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이 쏙 빠질지도 모른다. 물을 튀기고, 또 불을 내뿜는다. 또 쉼 없이 두드린다. 타악기의 앙상블에다, 강하고도 부드러운 멜로디가 더해진다. 흥 난 관객들의 환호 소리 그리고 박수 갈채까지 어우러지면 무대는 절정에 치닫는다. 공연자 그리고 관객이 하나 된다. 바로 이 것, 이 순간이 얼쑤가 말하는 ‘대동신명’의 경지다.
전통문화연구회 ‘얼쑤’는 그 이름처럼 흥을 돋우는 광주 대표 예술단이다. ‘두드려’ 소리를 내는 가장 원초적이고 정직한 행위를 모태로 얼쑤만의 이야기를 풀어내 왔다.
얼쑤는 1992년 "잘 놀고 싶다"던 네 명의 청년들이 뜻을 모아 탄생했다. 당시 가톨릭청년운동회에서 활동하던 김양균 대표와 YMCA·YWCA 등 단체 안에서 풍물패 활동을 하던 이들이 ‘밖으로 나와 놀자’고 한 것이 여기까지 오게 됐다.
250만원씩 출자해 주월동 선명학교 지하실에 둥지를 틀었다. 각 단체 안에서만 활동 하다가, ‘밖’으로 나오자 할 일이 많아졌다. 예술의 거리에서 거리극을 열었고, 행사장에서 길놀이를 펼쳤다.
그러자 당시 ‘장구치고 북치는 사람’들은 대모 하는 사람들 쯤으로 여겼던 시민들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풍물을 배우고 싶다는 시민들이 하나 둘 주월동 연습실로 찾아왔고, 얼쑤는 이에 사회복지관에 ‘풍물교실’을 개설, 이에 응답했다. 지금에야 거리 상설공연이나 문화 강습이 흔하지만, 당시에는 참신하고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김양균 대표는 당시의 활동들을 "광주 문화 판에 ‘풍물’이란 씨앗을 심어 놓은 시기"라고 기억한다.
"그 시절에는 사물놀이 악기에 대한 ‘편견’이 있던 때였어요. 꽹과리를 친다는 게 시위 행렬의 선두 주자로 인식되기도 했죠. 악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뺏기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러던 것을 밖에 나와 공연도 하고, 시민들하고 함께 즐기기 시작하니 많은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죠."
광주 첫 사물놀이 단체로서 얼쑤가 닦아놓은 길도 여럿이다. 특히 민간예술단이 ‘월급제’를 시작한 것은 손에 꼽힐 만한 성과다. ‘예술가는 배고파야 한다’는 말에 반대하는 김 대표는 고정적인 수입이 있어야만 예술에 집중할 수 있다고 봤다. 작지만 꼬박 꼬박 들어오는 월급은 얼쑤가 광주 대표 예술단으로 성장하는 데 든든한 밑거름이 돼 준 것은 사실이다. 오래 함께하는 단원들이 생기면서 각 개인의 내공이 깊어짐과 동시에 얼쑤만의 예술색도 짙어졌기 때문이다.
얼쑤의 작품은 다양하지만 그 뿌리에는 풍물굿이 있다. 전통 풍물굿에 기반을 두고, 늘 새로움을 좇는 게 얼쑤가 가는 길이다. 대표작으로는 ‘인수화풍’, ‘질주’, ‘락의로’ 그리고 가족뮤지컬 ‘몽키즈’ 등이 꼽힌다.
그들의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우주의 순환 원리를 공연에 적용시킨다는 점이다. 특히 ‘인수화풍’은 바람과 불과 물과 사람. 이 네 가지가 사물놀이 신명으로 되살아난다. 풍물굿의 가장 큰 매력인 ‘내고 달고 맺고 푸는’ 전통예술의 원리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내고 달고 맺고 푼다. 이것은 바로 ‘흐름’이에요. 생명 그리고 자연의 흐름을 사물놀이 악기로 표현하는 것이죠. 하늘의 소리를 땅 위에서 인간이 가지고 논다는 것, 그것이 바로 얼쑤가 다양한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사물놀이입니다."
