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시절 친일파는 일제를 등에 업고 권세를 부리며 더욱 좋은 대우를 받기 위해 일본인 보다 더 지독하게 동족을 괴롭히고 억압하며 감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이 나고 우리나라도 광복을 맞이하면서 일본인들은 본국으로 철수, 국내에는 친일파들이 남게 됐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청산하기 위해 지난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시행했지만 새 나라 건설을 위해 ‘용서’와 ‘화합’이 필요하고, 경험있는 관료와 경찰, 군인이 필요하다며 친일파를 등용, 사실상 청산은 흐지부지 됐다.
이로부터 69년이 흐른 현재, 친일파 청산을 숙명으로 삼고 평생을 살아온 이가 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이며 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으로 활동 중인 심정섭씨(74)다.
김씨는 현재까지 주요인사들의 친일행각 등의 내용 등이 담긴 자료 1만여 점을 수집, 이 중 역사적 가치가 높은 5500여점을 민족문제연구소에 기증했다.
그가 친일파 청산에 매달리는 이유는 단 하나다.
외조부이자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백강(白岡) 조경한 선생(1900~1933)의 정신과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다.
고희(古稀)를 훌쩍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친일파 청산 자료를 모으기 위해 동분서주 하는 심정섭씨를 만나 그동안의 소회와 앞으로도 행보를 들어봤다. <편집자주>

-해방이나 독립운동 기념일에 꾸준히 자료·문건을 공개해 왔다.
△3·1절, 4·13 임시정부기념일, 8·15광복절에 맞춰 그동안 수집한 자료들을 각종 언론에 공개했다.
이는 외조부인 조경한 선생의 영향이 컸다. 외조부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하지만 해방 이후 정권을 잡은 이승만 정부는 친일파 등 일재 잔재 청산에 실패했고, 결국 이들이 정부 기관의 주요 요직을 차지하는 현상이 기이한 빚어졌다.
이는 친일파 청산에 대한 당시 정부의 부족한 의지와 미군정의 개입 등이 맞물린 결과다.
실제 해방 이후 친일파 관료들은 자신들이 처벌을 받을까 봐 몸을 사렸다. 하지만 처벌은 커녕 그들의 권세를 기반 삼아 군정을 핀다는 속셈을 가진 미군정에 의해 요직에 재등용 되는 상황이 연출됐다.
때문에 친일파 청산법인 ‘민족반역자ㆍ부일협력자ㆍ간상배 조사위원회법’은 미군정의 반대에 부딪혀 통과되지 못했고 정부가 수립된 후 친일파는 자신들이 자행한 친일행각을 사면받은 듯 오히려 떵떵거리며 살 수 있게 됐다.
또 친일파들은 당시의 분단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반공주의자라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을 처벌하고자 하면 그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내몰았다.
당시 친일파에 대한 인식도 나빴지만 일제 강점기는 과거이고 분단 상황 현실이었기에 공산주의자는 박멸해야 하는 존재였다.
친일파는 이렇듯 해괴한 논리를 펼친 끝에 한시법에 불과했던 ‘반민법’의 효력이 정지 될 때 까지 버텼다. 결국 청산된 친일파는 극소수에 그쳤고 심지어 사형을 당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여기에 6·25전쟁까지 발발하면서 친일파 청산은 완전히 마침표를 찍게 됐다.
자리보존을 위해 일본인보다 더 동족을 탄압했던 이들의 만행이 그대로 묻힌다는 것은 외조부, 나아가 대한민국의 한 국민으로서 참을 수 없었다.
잘못된 역사는 바로 잡고 청산해야 만 올바른 미래를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

-처음에 독립운동 자료들을 수집하게 된 계기는.
△처음으로 일제강점기 시절의 자료와 조우하게 된 시점은 중학교 2학년 때다. 당시 우연히 광주 동구 계림동 한 책방에 들렸다 가 ‘대동정론’이라는 잡지를 발견했다.
이 책에는 1945년 당시 광복과 함께 귀국한 임시정부 김구 주석 등 국무위원 18명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들 중 외조부인 백강 조경한 선생도 있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백강 선생은 청산리 전투와 비견되는 ‘대전자대첩’에서 독립군 총사령관인 지청천 장군의 참모로 이 전투에 참가한 인물이다. ‘대전자대첩’은 2933년 7월 15일 중국 왕칭 현의 대전자에서 독립군 2500명과 중국 차이스룽 부대 2000명이 연합, 일본군 제73연대를 물리친 전투다. 이후 백강 선생은 임시정부 국무위원, 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장 대리를 역임한 뒤 광복 이후엔 귀국, 6대 국회의원 등을 지냈다.
이때부터 독립을 위해 헌신한 외조부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독립운동가, 당시 활동한 의병장, 친일파 등으로 그 관심이 확산 됐다.

