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그림은 활자로 이뤄졌다. 활자는 모두 성경(聖經)문구다. 보통 그림은 붓으로 그리지만 그의 작품은 각종 다양한 펜으로 그려진다. 빼곡하게 들어찬 성경구절은 혀를 끌끌 차게 할 정도다. 가까이 가서 보면 그가 작업에 얼마만큼 열정과 집중을 발휘했는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그저 놀랍다는 표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이를 ‘말씀그림’이라고 칭한다. 자신은 정작 그림을 그리지만 글쓰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깊다. 그래서 활자를 통해 그림을 그린다는 설명이다.
광주시 북구 문흥지구 작업실에서 오로지 작업에 매진하고 있는 서양화가 김지영(57)씨가 그 주인공이다. 김씨의 그림에 대한 강한 집념은 부친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은 셈이다. 그의 부친은 광주상고 등 유은학원 소속 학교에서만 미술교사로 재직했던 교육자이자 서양화가로 활동했던 고 김은수씨다.
그의 부친은 한국 수채화 1세대 대표주자였던 고 배동신 화백과는 절친으로 지냈고, 서양화가 노의웅 전 호남대 예술대학장 등을 길러냈다. 김씨는 부친의 그림작업을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랐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미술적 환경에서 지낼 수 있었다.
이런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김씨 역시 사회생활을 하느라 잠시 붓을 놓고 미술로부터 일탈한 적도 있었지만 결국 다시 미술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물론 화가의 길이 힘든 과정이어서 이를 겪어본 부친의 만류도 있었지만 이 잠깐의 일탈시기를 빼면 줄곧 미술 안에 있었다. 그의 몸에는 미술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김씨의 성품 역시 부친을 빼 닮았다. 그의 부친은 생전 각종 미술대전에서 다수 수상한 이력이 있었지만 티를 내지 않고 작품활동을 펼쳤다. 김씨는 이런 아버지가 스케치 등 야외활동을 다닐 때마다 화구를 들고 따라 다니면서 미술에 눈을 뜨게 된다.
김씨의 작업은 3∼4년전부터 왕성하게 불타 올랐다. 그의 작업실은 문흥지구 호산나교회 지하에 자리하고 있다. 계단에는 부친이 남긴 작품들과 자신의 작품들이 정렬돼 있다. 작업실 안으로 들어서면 화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드럼 등의 악기가 놓여져 있었다. 악기에 의아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림만 잘하는 것이 아니었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교회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쳐준다는 것이다. 그의 작업실이 교회건물 지하에 자리잡은 것은 이 교회 목사가 김씨의 재능을 높게 평가해 기꺼이 공간을 내주었다는 후문이다. 식사시간이나 화장실 가는 시간,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이곳에서 작업을 하며 보낸다.
그는 순수한 마음으로 미술에 미친 사람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친으로부터 ‘자고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오로지 미술에 미치는 수밖에 없다’는 말씀을 가슴깊이 새겨왔다. 또 실제 생활이 미술로 시작해 미술로 끝이 난다. 그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들이다.
그림에 미치되, 즐겁게 미치자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아버지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은데다 숨겨진 재능까지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디자인을 배우기 위해 광주상고에 진학했고, 어렵게 학교를 졸업한 뒤 미술대학 대신 신학대학에 진학했다. 아마 이런 과정들이 현재의 ‘말씀그림’ 골격이 완성되는 첫 출발지로 볼 수 있다.
"집념으로 그림을 그려왔죠. 예전에 숨겨져 있던 잠재력이 표출되고 있는 것 같아요. 화선지의 묘미를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화선지에다 서양화풍 기법들을 투영하는데 볼펜이나 색연필 등 다양한 표현도구를 사용해 ‘말씀그림(성화)’을 저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유화를 쓰지 않고 글씨로 그림을 그리고 있죠."
화단 역시 스펙과 이력이 중요시되지만 그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집념으로 그림을 그린다. 이 집념이 오늘날 그를 곧추 세우는 근간이 되고 있다.
