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관악기 오보에는 오케스트라가 본 연주에 들어갈 때, 기준 음을 불어준다. 콧소리가 섞인 듯 단단하면서도 감미로운 특유의 음색은 오케스트라 전체를 뚫고 나가는 강한 ‘힘’이 있다. 주변 환경에 아랑곳없이 음정의 변화가 크게 나지 않는 안정적인 악기란 점도 특징으로 꼽힌다. 시작이 반이듯, 첫 리드 음에 따라 연주의 성패가 갈리기도 하니 과연 중요한 역할이다.
이 같은 오보에의 막중한 임무가 아버지에게서 딸로 넘어갔다. 대를 이어 광주시립교향악단의 ‘첫 음’을 책임지고 있는 송진흥(59)씨와 송애리(31)씨 부녀가 그 주인공이다.
송진흥씨는 1976년 광주시향의 창단멤버로 함께해 2014년 12월 31일자로 은퇴하기까지 40여년을 함께했다. 광주시향이 올해로 창단 40주년을 맞았으니 시향의 산 증인이라 할 만 하다.
그가 오보에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밴드부 시절이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오보에 음색은 단박에 그의 귀를 사로잡았다. 눈으로 본 것도 아니고, 오로지 귀로 듣고서 그는 "오보에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세웠다. 송씨는 그 길로 오보에 전문 연주자의 길로 들어선다. 당시 너무나 생소했던 악기라, 지역에서는 연주하는 사람도, 가르치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아마도 광주·전남에서는 전문 오보에 연주를 시작한 것은 내가 처음이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이후, 열차를 타고 서울을 다니면서 오보에를 배웠다"고 돌아봤다.
그가 광주시향에서 오보에 차·수석으로 활약한 세월만 40여년이다. 은퇴를 앞두고선 아쉬운 마음이 컸다. 현대 음악 쪽으로 넘어갈수록 연주에 어려움이 있기도 했지만 마음만은 늘 ‘현역’ 이었기 때문이다. 뿐 아니라 시민교향악단으로 출발해 예향을 대표하는 어엿한 오케스트라로 성장하기까지, 이 모든 것을 지켜본 초창기 멤버로서 애정이 깊은 탓이기도 하다. 그의 은퇴를 마지막으로 광주시향 창단 멤버들은 모두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줬다.
송씨의 빈자리는 그의 딸인 애리씨가 맡았다. 지난해 입단한 애리씨는 현재 오보에 차석으로 활동 중이다.
애리씨는 "아버지 자리에서 제가 연주를 이어간다는 것이 영광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며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 ‘아버지였으면 어떻게 연주했을까’란 끊임없는 물음을 통해 중심을 잡아가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오보이스트 부녀가 꼽는 오보에의 매력은 바로 ‘소리’다. 각 악기마다 고유한 음색이 있기 마련이다. 다만 오보에는 어딘가 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실제 옛날 성당에서는 오보에 연주를 금지했었다는 설도 있다. 오보에의 소리가 사람의 ‘혼’을 뺏어간다는 게 이유였다 전해지니, 오보에 음색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설명되고도 남는다.
오보에에 흠뻑 빠진 이들이지만 오보에 때문에 갈등을 빚기도 했다. 바로 딸인 애리씨가 "오보에를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다. 누구보다 오보에란 악기를 사랑한 송진흥씨지만 그때 만큼은 사랑하는 딸의 아버지의 마음이 앞섰다.
그는 "한 번 악기와 연을 맺게 되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반대했었다"며 "정말 제대로 이 분야의 ‘장인’이 돼야겠다는 마음이 아니라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말라고 했었다"고 말했다.
부전여전, 애리씨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버지가 ‘꽂혔다’던 오보에의 매력을 맛봤으니 그도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다. 애리씨는 ‘아버지를 넘어서는 오보에 연주자가 되겠다’는 당돌한 다짐 끝에 아버지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 아버지는 애리씨에게 가장 무서운 선배이자, 든든한 음악적 동지가 됐다. 시향 연습에 들어가기 전에 함께 악보를 보면서 작품에 대해 공부하고, 어떻게 연주해야 할지 머리를 맞댄다.
