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관심과 사랑을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아이가 꿈을 키우며 성장하기까지는 든든한 공동체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광주에서 3대째 소외아동에게 든든한 울타리를 자처한 일가가 있다. 광주 광산구 임곡에 위치한 사회복지법인 용진원 설립자와 후손이다. 가업을 이어 7월1일 취임하게 될 민재웅 신임원장(37)을 만났다.

“전쟁고아를 먹여 살린 할아버지의 마음과 44년간 용진원에 헌신한 아버지의 마음을 제가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을까요. 부담감이 큰 만큼 할아버지의 숭고한 봉사정신과 아버지의 열정과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3대째 용진원을 이끌 중책을 맡게 된 민재웅씨는 신임원장으로서 포부를 밝혔다.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
용진원은 황룡강이 내려다보이는 용진산 기슭에 자리 잡은 사회복지법인이다. 생활시설인 용진육아원과 청소년의 건전한 과외활동에 활용되는 용진수련원으로 운영된다. 올해로 창립 65주년을 맞은 용진육아원은 광주에서 2000여명의 아이들을 묵묵히 길러낸 지역의 산실이다. 현재는 5세 아동부터 대학생까지 49명이 생활하고 있다.
37세의 젊은 나이에 선대가 이룩한 과업을 잇는다는 결정은 쉽지 않았다. 더구나 나 하나 뿐이 아닌 수십명 아이들의 양육을 책임진다는 압박감은 떨치기 어려웠다. 전임 원장이자 민재웅씨의 아버지인 민명철씨도 아들에게 경제적 보상은 미미한데 책임과 의무는 큰 원장직을 맡기는 것을 걱정했다. 게다가 민재웅 원장은 전도유망한 화석 전문가로서 이력을 쌓고 있던 참이었다.
민재웅 원장은 2007년 전남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지구환경과학과에 편입한 이후 국‧내외 학술대회에 참가해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2012년에는 국내 최초로 고래화석에 관한 석사연구 논문을 발표해 학계 이목을 끌었다. 목포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된 ‘수각류 공룡알둥지 화석’도 민 원장의 발굴이 이룬 성과물 중 하나다. 한국공룡연구센터 연구원과 한국고생물학회 간사로 바쁜 연구생활을 해오던 그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조언이 마음을 두드렸다.
“2015년에 기아 타이거즈 후원으로 광주아동복지협회 아이들과 몽골 유소년팀간 친선경기를 치르기 위해 몽골로 갈 기회가 있었어요. 아버지와 함께 복지협회 지도자 자격으로 다녀왔습니다. 무사히 친선경기를 마치고 그동안 단둘이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아버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죠. 아버지께서 ‘너의 마지막쯤에는 내가 느끼는 이 기쁨을 네가 알 수 있을 것 같아 큰 선물을 준다’고 하셨어요. 밤하늘 아래 본 아버지의 표정은 추호의 거짓말도 없었어요. 그 말씀이 가슴을 저미고 뼛속까지 파고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선물을 감사히 받아야겠다고 마음이 움직이더군요.”
그가 원장으로 취임한 것은 전임 원장의 아들이라서만은 아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용진원 출신 또래 친구들과 같이 자라온 용진원 경험자이자 산증인이다. 청년시절에는 아버지 어깨 너머로 용진원의 운영방침을 배웠고 지난 5년 동안 생활지도원이자 사무국장으로 실무를 익혔다.
또한 송정청년회의소(JCI)는 물론 광주사회복지사협회, 광주사회복지협의회, 광주아동복지협회, 광주복지재단, 광주리더스포럼, 광산지역사회보장협의체 등에 참여해 지역의 사회복지 현안을 연구해왔다.
“저는 어린시절 참 복이 많았던 것 같아요. 중학생 때까지 육아원 친구들과 함께 다녔어요. 항상 왁자지껄하고 외로울 틈이 없었죠. 사택도 용진원 바로 옆이라 하교 후에도 친구들과 온 몸에 흙 묻히며 뛰놀았어요. 함께 공부하고, 밥 먹고, 놀고…. 형제가 11명 있었던 셈이죠.”
민 원장은 어린시절부터 용진원의 환경에 자연스레 노출된 덕에 소외아동에 대한 편견이 싹틀 틈이 없었다. 하지만 사회는 달랐다. 관내에 도난이나 폭력사건이 발생하면 용진원으로 연락이 오곤 했다. 용진원 아동들이 사건에 개입돼 있을 것이란 편견 때문이었다.
더구나 일부 복지시설들이 운영비 부정사용, 아동 학대 등 부정적인 모습이 드러나면서 사회 복지시설 자체에 대한 불편한 인식도 싹텄다. 민 원장은 이런 편견들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시설이라고 하면 강한 규율로 아이들을 억압한다는 식의 오해가 있더군요. 일부 잘못된 복지시설의 선례나 영화 때문에 생긴 편견일 뿐 대부분은 평범한 가정처럼 일상적인 분위기입니다.”
실제로 용진원은 광주 보육시설 12개 가운데 아동들의 사고율이 가장 낮다. 이 같은 배경에는 용진원의 운영방식이 한몫했다.
“5년간 용진원의 생활지도원이자 사무국장으로 근무하며 아버지가 강조하신 용진원의 운영방침을 익혔습니다. 최대한 자율을 보장하는 운영방식이 오히려 아이들이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지게 하는 것 같아요”
용진육아원은 단순히 아이의 의식주만 돌보지 않는다. 아이들의 역량을 키워 자기개발을 돕고 자립발판을 마련해주는 데에도 힘을 쏟는다. 보습학원과 공부방 참여를 유도해 학교 수업에 뒤처지지 않도록 지원하는 것은 기본이다. 예체능 특기생을 위한 학원 수강까지 독려한다.
용진원 아이들은 정기적으로 무용, 노래 등 발표회를 열고 현장학습도 떠난다. 현장학습은 유적지 문화탐방, 여름캠프, 도자기 만들기 대회 등 다채롭게 구성됐다. 1984년부터 2014년까지 용진원장배 사생대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아버지께서 사생대회를 열었던 이유는 하나였어요. 우리 아이들에게 자존심과 희망을 심어주겠다는 것이었죠. 사생대회를 열어 참여 학생들에겐 푸짐한 시상을 하고 이웃에게 잘 차린 식사도 제공했습니다. 용진원이 항상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하셨던 것 같아요.”
자립을 위한 지식을 배우는 프로그램도 마련해뒀다. 2004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자립생활수련회다. 수련회에선 외부강사 특강을 비롯해 장래 진로 설계와 상담, 소방 및 전기안전 실습, 성(性) 교육, 음식 조리 실습 등 실생활에 필요한 알찬 정보를 전달한다.

