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한참 겨울을 나고 있다.
유럽의 겨울은 지역에 따라 편차는 있으나 우리보다 2개월 빨리 시작하고, 2개월 정도 더 길다.
비수기로 분류되는 11월 하순과 12월 초순에 떠나 둘러본 유럽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이 시기에 다녀올 수 밖에 없었던데는 ‘마감’ 인생 덕분이었다. 실행에 옮기고자 하면 매달 디자인비엔날레처럼 특별하고 규모있는 예술행사가 열리거나 필자가 맡고 있는 매거진 마감이 맞물린 탓이다. 실제는 몸과 정신이 다람쥐 쳇바퀴돌 듯 최적화돼 있는데 그것을 무너뜨리고 일상을 벗어날 수 없는 구조였을 것이다. 지난해 4월부터 계획을 세웠으나 7개월이나 실행을 하지 못한 이유다. 엄두가 나지 않은 것도 그 이유다. 몇차례 뒤로 밀쳐진 뒤 계절좋은 가을에 떠나가볼까 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10월을 넘기고 11월에 접어들자 유럽이 겨울인데 방문해도 좋을까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한국도 겨울 바깥 나들이는 중무장을 하고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유럽은 우리보다 더 추운 지역이 널려있다. 이것 저것 재지 않고 그냥 막연한 상상으로 떠난 길이었다. 더욱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집안 형님 한 분이 계셔 그곳을 거점 삼아 둘러보기로 하고 과감하게 실행에 옮겼다. 기대반 걱정반일 수 밖에 없었다. 단 한번도 밟아보지 않은 미지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독일을 비롯해 프랑스 남부,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등지를 돌며 유럽의 대예술가와 그들의 자취가 서린 유무형 자산들, 찬연한 역사를 자랑하는 종교시설, 길거리에 포진한 400∼500년된 건축물, 그리고 각 나라의 대표적 문화유산과 자연유산 등을 접할 수 있었다. 유럽인들의 지혜가 서린 삶과 그들의 일상 속 절제가 서린 건축미학, 전통을 함부로 버리지 않고 현대문명과 함께 조화시켜가며 발전을 추구해온 그들의 정신적 단서를 네차례에 걸쳐 쫓아가본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상공에서 내려다본 그곳의 풍경은 현대적 도시로 눈에 들어왔다.

우리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공항에 도착해 출국장에 늘어선 기다란 줄이 몇겹으로 되면서 조금 복잡하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사람 사는 곳은 모두 마찬가지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런 단편적인 것으로 독일과 유럽을 평가할 수는 없다.
당연히 400∼500년 된 건축물들이 즐비한 상공을 비행할 수는 없다. 앞서 밝힌 것처럼 우리식 개념으로 접근해 보자면 구도심이 아닌, 신도심 혹은 그 외곽에 공항이 자리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다. 프랑크푸르트의 상공에서 바라본 그곳의 모습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인상이 들었다. 그것은 아마 고층빌딩을 위시로 한 현대식 빌딩이 많이 보인 까닭에서다.
그러나 그곳에서 조금만 발을 떼면 찬연한 유럽의 건축문화를 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앞서 밝힌 것처럼 유럽은 400∼500년된 건축물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국가와 사회가 보존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 건축물이 여전히 활용되고 있다고 하니 경이로운 느낌이 들었다. 여기다 유럽에서 최초로 지하철이 개통됐다는 헝가리 부다페스트나 체코 프라하 등 유럽의 웬만한 도시들은 고도 제한이 있어 고층 건물이 그리 많지는 않아 보였다. 도시의 환경이나 미관을 고려한 정책 덕분이다. 길거리 건축물들의 간판이나 이정표 또한 세련되고 아주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그들의 세심한 접근 하나 하나가 부러웠다.
튀지 않으면서 은은함을 유지하고 전체 도시미관과 조화를 최일선으로 고려한 도시야경은 압권이었다.