-기억에 남는 자료는 어떤 것인지.
△지난 2004년 지역 언론에 공개한 ‘조선공로자명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 책은 조선총독부가 ‘조선공로자 명감 간행회’를 구성, 한반도를 강점한 지 25년째인 1935년 대대적인 ‘시정 25주년’ 기념사업을 벌이면서 일본에 직·간접으로 협력한 민·관 공로자를 선정해 출간한 것이다.
당시 일제 식민통치에 앞장선 일본인 2560명과 조선인 353명 등 모두 2913명의 명단과 친일행적이 상세히 기술 돼 있다.
특히 이 책은 조선총독부가 펴낸 공식기록물이란 점 때문에 반민족행위와 친일청산 등 일제 강점기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여겨졌으면서도 패망한 일제가 파기 또는 수록 당사자의 후손들에 의해 숨겨지는 바람에 상당한 희귀본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함께 1943년 발행된 ‘녹기’가 기억에 남는다.
친일잡지인 이 책자는 조선인을 일본 천황의 신민으로 만들어 필요에 따라 이용하기 위한 황민화정책의 요체를 확인할 수 있다.
주요 수록인사와 작품으로는 소설가 이광수의 시 ‘전망’을 비롯해 일본 ‘개조’지 현상공모 당선작가였던 장혁주의 ‘어느 독농가의 술회’, 김기림의 ‘북선의 총력전을 말하다’, 김용제의 ‘북선기행’ 등이 있다.
특히 진보적 성향을 표방했던 문인으로 평가된 김기림이나 박영희 등 일부 작가들의 노골적인 친일행각이 실려있어 충격을 줬다.
이 외에 조선총독부가 조선인 지식인을 회유하기 위해 은사금을 지급한 문서, 민족혼 말살을 위해 ‘흰옷 착용 금지’ 내용이 담긴 문서 등도 있다.

-수집된 자료들 중 상당수는 현재 어디에 보존되고 있는지.
△현재까지 1만여 점 정도의 관련 자료를 수집한 것 같다. 이 중 역사적 가치가 높고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한 자료를 선별, 5500여점을 민족문제연구소에 기증했다.
특히 독립운동가 또는 친일파들이 작성한 서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에서 작성한 문서 등은 그 당시의 상황과 현실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기 때문에 대부분 기증하고 있다.


-희귀 자료를 수집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들어갔을 것 같은데 그 비용은 어떻게 마련했나.
△1만여 점의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데 소요된 비용은 실로 엄청나다. 어림잡아 3억원 이상 투자한 것 같다.
돈이 없던 학생 신분일 때는 책방 주인들에게 사정을 하다시피 해 자료를 수집했다. 다행히 ‘친일파 청산을 위해 일제강점기 시절의 자료를 수집 중이다’는 취지를 설명하자 대부분의 책방주인들이 원래의 가격보다 더 싸게 자료를 판매했다.
성인이 된 이후엔 교사로 재직하면서 모든 월급을 자료 수집에 쏟아부었다.
부족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야간 보충수업이나 특별 교육을 무조건 신청했다. 또 주말이면 어김없이 전국 각지로 관련 자료 구입을 위해 버스나 기차 등에 몸을 실었다.
1만여 점의 자료는 친일파 청산과 독립운동가 재조명 등을 위해 열심히 살아온 나의 인생을 대변한다 할 수 있다.

-희귀자료를 한 번에 공개하지 않고 각종 기념일마다 나눠서 공개하는 데 대한 지적의 목소리도 있다.
△이런 자료들을 한 번에 공개한다면 금세 국민의 기억 속에 잊혀 져 버릴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순차적으로 각종 정부 기념일에 맞춰 공개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으로 판단했다.
애국심 고취를 위해 자주, 반복적으로 공개하는 것이 민족정기를 선양하는 길이라고 본다.

-시간이 흐르면서 민족의식이나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자는 목소리가 시들해지는 것 같다
△갈수록 민족정기가 쇠퇴함은 국가 차원에서 볼 때 국민 보다는 친일파의 후손 등 위정자들의 잘못이 크다고 본다.
현재 일부 보수층은 친미사대사상이 팽배해지고, 일부 진보층은 막연하게 북한의 주체사상에 경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단군성조의 대륙사관을 기억하고 이를 기반으로 나아가야 한다. 통일과 함께 만주고토를 회복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참다운 대륙사관이라 할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지금과 다른 계획은 없다. 친일파 청산 등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고 기증하는 것은 숙명이라 생각한다. 공개된 자료들이 박물관, 기념관 등 상설 기관에 소장돼 국민 계몽용으로 활용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또 후세에 제대로 된 역사를 알려주기 위해 광주에 임시정부 기념관이나 민족기념관 등이 세워졌으면 한다.

심정섭 독립운동자료수집가는
△1943 전남 보성 출생
△전남대학교·호남대학교 대학원 졸업
△1961년 통일운동 전개 투옥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 발기인
△백강 조경한 선생 현충시설건립추진위 부위원장
△2004년 광주송원여자정보고등학교 교감 퇴임
△수필집·비문집·동시집·자료집 등 다수 출간

송대웅 기자 사진=최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