되고 있는 ‘100원 택시’는 신 시장이 처음 도입한 나주시의 ‘마을택시’가 원조다. 오지마을에 버스를 요구하는 주민들의 민원을 접하고 택시를 지정해 운행하도록 조례안으로 만든 것이다. 농촌은 갈수록 인구는 주는 데 자가용만 늘어나는 현실을 극복하려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다. 지방분권 실현을 위해 2003년에 ‘자치분권전국연대’를 창립하고 주민참여, 지역자치, 지방분권에 앞장섰다. 특히 2004년 행정수도 이전 위헌 심판 이후 헌법재판소 앞에서 범국민규탄대회를 여는 등 신행정수도 건설과 혁신도시 이행에 박차를 가했다. 지난 2015년 11월 17일 광주전남 공동혁신도시로 나주가 선정됐다.
그는 분권운동의 중요성에 대해 “중앙권력은 코끼리와 같다. 코끼리와 힘겨루기를 하면 무조건 진다. 방법은 무언인가? 코끼리 다리를 송곳으로 찌르듯이 시의적절할 때 가장 신속하게 대응하는 것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지자체의 지혜”라고 말했다.언제나 무소속일 줄 알았던 그는 지난 2014년 나주·화순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도전하면서 새정치민주연합의 옷을 입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는 입당원서 한 장 쓰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내게는 현장에서 땀과 눈물로 함께 손잡고 달려온 농민들의 힘 대신에 정당이라는 조직을 선택하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일주일 잠을 이루지 못해 고민을 털어놓으니 더러 실망하는 분들도 계셨지만 대부분은 “믿는다”며 격려했다. 그렇게 뛰어든 민주당 경선에서 그는 최인기 전 의원을 누르고 후보로 선출됐다.한국에너지공과대학(이하 한전공대)은 그의 제안에서 시작됐다. 더불어민주당 호남특보였던 그는 2017년 1월 문재인 대선후보에게 나주혁신도시 방문을 권했고, 문 후보가 나주에 왔을 때 한전공대의 필요성을 건의했다. 문 후보 캠프와 당시 이낙연 전남도지사는 처음엔 신중한 입장이었다. 그는 지속적으로 필요성을 설득했다.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문 후보였다. 그해 4월 목포대를 방문해 대학생들과의 간담회에서 한전공대 설립의지를 밝힌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그는 대통령비서실 농어업비서관이 돼 공약 이행을 계속 주장했고, 2019년 7월 문 대통령이 나주혁신도시를 방문하면서 ‘임기 내 설립’이 공식화됐다. 그는 21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해 제1과제로 한전공대특별법 입법을 추진했다. 2021년 3월 24일 천신만고 끝에 특별법은 국회를 통과했다. 100여년의 화순탄광 역사를 치유하고 새 미래를 여는 ‘폐광지역 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도 그해 2월에 국회에서 통과됐다. 그는 화순을 탄광도시에서 역사를 담은 문화도시로 성장한 독일 에센의 졸페라인처럼 만들 생각이다. 2022년 2월 우리나라는 세계보건기구로부터 ‘글로벌 바이오 인력양성 허브’로 선정됐다. 지난해 7월 보건복지부는 화순을 비롯한 전국 5곳을 ‘글로벌 바이오 캠퍼스’ 후보지로 확정했다. 그리고 지난 6월 27일 정부는 화순을 ‘국가첨단전략산업 바이오특화단지’로 선정했다. 그가 공약했던 ‘화순 보스턴형 바이오메디컬 클러스터’ 유치에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이다. 미국 보스턴의 바이오테크 클러스터는 세계 최대의 바이오산업단지로, 바이오테크 산업의 실리콘밸리로 불린다.
국회 행안위원장으로서의 포부를 물으니 “지방자치와 분권을 담당하는 행정안전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소임을 맡겨주신 것은 전국에서 지방소멸 지수가 가장 최상위인 광주·전남의 운명을 한번 바꿔보라는 뜻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소명 의식을 가지고 지방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할 생각이다. 그가 정치를 시작한 이후 줄곧 써온 슬로건 ‘지방에도 희망이 있는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모든 경험과 실력을 쏟아 붓겠다는 각오다.지난달 18일 그는 행안위에서 모든 국민에게 민생회복지원금을 25만~35만원씩 지급하는 ‘민생위기 극복 특별조치법’을 야당 의원들과 함께 통과시켰다. 국민의힘의 반대를 무릅쓴 강행이었다. 신 위원장은 “코로나 때보다 훨씬 살기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국회는 국민이 힘들 때 그 눈물을 위로하고 가능한 모든 대책을 내놓아야 할 마땅한 책무가 있다”며 “(국민의힘 의원들의) 단순히 반대를 위한 반대는 국민을 기망하고 국민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정치적 고민은 뭘까. 그는 “전남의 정치인으로서 민주당의 책임을 크게 느끼고 있고, 제 정치의 과제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역사의 줄기 줄기마다 민주당은 독재에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며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는 노력을 해왔다. 그 힘의 원천은 크게 보면 호남이고 특히 전남이다. 이토록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민주당이 제1 야당으로서 역할을 하는 큰 힘은 호남의 민심, 지치지 않는 호남 사람들의 지지와 성원의 덕분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 정치는 호남에 대해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또 전남은 30여년 지방자치를 통해 제대로 된 자치를 실현하고 있는가. 대단히 아쉬운 대목이다. 그래서 도민들이 늘 민주당을 지지하면서도 민주당에 대한 채찍을 멈추지 않는 것 아닌가”라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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