프랑스 남부 도시 스트라스부르 시내 전경

헝가리 부다페스트 도나우강에서 바라본 야경이나 체코 프라하의 도심 야경은 들쭉날쭉하고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불빛으로 오히려 산만한 도시풍경의 민낯을 노출하는 우리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어떤 건물이든, 풍경이든 전체 미관에 방해되는 것은 철저하게 절제해가며 도시발전을 추구해나가는 그들의 지혜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과하게 표현해보자면 거리 어디로 카메라 앵글을 가져다 대도 인생샷 혹은 잊혀지지 않을 풍경을 득템할 수 있을 만큼이었다. 우리와 무조건 다른 이국의 풍경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의 건축물에는 개성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유럽 건축물을 단순하게 개성적이라고 평가한다면 그것 또한 너무 협소한 접근이라고 할 밖에 없다. 개성적이면서도 그 오랜 시간을 지탱해왔는데도 여전히 튼튼하고 쓰임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포항 지진으로 인해 건축물의 수명 혹은 내진 설계에 부쩍 관심이 모아졌지만 유럽이 세운 건축은 문화의 정수로 손색이 없다.
어떤 특정 건축물을 두고 할아버지와 손자·손녀간 대화가 자연스럽게 통하는 곳은 유럽 밖에 없다.

30년 안팎이 수명이라는 우리의 건축문화와는 분명한 차이가 나 보였다. 할아버지가 보고 온 건축물을 손자·손녀가 알아듣고, 손자·손녀가 보고 온 건축물을 할아버지가 알아듣는 곳이 유럽이라고 하니 그들이 얼마만큼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가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500년전 풍경이 21세기의 풍경이 되고 있다 하면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현대문명의 발전에 전통이 방해가 된다는 시각이 한참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뜨리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트램(Tram)을 타고 프라하의 찬연한 건축문화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도 큰 행운이었다. 트램 뿐만 아니라 2층 버스, 마차 등 다양한 교통수단으로도 도심지를 둘러볼 수 있다고 하니 우리와는 너무 대조적인 그들의 시스템이 한없이 부러웠다.

체코 프라하 도심을 오가는 트램 속에서 손님들에게 와인 한잔씩이 제공되고 있다

특히 종교시설은 유럽의 역사 그 자체였다. 비엔나를 상징하는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 양식 건물인 비엔나 슈테판 대성당과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대성당 등은 1000여년의 세월을 거뜬히 지탱해왔다. 이처럼 유럽에서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종교시설과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골목마다 이런 건축물들이 차고 넘친다. 유럽은 철저하게 전통을 기반으로 현대를 쌓아올렸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유형적 자산 뿐만 아니라 무형적 자산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크리스 마켓을 꼽을 수 있다. 여기에는 그냥 장터가 아닌 그들의 얼과 혼이 서려있다는 생각에서다.

체코 프라하 구시가 중앙광장 및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등 각 도시 크리스 마켓 풍경과의 만남은 이채로웠다. 보통 유럽에서는 11월 하순부터 12월까지 크리스 마켓이 펼쳐진다. 우리네 간이 시장과 같은 곳이다. 크리스마스 장식은 물론이고 각 도시의 특산품과 장신구를 둘러볼 수 있는 곳으로, 유럽 최대 명절이나 다름없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었다. 여기서는 크리스마스 물품을 구입할 수 있을 뿐더러 다양한 먹거리도 맛볼 수 있어 눈과 입과 전혀 심심하지 않다. 덤으로 그들의 놀이문화와 일상의 휴식, 사람간 소통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온갖 조명을 밝힌 그곳의 야경은 또 다른 볼거리다. 크리스 마켓은 겨울 유럽을 찾은 사람들에게는 특별 보너스인 셈이다. 크리스 마켓을 본다는 것은 유럽 역사를 보는 것이다. 크리스 마켓이 오랜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 마켓은 중세 독일에서 시작돼 전 유럽으로 전파됐다.
겨울 유럽행이 아니면 만나기 어려운 크리스 마켓을 만났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이처럼 옛것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오늘의 발전 자양분으로 삼아온 유럽이 전지구촌 문화와 예술, 그리고 시대를 주도할 수 밖에 없겠다는 느낌은 당연한 귀결로 받아들여졌다.

고선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