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들어 이처럼 많은 붓을 본 적은 없었다. 예술을 한답시고 특정 장르에 목을 맨 나머지 붓에 관한한 아는 것이 많지 않아서 괜히 가슴이 쪼그라들었다. 그의 집 1층에는 붓들이 방마다 전시되고 있다.
가정집이라 온도, 습도 맞추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전시품들은 온전하게 전시하고 있다. 그리고 가지런하다. 그가 고집스럽게 걸은 외길을 통해 얻은 훈장 같은 것들이다. 삶과 열정이 담기지 않은 붓이 없다. 단 한자루도 허투루 보아넘길 수 없다. 모두 각종 대회에서 수상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중간 중간에 이 작품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어도 팔지 않고 보존을 선택한 것들이다.
광주시 남구 백운동 모아산부인과 인근 주택가 붉은색 벽돌 2층집이 있다. 이곳은 광주에서 3대 명품 중 하나인 ‘진다리붓’을 제작하면서 전통의 맥을 잇고 있는 광주시 무형문화재 제4호 필장(筆匠) 문상호씨(76)의 작업실이자 보금자리다. 장인으로서의 숨결이 서린 곳이다.
한때 이 일대에는 필장들이 모여살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그냥 일반 주택가로 보면 된다. 진다리붓은 백운동에서 태어났다. ’벽도교‘(진다리)라는 긴 다리가 있었던 곳으로 전라도 사투리인 ‘질다’에서 유래해 1960년대부터 ‘진다리붓’으로 불리게 됐다는 후문이다. 지금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문 필장은 1969년부터 50여년 동안 단 한번도 이곳을 떠나지 않고 필장으로서의 외길을 걸어왔다. 필장 분야에서 그는 단연 독보적이다. 1995년 제25회 광주시 공예품대전 최우수상을 수상한데 이어 제25회 전국공예품대전 은상으로 통상산업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2000년대 들어 그는 중소기업청장과 국무총리 표창 및 대한민국 전통공예 대전 동상 수상 등 다양한 이력이 더해졌다.
대한민국 부제작 기능 전승자 99-1호와 대한민국 붓제작 신지식인 03-75호로 지정돼 있다.
칡넝쿨로 만든 갈필(葛筆)과 선조들이 가장 흔하게 썼던 것으로 볏짚으로 만든 고필(稿筆)을 복원한 데 이어 영아의 머릿결을 활용한 태모필(胎毛筆)과 모친의 머릿결을 활용한 모유필(母遺筆)을 모두 복원해낼 정도로 필장 분야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됐다. 모유필과 관련해 그는 머리카락은 한번 자르면 끝이 죽기 때문에 쓸 수 없는데 마침 모친의 머리카락은 낭자머리로 끝이 살아 있었다. 이 머리카락을 하나 하나 일일이 펴서 만든 것이 모유필이었다.
이외에 그가 국내에서 단연 최고임을 알 수 있게하는 이력은 더 있다. 노동부 산하 한국산업인력공단이 2013년 선정한 명예의 전당 헌액인에 뽑혀 글로벌진흥원에 전시 중이다. 이 헌액인 선정은 전국 2000명 대상 중에서 20명을 선정한 것이어서 의미를 더한다.
또 그는 대나무로 만든 죽필과 고필 부문 특허 2가지도 취득했다. 국내에서는 붓과 관련 특허를 2가지 취득해 확보한 사람은 문 필장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때 그의 붓들은 고향인 장흥 기념관으로 기증돼 영구 보관할 기회가 오는 듯했다. 그의 모교인 장흥 장평동초등학교에 기념관을 만들기로 했으나 당시 추진하던 군수가 선거법 위반으로 낙마하면서 물거품이 된 이후 아직 영구보존 장소를 찾지 못했다. 이후 다시 기념관을 추진했으나 군수가 바뀐 뒤 광주시 문화재라는 이유로 난색을 표하면서 좌초됐다.
부인과 아들을 뺀 전수자를 찾지 못해 맥도 끊길 위기에 처해 아쉬움도 커지고 있다. 중국과의 교역 이후 중국산의 범람으로 붓 시장이 잠식된데다 컴퓨터의 등장 등 외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침체에 빠져 여러모로 근심이 커지고 있다.
