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어느 ‘틈’에 있었다. 제도권에서 한참 밀려난 곳에 머물렀고, 배제된 사람들과 함께였다. 늘 변방에 있었고 도도한 주류의 흐름에 압사당할까 노심초사 하면서도 배수진을 쳤다.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블랙리스트’였고 그렇기 때문에 늘 고단했는지도 모른다. "어린 나이부터 너무나 가열 차게 살아와서, 이제는 지금껏 쌓아온 것을 나누고 살고자 한다"는 그가 또 다시 어느 틈에 섰다. 광주극장 옆 골목 ‘소년의 서(書)’ 책방을 연 연극연출가이자 독립기획자 임인자씨 이야기다.

책방은 꼭 숨은 듯 있었다. 광주 동구 충장로 5가 광주극장이 자리한 곳에서 조금 떨어진 뒷골목이다. 주변엔 원룸들이 들어섰는데, 그곳 중간쯤을 지날 때 언뜻 초록빛 간판 ‘소년의 서’가 눈에 띈다. "아 ,저기구나"란 생각과 동시에 과연 늘 변방에서 묵묵했던 내공 깊은 주인장의 뜻이 어렴풋 읽혀진다.
지난달 17일 찾아간 ‘소년의 서’는 여전히 오픈 준비 중이었다. 본래는 지난해 10월부터 그의 ‘탈 서울’ 계획이 가동돼 더 일찌감치 문을 열 작정이었지만 차질이 생겼다.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고, 블랙리스트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그가 서울에 남아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박근혜가 지난 3월 10일 탄핵인용이 되고 18일 해산하기까지 광화문 광장에 ‘블랙텐트’에서 노숙 생활을 했다. 연극인 70명과 해고노동자들과 함께였다. 그곳에서 그는 임시공공극장을 지었다. 사회에서 배제당한, 또는 묵살당해 온 ‘빼앗긴 목소리’들에 귀 기울이기 위해서다. 극장에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 세월호 가족극단의 작품, 오늘날 ‘검열’이라는 것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해 모색하는 묵직한 작품들이 올랐다. 2010년부터 2016년까지 변방연극제를 끌어 온 그가 ‘탈 서울’을 하기 전 남긴 굵직한 흔적인 셈이다. 치열했던 서울살이를 마치고 그는 이제 고향인 광주로 내려왔다.
"책방을 하겠다고 결심 한 것은 꽤 오래된 생각입니다. 최근에는 있던 서점들도 문을 닫는 형국이지만 지역사회에서 서점의 역할이란 것이 있죠. 말하자면 ‘삶의 대안’을 찾는 공간이에요. 자본에 포획 돼 있는 삶에서 벗어나서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사회를 꾸짖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죠. 바로 책을 매개로요."
서고를 휘이 둘러보니, 익숙하면서도 낯선 책들이 빼곡하다. 익숙한 이유는 어디선가 한번 쯤 들어봤을 법한 제목이라서 그렇고, 낯선 이유는 그럼에도 쉽게 접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다. 쉽게 말해 금서란 이유로 숨죽여 읽을 수 밖에 없던 ‘지하의 베스트셀러’들이다. 1985년 초판 이후 최근 32년 만에 개정판으로 나온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비롯해 ‘7080년대 공연금지 희곡선집’, ‘억압받는 자들의 연극’ 등 희귀본도 눈에 띈다. 어느 손님이 와서는 "내가 당시에 무서워서 버렸던 책들이 여기 다 있다"며 신기해했다 한다. 엄혹한 세월을 견디어 온 귀한 책들이다.
‘소년의 서’에는 인문사회과학예술 서적들 1000여권이 있다. 임인자씨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책들과 "이곳에 꼭 어울릴 것 같다"며 십시일반 기증해 준 책들도 꽤 된다. 책방에는 ‘아직 과거인 소년 소녀가 미래로 와서 오늘을 봅니다. 그날의 책을 함께 읽습니다’라는 의미심장한 글귀가 붙어있다.
"소년 하면, 무엇이 떠오르세요?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존재가 아닐까요? 소년의 책방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미완의 문제들을 품고 있는 것, 풀어야 할 숙제가 남은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어요. 그러니까 ‘소년의 서’는 완전함으로, 성숙함으로 나아가기 위한 그 발판이 되는 공간이죠."

