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솜을 한 움큼 쥐었다.

손바닥에 감기는 포근함이 그냥 좋다. 맹위를 떨치던 겨울 추위도 이 앞에서는 한 풀 꺾인다. 문익점 선생도 이런 기분이 들었을까.

대구의 복잡한 도심에서 서쪽으로 빠져나와 20여 분 도로를 시원스레 달리다 보면 한가로운 시골 길이 나타난다. 소담한 산자락을 지척에 두고 고즈넉한 한옥 마을이 소박한 자태를 드러낸다. 대구 달성군 화원읍 본리1리 인흥마을. ‘본리에 있는 남평 문씨의 집성촌’이란 뜻의 남평문씨세거지이다.
　
문익점의 18세손인 인산재 문경호가 1872년 처음 이곳에 터를 잡았다. 마을 앞 목화밭은 선조인 문익점 선생을 기리기 위해 조성됐다. 현재 조선 말기의 전통 가옥 9채와 정자 2채 등이 남아 있으며 대구 민속문화재 3호로 지정돼 있다. 옹기종기 모인 마을의 첫인상은 ‘평온’ 그 자체다. 광주에서 몇 시간을 달려와 힘들고 지친 마음이 절로 편안해질 정도였다.

목화밭을 지나면 문중 자녀들이 학문을 논하던, 첫 번째 고택 ‘수봉정사’가 한눈에 보인다. 그리고 솟을대문 앞에 바위 하나가 놓여있다. 조선 시대에 말을 타고 내릴 때 양반은 하인의 등을 밟고 내렸는데 문씨 집안은 바위를 두고 오르내렸다고 한다. 야트막한 뒷산과 목화밭, 돌담길이 이루는 경치는 사진 대전에 출품할 풍경 사진을 찍는 작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문씨 마을을 나와 더 서쪽으로 향했다. 10여 분을 지나니 낙동강의 시원한 경치 아래 설치된 ‘사문진 나루터’가 보인다.

낙동강과 금호강이 교차하는 곳. 조선 전기 하천 교통의 요지이자 대구로 통하는 관문역할을 수행했던 곳. 어깨에 한가득 짐을 진 보부상과 지게꾼들의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그 입구를 바라보고 있자니 옛사람들이 낑낑대며 육중한 물건 하나를 옮기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사문진 나루터는 우리나라에 피아노가 첫발을 디딘, 역사적인 곳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온 피아노를 짐 배에서 힘겹게 내리던 당시 사람들은 난생 처음 본 큰 물건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 하여 ‘귀신통’이라 불렀다.

1900년 사보담 선교사 부부(1874∼1908)는 우마차 길도 제대로 없는 조선에 개척교회에 필요했던 피아노를 낙동강 짐배를 이용해 대구에 들여왔다. 일본인이 상권을 장악한 부산과 대구는 당시 선교사들의 거점이었다. 이를 근거로 달성군과 달성문화재단은 2011년부터 ‘달성 100대 피아노’ 축제를 매년 연다. ‘귀신통 납시오’란 뮤지컬 등 피아노를 소재로 한 공연들도 풍성하게 펼쳐진다.

사문진 나루터 공원에는 다양한 피아노 모양의 조형물과 곳곳에 앉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의자들이 비치돼 있다. 의자 하나까지도 피아노 건반과 같이 흰색, 검은색을 교차해 칠해놓아 눈길을 끈다.

여행이란 호기심과 피로를 동반하는 것. 그러나 대구는 여행으로 몸이 피곤할 때쯤 흥미롭고 신선한 이야깃거리로 눈과 귀, 정신을 깨운다. 그만큼 이야깃거리가 넘쳐나는 곳이다.

사문진 나루터에서도 10여 분 떨어진 곳에 ‘마비정(馬飛亭) 벽화마을’이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대도시에 속하지만 대중교통이라곤 하루 8번 운행하는 군내버스가 고작일 정도로 도심 속 외지다. 그러나 60~70년대의 정겨운 농촌의 풍경에 토담과 벽담을 활용한 벽화까지 가미되면서 1년 내내 주민 수보다 관광객이 많을 정도로 유명하다.

마을 입구에서 김은숙 문화관광해설사를 만났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김 해설사는 결혼한 신랑까지도 마을로 데리고 올 정도로 이곳에 대한 애정이 깊다. 그런 그에게 기와지붕 한 장에 얽힌 이야기까지 들으니 이보다 더 생생하고 알찬 해설이 있을까 싶다.

