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까머리 10대때 수학여행으로 가본 강원도. 그리고 내 삶에서는 한동안 강원도는 지워졌다. 그러다 서른 전후 춘천시 남산면 소재 강촌과 마흔 전후 강릉을 찾은 게 전부였다. 이때 강원도의 기억이 잠시 되살려졌지만 금세 다시 지워졌다. 기억하는 것도, 지워지는 것도 한 순간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우리네 삶이 어쩌면 기억하고 지워내기의 연속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원도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너무도 먼 곳, 촘촘하게 일상에 묶인 내 삶의 여력으로는 강원도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주워담기가 역부족이겠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삶은 순식간에 10년을 또 지워냈다. 그렇게 10년의 시간은 다시 흘러갔다. 딱 10년이 지난 올 여름, 강원도로의 일탈을 감행했다.
강원도를 찾는다는 것은 내게는 일탈과 같은 무모한 잠행(?) 쯤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을까. 지난 8월17일부터 20일까지 3박4일 강원도로 떠났다. 광주에서 강원도 정선까지 300㎞가 넘는 거리였다.
더욱이 초등학생 2명과 함께 떠나는 길인지라 휴게소를 지나칠 수 없어 소요시간은 더 걸렸다. 오전에 출발했는데 오후 4시쯤 정선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태어나서 가장 긴 거리를 운전한 날이었다. 광주에서 뱅뱅 돌며 사는 삶이라 강원도행은 끝에서 끝을 가는 듯했다. 그나마 목포나 진도, 여수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로만 듣던, TV나 인터넷에서 보았음직한 곳들을 패키지여행처럼 눈도장 찍어볼 심산이었다. 아이들은 이런 패키치식 관광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하이원리조트(힐콘도)에 머물며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 하루종일 수영(바다샘)을 즐겼다. 가는 날이 장날이듯 하늘마저 무심하게 비를 뿌렸다. 실외 수영장에 풀어놓았더니 아이들은 더 신나게 물놀이에 빠져들었다. 아이들이 방심한 틈을 타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맛집 투어다. 블루리본에 수록된 맛집을 제안했다. 아이들이 OK 사인을 내자 마자 패키지는 시작됐다. 늘 우리집 패키지는 들쭉날쭉하다. 종합계획서를 짜기 보다는 유명한 곳부터 훑어내려가는 방식이다.
우선 동해안을 보기로 했다. 강원도가 땅이 넓어 정선에서도 태백을 지나 동해시를 거쳐 동해바다에 도착하는데 70㎞가 넘는 구간이었다. 만만치 않은 구간이었지만 강원도까지 와서 동해안을 못보고 가면 후회할 것 같아 동해시 묵호항을 찾았다. 가는 내내 차창으로 보이는 산세(山勢)는 광주전남의 산세와는 판이하게 급이 달랐다. 태백산맥이 남북으로 뻗은 곳, 이곳은 높고, 가파르고, 빽빽했다.
묵호항은 항구가 마치 통영 강구항에서 보았던 곡선을 떠올리게 했다. 묵호항 일대에는 어달해변을 비롯해 서퍼들로 붐비는 대진해변 등이 펼쳐져 있다. 그곳을 찾아간 날도 서퍼들이 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파도가 높지 않아 서퍼들의 애간장을 태우는 듯 보였다. 짙푸른 바다는 서해안과는 다른 풍경을 연출했다. 일상에 찌든 심신이 조금은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대진해변까지 갔다 오느라 때늦은 오후 다시 묵호항으로 돌아와 수변공원 인근 50년 전통의 부흥횟집에 들렀다. 가격대비 만족도가 높았다.
묵호항으로 가는 길에 추전역(杻田驛)에 들렀다. 추전역은 태백시 화전동에 소재한 역으로, 국내 역사(驛舍)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무려 해발고도가 855m나 된다. 영암 월출산 정상에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해보면 추전역이 얼마나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 들렀을 때도 간간히 사람들이 찾고 있었는데 그들도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역이 궁금했을 것이다.
1973년 10월16일 태백선 철도가 개통되자 그해 11월10일 역사가 신축돼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했다하니 그 역사만도 50여년에 이르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높은 곳으로 열차가 다닌다는 게 신기했다.
아이들과 동행하면 수영 외에도 반드시 방점을 찍어야 하는 필수코스가 있다. 바로 드라마 촬영지다. ‘송송 커플’ 하면 생각나는 드라마가 있다. KBS 2TV 특별기획 드라마 ‘태양의 후예’다. 태백시 통골길에 가면 우르크 태백부대를 촬영한 촬영지가 있다. 태백시가 한창 관광지로 다듬느라 도로포장 중이었다. 방문객들을 위해 도로 면에 태양의후예를 명기해 찾기 쉽도록 해놓았다. 비탈길을 한참 올라가자 드라마 속 촬영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메디큐브와 건강클리닉, 성당키친, 군 막사, PX(매점)가 자리하고 있었다. 드라마 속 현장을 살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태백시에는 반드시 눈도장을 찍어야 하는 코스가 또 있다. 낙동강 발원지가 있어서다. 태백시 황지동에 자리한 황지연못이 그곳이다. 황지연못은 태백시 도심에 자리해 있지만 해발 680m나 된다고 하니 이 일대가 얼마만큼 산악지대인가를 직감할 수 있다.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자리매김한 듯 했다. 휴식도 취하며, 연못의 의미도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영산강 발원지인 담양 용소를 생각하면 황지연못에 대한 이해를 쉽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다만 주차문제는 이곳의 큰 고민으로 보였다.
가족 외에 아이들과 동반했다면 한국청소년안전체험관은 반드시 방문할 필요가 있다. ‘365세이프타운’으로 불리는 이곳은 안전체험을 통해 안전의식을 북돋울 수 있는 곳이다. 위기탈출 넘버원을 알고 있다면 안전체험들을 해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매우 유익하다. 산불과 지진, 풍수해, 설해, 대테러, 안전벨트, 심폐소생술 등 안전을 온 몸으로 느껴볼 수 있는 곳이었다. 여행을 가면 부모들이 대개 리더하지만 이곳은 아이들이 리더하는, 유일한 곳이었다.
광주로 돌아오기 전날 그 유명하다던 강원랜드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호사도 누렸다. 그 어떤 불꽃놀이와는 차원이 달라 입이 쩍 벌어졌다.
일정이 빠듯해 강원도의 속살까지 알게됐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분명한 점은 강원도가 한결 더 가까이 다가왔다는 점은 분명하다. 강원도의 다른 지역도 몸과 마음으로 기억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려본다.
고선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