용진원은 특히 고등교육 기회를 폭넓게 열어준다는 점에서 타 보육기관과 차별점이 있다. 만 19세 대학 진학률은 90%이상으로 광주는 물론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올해도 고등학교 졸업생 3명 모두 대학에 진학했다. 이 중 2명은 우수한 성적으로 국립대 간호학과에 입학했다.
“아버지께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누구나 대학을 갈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실제로 그 믿음이 이뤄지도록 노력하셨어요. 아버지가 회고하실 때 가장 잘 한 일 중 하나로 꼽은 게 대학지원이에요. 처음엔 선별적으로 진학을 시켰지만 꾸준히 장학금을 모아 이젠 모든 고교졸업생에게 대학을 권할 수 있게 됐습니다. “
자립을 돕는 용진원의 또 다른 시스템은 디딤 씨앗 통장이다. 용진원에 입소한 아동들은 입소 첫 달부터 개인통장을 갖게 된다. 후원금이나 용돈 등을 저축하기 위해서다. 정부와 1:1로 매칭 저축된다. 펀드나 CMA를 통해 안정적인 성향의 투자도 해 아이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다. 퇴원할 때 정부준비금으로 500만원을 지급하고 기초생활용품도 준비해준다. 민 원장은 퇴소 시 많게는 1500만원을 모아 나가는 경우도 있다고 귀띔했다.
대학진학 후에는 시설에 더욱 오래 머물 수 있는데 연장 퇴소 후 자립생활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인성교육부터 진로, 특기개발, 취업교육까지 자립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이 같이 철저한 자립 프로그램은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다. 퇴소한 용진원 출신들이 사회적으로 남부럽지 않은 성공을 해 후원자로 나선다. 정기 후원자 100명 중 약 30명 가량이 용진원 출신이다.
“용진원 출신 중에 어엿한 공장장이 돼서 매년 일정액을 기부금으로 후원하는 분이 계세요. 정말 뿌듯한 순간이죠. 용진원을 잊지 않았다는 데서도 고맙지만 비슷한 상황을 경험한 선배로서 동생들을 돕는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했다는 것이 더욱 뿌듯하더라구요. ‘아, 우리 용진원이 헛 키운 것은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도 느끼구요.”
화석 전문가에서 복지시설원장으로 인생 2막 레이스를 시작한 민재웅씨에게 앞으로의 포부를 들어봤다.
“어렸을 때부터 제가 오래 달리기는 자신 있었습니다. 그만 둘까 포기하고 싶은 순간마다 호흡을 다스리고 지난 걸음들을 떠올렸어요. 용진원의 세 번째 바통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해요. 3대째 이어달리기인 셈이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일궈놓은 길을 본받으며 사회에 보탬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뛰어 보겠습니다.”


민재웅 용진육아원 신임원장은.
△광주광역시 복지재단 자문위원 △광주광역시 사회복지사협회 운영위원 △광산구 지역사회보장협의체 실무부위원장 △광산구 사회복지협의회 이사 △임곡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 사무국장 △前전남대학교 한국공룡연구센터 연구원

고귀한 기자 사진=최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