두 사람은 독일 에센국립음대 파이트 교수를 사사, 스승도 같다. 한 스승 아래서 배운 이들은 서로의 음악적 색을 잘 알다보니, 부딪히는 일도 있다. 부녀 관계를 떠나 ‘음악인’으로서 중점을 두는 시각이 달라서다.
애리씨는 "저는 악상의 세부적인 표현들에 심혈을 기울이는 편인데 아버지는 음악의 전체적인 흐름에 집중 하신다"며 "시각의 차이로 생각하는데, 결국은 내가 못 보는 것을 선배 음악인인 아버지가 잡아주시니 전체적인 연주 완성도는 끌어올릴 수 있다"고 봤다.
선배 중에서도 한참 고참이지만 아버지는 딸의 음악세계를 존중하려고 노력한다. 딸도 벌써 10년 차 오보에 연주자로서 자신만의 ‘색’을 정립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색을 딸 연주에 입히려고 욕심을 내선 안 된다고 생각해 ‘관전’하려고 노력한다"며 "다만 세월에서 얻어낸 연주의 지혜나 경험들을 나눠주려 한다"고 말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애리씨는 아버지에게 고마운 마음이 크다. 악보에 기재된 표현, 그 ‘너머’를 내다보는 것은 오직 연륜과 수많은 연주 경험에서 비롯되는데, 애리씨에겐 이를 조언해 줄 자신만의 든든한 멘토가 있기 때문이다.
각자 음악적 색은 다르지만 오보이스트로서 추구하는 지향점은 같다. 전문 음악인으로서 자신만의 매력을 연주에 담아내는 것. 특히 아버지 송진흥씨는 ‘숨‘을 불어넣는 연주에는 마음의 색이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강조한다.
그는 "음악도 그림과 같다. 바다를 만들 것인지, 강을 표현할 것인지, 냇가를 그릴 것인지, 연주자가 불어넣는 숨에서 그 모습이 달라진다"며 "어떻게 만들어 갈지는 수많은 연주 경험으로부터 자기 색깔을 온전히 입혀갈 때 자연스레 나올 것"이라고 했다.
좋은 연주자로 성장하기까지, 아버지가 딸에게 바라는 점은 하나다. ‘늘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 명료한 조언에는 수가지의 뜻이 담겨있는데 총명한 애리씨는 아버지의 뜻을 알아챈다.
애리씨에게 아버지는 롤 모델이자, 스스로가 넘어야 할 벽이다. "송진흥 오보에 연주자의 소리가 참 아름다웠다"는 대내외의 평가를 이어가야 할 뿐 아니라, 아버지를 넘어서 좋은 연주자로 인정받아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그는 "오케스트라에서 한 명이 빠지고, 한 사람이 그 자리를 메운다는 것은 부담이 되는 일인데, 그것이 나의 아버지라서 참 어려웠다"면서도 "30여년 경력의 아버지 연주 실력을 금방 따라잡을 수는 없겠지만 아버지 조언대로 늘 최선을 다하는 연주자로서, 광주시향의 아름다운 연주에 힘을 보태고 싶다"고 전했다.
오보이스트 부녀가 한 무대에 서는 연주회는 봄과 함께 찾아온다. 이들은 광주 드맹아트홀에서 오보에를 들고 마주한다. 각자 연주회에서 게스트로 무대에 선 적은 있지만 두 연주자의 이름을 걸고 한 무대에 오르는 것은 처음이다.
송진흥씨는 "만물이 생동하는 봄에 열리는 연주회인 만큼, 어렵고 무거운 분위기의 음악보다는, 듣기에 편안한 곡들로 프로그램을 짤 생각"이라며 "추운 겨울이 가고 좋은 봄날에, 아버지와 딸이 함께하는 오보에 연주회에서 만나길 기대한다"고 바랐다.

박세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