"붓 경기가 좋았을 때는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이었죠. 박 대통령이 붓글씨를 썼고, 그것을 선물로 주면서 중흥시켰다고 볼 수 있어요. 아마 1960년대 초부터 1969년까지로 대통령이 필묵 세트를 마련해놓고 줄 일이 있으면 그것을 주곤 했습니다. 붓을 만들어놓으면 다 나갔으니까요. 요즘에는 중국산이 국내 붓시장을 차지하면서 전수자들도 밥을 먹고 살기 힘들게 됐죠. 그러니 누가 배우려고 하겠어요."

그에 따르면 전수자로 들어와 배우는 사람들에게 적어도 매달 150만원에서 200만원은 족히 지급해야 배운다는 설명이다.
문상호 필장이 붓에 입문한 계기는 우연하게 찾아온다. 군대를 제대한 후 시골에서 1년여동안 농사를 지었으나 적응이 되지 않아 1967년 광주로 올라와 월산동 까치고개 인근 거주하다가 1969년 현재의 집을 구입하면서 시작된다. 집을 구입할 당시 열한 집이 세들어 살고 있었는데 이중 붓을 만드는 입주자와 만나면서다. 애초 이 집은 목축업을 위해 전 주인이 지었는데 우사를 방으로 개조해 세를 놓은 집이었다. 이곳 백운동 일대에서는 조선 후기부터 족제비 꼬리털을 이용한 황모붓과 노루 겨드랑이 털을 이용한 장액붓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때 젊은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이발소 등 직업이 별로 없었던 점 또한 그가 붓을 선택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는 설명이다. 붓을 배울 당시 겨우 밥만 먹고 살았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밤 10시까지 배웠다고 술회한다.
문 필장은 박순이 개발한 양호필의 제작기법을 충실히 전수받은 최유일에게 1969년부터 붓 제작에 필요한 재료의 선택 및 철저한 공정을 익혔기 때문에 기본기가 탄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붓 침체의 단면을 가감없이 들려줬다.
"문화재들에 매달 금전적으로 100만원을 지원하는 것과 동구 예술의거리 소재 보림필방에서 붓을 판매하는 것으로 그럭저럭 생활을 해가고 있어요. 1990년대만 해도 서예원이나 미술학원이 대기할 정도로 수요가 많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서울은 동사무소 내 문화센터에서 서예를 운영하다보니 그런 대로 유지되지만 광주는 동사무소 문화센터내 서예반을 운영하는 곳이 아마 다섯군데도 안됩니다."
장흥 기념관이 수포로 돌아간 뒤 광주 남구에 기념관을 제안한 상황이다. 기념관이 성사되기 전까지는 지금의 자리에서 전시를 끌고 갈 수밖에 없어 어려움을 토로했다.
"1990년대 초부터 만든 붓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잘못 보관하게 되면 좀이 다 먹어 못쓰게 됩니다. 예를 들어 모필을 습기에 노출하게 되면 모두 좀을 먹게 되는 데 이런 것을 말하죠. 저처럼 다양한 붓을 전시하고 있는 사람은 국내에 거의 없을 겁니다. 아마 유일할 거예요. 다른 사람은 한가지만 붓만 만들기 때문에 저처럼 다양한 붓을 전시하기 어렵죠."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붓에 대한 그의 시각에도 변화가 감지됐다.
"필장으로서의 삶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요즘 붓에 집중하는 제 삶이 재미가 있어졌습니다. 예전에는 돈을 벌기 위해 붓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일상에서 붓 만드는 것 그 자체를 즐기고 있다고 보면 돼요."
그가 말하지 않아도 붓의 미래는 어두워 보였다. 수요가 갈수록 없어지고 있어서다. 이런 답답함 속에 그는 기증 등 대안마련에 고심중이다.
"관리를 잘못하면 썪을 뿐 아니라 좀이 슬죠. 우선 상을 받은 작품들만 보관, 전시하고 있는데 모두 수개월 걸려 만든 작품들이에요. 통상산업부에서 새롭게 개발한 붓을 위해 마련된 공예품 전시와 문화재청에서 선조들이 제작한 것을 재현하기 위해 연 전승공예대전에서 최고를 차지한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죠. 앞으로 기증 등 대책을 세우고자 합니다."

고선주 기자 사진=최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