책방 한 가운데는 ‘살아남은 아이’란 책이 놓여 져 있는데, 이곳의 탄생과 연이 깊은 책이다. 책에는 형제복지원 생존자인 한종선씨가 12살부터 사회로부터 완전히 폐쇄된 채 살아온 삶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임씨는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조차도 ‘탈락’한 삶을 마주하면서 상당한 고통을 느꼈다. 그가 ‘변방’에 서 있었다고 믿었던 그 위치가 결국 제도의 안과 밖의 ‘밖’ 정도였다고만 생각한 것에 대한 반성이었다. 제도의 안과 밖을 떠나 그 밑에 깔려 압사당하는 것들을 차마 보살피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있었다.
그래서 임씨의 예술활동은 더욱 더 외진 곳을 향한다. 그는 특히 변방이 갖는 ‘장소성’에 방점을 둔 작품을 올리는데, 최연소로 예술감독을 맡은 변방연극제가 그렇고 광천동 시민아파트·전일빙딩에서 펼친 ‘도시횡단프로젝트’, 2016광주비엔날 출품·참여작 ‘도롱뇽의 비탄’ 등도 마찬가지다.
임씨가 공연예술에서 ‘장소특정형’ 작품을 많이 선보이는 데는 고3 시절의 또렷한 기억 탓이다. 1994년 입시 준비에 여념이 없던 그는 도청 앞 분수대 앞에서 펼쳐진 ‘민족민주대성회’를 목격한다.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진실과 가치를 알리기 위해 모인 광주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그때 80년 5월을 경험한 것 같다"고 기억했다.
"민족민주대성회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로 보였어요. 시간에 맞춰 분수대로 몰려오는 사람들, 그리고 행사가 시작되고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함성들. 또 시민들로 가득 메워진 그 풍경 자체가 모두 주옥같은 예술이었죠."
이러한 그의 예술적 시각은 광주교대 연극반 활동에서 이어진다. 그는 완성된 연극 작품에서보다, 하나의 작품을 올리기 위한 그 과정 자체에서 희열을 느꼈다. 사회담론을 연극적 언어로 해석하는 데 토론하고 논의하는 장을 무대 밖에서 펼치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 그의 관점에서 진짜 연극은 무대가 막을 내리고서다. 극이 상연된 뒤 저마다의 말문이 터지는 시점이 또 하나 작품의 시작이 되는 셈이다.
"예술은 세상을 조금 더 분석적이게, 또 한편으로는 다르게 감각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고3 시절 분수대의 기억이 참 좋았던 이유는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제 목소리를 내는 광장으로서의 모습도 감명 깊었지만, 한 공간이 다른 방식으로 변화되는 것이 진짜 좋았거든요. 시민들이 구름같이 모여든 모습, 앞이 잘 보이지 않으니까 공중전화 박스에 오른 사람들, 그 건물 주변으로는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들. 일상에 긍정적인 ‘균열’이 참 산뜻했어요."
그런 면에서 책방 ‘소년의 서’는 그의 장소특정형 예술활동의 연장선이다. 서점이 책을 사고파는 어떤 가치교환의 장소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간 만남을 주선하고 싶은 욕심이다. 좁은 서점 안에 네모난 테이블이 떡 하니 버티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엄혹한 시절 세상과 짱짱히 맞섰던 ‘들불야학’처럼 이 시대의 ‘야학’을 재현하고 싶은 생각이다. 모여 앉아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고, 공부도 하는 일종의 스터디 그룹을 여는 것이다.
연출가로서의 행보도 이어진다. 그는 관 주도로 짜여 진 광주의 문화판을 깨는 데 주력하고 싶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기획하느냐 묻자 "도심 곳곳서 이뤄지는 동시다발적 축제를 기획하고 싶다"고 운을 뗀다. 예향 광주를 더 멋스럽게 할, 소중한 문화적 자산들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공연예술도 펼치고 싶은 그다. 그러면서 더 낮고 외진 곳을 예민하게 드려다 볼 작정이다.
"예술가는 사회를 꾸미는 장식적인 역할을 하는 게 아니에요. 사회 곳곳에 산재 돼 있는 문제들, 또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것들을 캐내어 공론화시키는 게 예술가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껏 어딘가 ‘틈’에 서 있으려고 노력한 것처럼 앞으로도 그러고 싶어요. 변방에 낮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또 빼앗긴 목소리들에 힘을 실어주는 일, 그것이 제 몫이 될 것입니다."
한편 ‘소년의 서’는 6월초 공식적인 오픈을 한다. 평일 오후 12시부터 8시까지 문을 열고, 일요일은 휴무다.

박세라 기자 sera0631@gwangnam.co.kr

-연극 연출가·독립기획자 임인자씨는
△중앙대 연극학과 졸업 △2010~2016 변방연극제 예술감독 △2013 문화전당 ‘도시횡단 프로젝트 광주’ 예술감독 △서울연극협회 ‘젊은 연극인상’ 수상 △서울문화재단 정책위원 △‘광장극장 블랙텐트’에도 운영위원 △ACC 프린지인터내셔널 시민참여 프로그램 연출 △‘국가에게 묻는다’ ‘낙인과 배제의 개인사’ ‘시민L’ 등 다수 연출

박세라 기자 admin@jld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