그는 기법적으로 한쪽에 함몰되지 않는다. 한국화 기법이나 서양화 기법을 가리지 않고 시도하는 한편, 소재발굴을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인다. 부채나 표주박, 돌, 호두 등 그의 소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궁무진하다. 이처럼 소재를 가리지않고 시도하는 것은 무한한 발전을 이루고 싶은 꿈이 있어서다.
그래서 소재는 점차 생활 속으로 확대되고 있다. 유리에도 그림을 그리는 등 상상했던 것들을 현실화시키고 있다.
한때 자신의 큰 형님과 벽화사업도 진행했다. 벽화도 미술로부터 동떨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기꺼이 받아들여 작업을 했다. 광주 유치원 10곳과 경기도 안성, 전북 정읍 등지에서 벽화작업을 했다. 벽화는 홀로 그리기 어려워 2인1조가 돼야 진행이 가능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나중에 형님의 건강이 좋지 않아 접어야 했지만 그것도 창작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미술적 외연을 넓히는데 도움이 됐다는 설명이다.
그는 인터뷰하는 동안 완결된 소재가 아닌, 발굴단계로서의 소재를 언급했다.
"저는 벽화든, 아니든 간에 창작이 좋습니다. 지금 현재는 ‘말씀그림’을 꾸준히 하고 있는데 소재를 발굴하는 단계로 보면 될 거예요. 구상하면서 그림을 그려가고 있어요. 이런 모든 활동들이 재미져요. 아울러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필요한 도구나 대상(소재)을 연구하는 것이 재미있네요. 그래서 자동차보다는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며 밖에 보이는 풍경들을 소재로 연결시키고 창작을 구상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죠."
늘 소재연구를 게을리하지 않는 그는 어떤 한가지에만 빠져 지내는 것보다는 다양하게 작업을 끌고 가기를 희망한다.
"저는 한가지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요즘 화가분들은 한가지만 집중하고 그것을 높게 평가하지만 저는 장르가 다르지만 음악도 하는 등 늘 새로운 것을 좋아해요. 그래서 인물화를 그린다고 하면 일반적 인물화가 아닌, 장애인 인물화를 그려보고 싶은 것도 그런 맥락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제 발상은 조금 엉뚱하죠. 계속 창작하고 있는 과정으로 보시면 돼요."
‘말씀그림’이라는 독창적 세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늘 변화를 꿈꾸는 그는 틀에 갇히는 것을 우려한다. 전통적인 방식이 있다고 해서 거기에 함몰돼서는 안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를테면 한국화가가 족자에다 사군자를 치고 낙관을 찍고 하는 식의 틀 같은 것을 벗어났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것이 좋은 사례다.
이렇게 변화를 꿈꿔온 그가 늦깎이로 첫 개인전시를 앞두고 있다. 전시는 11월1일부터 17일까지 광주시 동구 궁동 예술의거리 소재 아트타운 갤러리에서 진행되며 그동안 작업해온 작품 45점을 출품해 선보인다.
"첫 개인전이라 걱정이 앞섭니다. 제가 전시를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내가 창작의 세계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림이라는 것을 여러 장르로 그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앞으로 이번 개인전을 계기로 스티로폼을 갖고 작업을 해보고, 입체그림 및 조각이 접목된 그림을 추구해보는 등 틀에 박혀 있기보다는 계속 제 그림이 변화해 갔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아버지풍의 풍경화도요."
대를 이어 작업을 펼치고 있는 그는 요즘 부쩍 부친의 붓터치를 되새긴다. 우연히 부친의 화집을 보다가 붓터치를 본 것이다. 거기에서 아버지의 품행이 묻어났고, 유화로 붓 터치를 내기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가 막힐 정도의 부친의 붓터치를 느낀 것이다.
"붓 터치로 그림을 살리고, 죽이는데 터치가 살아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아울러 김씨는 ‘무지개의 화가’로 불린다. 그가 무지개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양성 때문이다. 근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흉내를 낼 수 있을 뿐이라는 게 그의 시각이다. 일곱색깔 안에 숨겨진 뜻이 너무 좋다는 설명을 끝으로 ‘말씀그림’ 예찬을 마무리지었다.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