얼쑤의 레파토리는 다양하다. 쇠, 징, 장구, 북 등 전통 국악기를 기본으로 드럼·모둠북·신디사이저·일렉 기타 등 신명을 더하는 것이라면, 장르·국적 불문 무대에서 함께한다. 두들기면 물이 뿜어는 악기(드럼)와 불이 발사되는 시스템은 얼쑤가 직접 고안해 낸 것이다.
전통이 전통 안에서 갇히지 않고, ‘웰 메이드’ 상품으로서 관객에게 전달되길 바라는 김 대표의 철학이 엿보인다.
"공연예술은 새롭지 않으면 끝이에요. 누가 늘 보던 것을 보고 싶어 하겠습니까? 누구에게나 잠재돼 있는 전통예술의 흥을 건들이면서, 다양한 퍼포먼스를 곁들여야죠.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도 얼쑤가 늘 처음처럼 중히 여기는 것은 전통 풍물이 갖고 있는 ‘질서’이다. 질서라 함은, 악기를 연주할 때의 마음가짐인데 김 대표는 이를 ‘도를 닦는다’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말한다.
"풍물판에서는 남을 인정하는 것이 앞서야해요. 꽹과리 장구 징 북 등 저마다 역할이 있고 그 안에서 합을 맞춰져야 합니다. 나 혼자만 잘나서, 돋보이기 위한 욕심을 낸다면 ‘판’이 형성될 수 없죠. 서로 자기 위치를 알고 양보하고, 타인의 소리에 더 귀 기울일 때 진짜 놀이판이 깔리는 거예요."
얼쑤가 매년 펼치고 있는 난장축제 ‘굿판’은 모든 퍼포먼스의 결정체다. 올해 9회째를 맞는 ‘굿판’은 오늘날 진짜배기 ‘굿’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리다. 미신이라고 평가절하, 또는 외면 받아 온 전통 ‘굿’이 예술의 한 장르로서 시민들을 만나는 것이다.
"인생사 희로애락을 한 단어로 압축한 것이 ‘굿’ 아닐까요? 재미난 일이 있을 때, 가장 재미있다는 남의 싸움 구경을 갈 때도 ‘굿 보러 간다’고 했어요. 서민들 삶 자체가 굿이었던 거죠. 이러한 굿이 미신이란 틀에 갇혀버린 게 안타까웠어요. 굿의 명맥이 끊긴다는 것은 또 하나의 전통을 잃어버리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굿’을 매개로 한 난장축제를 선보이게 됐죠."
‘굿판’은 옛 장터에서 벌이던 마당극 형태를 그대로를 잇는다. 무대와 관객석이 구분돼 있지 않은 점이 특징이다. 누구나 함께 어울리는 잔치가 벌어지는 것이다.
오는 9월 2~3일 대촌전통문화커뮤니티센터에서 열리는 ‘굿판’은 가족 관람객들을 위한 쉼터를 새로이 마련한다. 센터 뒤편 잔디밭으로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놀이 숲’을 조성한다. 뚝방으로는 길게 노천카페를 만들고, 공방 작가들과 함께하는 아트 프로그램도 다채롭게 꾸며질 예정이다.
얼쑤는 이제 더 큰 무대를 꿈꾸고 있다. 얼쑤의 대표 레퍼토리에 내실을 기해, 광주를 대표하는 공연예술로 키워나가고, 나아가 전국 곳곳 무대에서 관객들을 만나고 싶은 소망이다. 전국을 순회, 다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무대로 ‘금의환향’하는 것이 얼쑤가 그리는 큰 그림이다.
또 하나의 꿈이 있다면 ‘창작 공장’을 세우는 일이다. 광주 예술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작품을 구상하고, 공연도 올리는 공간이다. 각 장르의 예술인들이 어울리면 자연스러운 ‘콜라보’가 탄생할 것이란 게 김 대표의 생각이다.
"예술인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으면 좋겠어요. 무엇인가를 하자고 머리 싸매고 만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일상처럼 접근할 수 있는 곳이요. 광주 간판 공연은 ‘창작 공장’에서 다 나온다는, 일종의 예술가들의 뮤즈로 기능하는 곳이면 좋겠죠. ‘잘 놀자~’고 판을 깔았던 얼쑤처럼 예향 광주를 빛내기 위한 예술가들의 걸진 놀이판이 깔렸으면 좋겠습니다."

박세라 기자 사진=최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