마비정벽화마을

그는 마을이 유명해지기 시작한 때는 2012년 향토 벽화 작가인 이재도 씨가 달성군의 요청에 따라 마을 입구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면서부터라고 말한다. 이후 점차 호응을 얻게 되자 벽화 그리기는 마을 전체로 확대했고 마침내 1년여의 작업 끝에 완성됐다. 마비정 마을의 벽화는 모든 그림을 이 작가 혼자서 그려 작품 내용과 의미가 일관성이 있고 서로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김 해설사와 함께 돌담벽을 지나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니 오른쪽에 우물이 보인다. 이름은 ‘마비정’(馬飛井). 동화 속에 나올 법한 모양이다. 그 속을 들여다보니 깊고 컴컴한 게 장화홍련전 속의 우물과, 해님 달님에서 나무 위로 도망가는 오누이가 떨어질까 노심초사했던 동화속 그 우물이 생각난다.

그는 옛날부터 청도와 가창의 사람들이 한양이나 화원장을 다닐 때 이 마을을 지나며 쉬어갔다면서 사람도, 말도 피로한 여정이었지만 이곳의 물로 원기를 회복하고 더욱 빨리 달려갈 수 있었다고 한다.

마비정 마을의 유래를 유추할 수 있는 ‘천리마의 슬픈 사랑’ 이야기도 들린다.
옛날 어느 장수가 전쟁을 앞두고 이 마을에 사는 천리마 ‘비무’의 아내 말인 ‘백희’를 발견하고는 "천리마는 화살보다 빨리 달릴 수 있으니,너의 실력을 보겠다"며 화살을 쏘았다. 백희는 꽃과 약초를 구하러 간 비무를 대신해 열심히 달렸으나 화살을 따라잡지 못했다. 장수는 백희를 단칼에 베어 죽였다. 집에 돌아온 비무는 백희의 주검을 보고, 슬픔에 잠겨 마을을 떠났고, 이후 마을 사람들은 더는 비무를 보지 못했고 이들을 불쌍히 여겨 ‘마비정(馬飛亭)’이란 정자를 세워 추모하게 됐다는 것이다.

마을에는 100년이 된 느티나무와 돌배나무의 연리목, 자연과 호흡할 수 있는 대나무 숲이 있다. 정다운 마을 구석구석 옛 시골의 자취가 가득한 소박한 집들과 향토 분위기의 벽화들을 찬찬히 둘러보는 데는 약 2시간이 소요된다. 옛날부터 존재한 것이 구닥다리 취급을 받지 않고 오늘을 씩씩하게 살아가는 곳이 바로 이 곳이다.

여행의 끝자락에서 놓쳐서는 안될 곳이 있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벽화’로 유명하고 이곳을 빼놓고서는 지금의 대구를 말할 수 없는, ‘영원한 가객’으로 불리는 싱어송라이터 ‘김광석’을 기리는 거리다. 대구 도심에 있는 이 거리는 근대 골목 투어가 시작하는 ‘청라언덕’에서 도보로 약 15~20분 걸린다.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김광석을 기리는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은 중구 대봉동의 신천대로 둑길 아래 방천시장 끝자락의 350ｍ 남짓 골목이다. 노래하는 음유시인이었던 김광석은 대구 대봉동에서 태어났다. 2010년 어린 시절 뛰어놀던 신천 인근에 그의 목소리와 미소를 빌어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이 조성됐다. 벽화길에는 김광석의 삶과 음악이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지난해 85만여 명의 발길을 모으며 전국적인 명소로 떠올랐다.

골목 입구에 기타를 들고 웃고 있는 김광석 동상이 자리하고 있고, 대형 초상과 조형물 등 70여 점의 애틋한 볼거리가 골목을 채운다. 주말이면 ‘제2의 김광석’을 꿈꾸는 아마추어 가수들의 버스킹 공연도 열린다. 거리의 입구에 있는 다리를 꼬고 기타를 치며 읊조리듯 노래하는 그의 동상 앞에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골목길을 걷다 보면 통기타를 치면서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김광석의 얼굴, ‘서른 즈음에’,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등 노래 가사가 담긴 벽화가 있다.

대구를 여행하고 나면 골목길을 사랑하게 되고,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건 일상을, 내 삶을, 나를 연결하는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모두 사랑하게 된다는 말과 같다. 잠시 깃들었다 가는 여행임에도 마음 저 밑바닥 어딘가가 뿌듯해졌다. 이야기가 넘치는 도시, 과거와 현재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곳, 대구가 가진 힘이 아닐까. 그리워할 것을 마음에 꽉꽉 채워서 돌아간다. 빛바랜 과거가 현재의 추억이 되어 꿈틀거리는 대구에서.　

박사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