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잠시 뒤로 미뤄졌을 뿐,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지난 2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린 IBF 아시아 2대 타이틀 매치에서 한국 미들급 챔피언 김주영(28) 선수와 판정까지 가는 접전 끝에 아쉽게 패한 광주 출신 김주헌(34·동천동 ‘김주헌 챔프복싱 클럽’ 관장) 선수는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면서 의지를 불태웠다.
김주헌에게 이번 경기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아시아챔피언 타이틀(WBA 슈퍼웰터급 PABA 범아시아 챔피언)보다 한 단계 높은 타이틀로, 비록 목표 달성에 실패했지만 그는 광주지역 유일한 세계급 타이틀을 소유한 복서다.
그가 복싱에 입문한 계기는 만화책이다. 중학교 3학년 때 우연히 ‘아웃복서’라는 만화책을 보다가 권투에 관심을 갖게 됐고 바로 집 앞에 있던 복싱 체육관에 등록했다.
하지만 그의 복싱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3개월 정도 관비를 못 냈어요. 그래서 운동을 그만두려고 했죠"
하지만 복싱에 대한 열정이 높고 남들보다 뛰어난 운동신경을 가진 김 관장을 눈여겨 본 광주복싱체육관 임홍진 관장이 회비 대신 체육관 청소와 업무를 도와주는 조건으로 복싱을 계속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그는 이렇게 복싱을 이어 갔고, 첫 공식대회인 ‘전국 아마추어 신인전’에 출전한다.
하지만 승승장구 할 것 같았던 그의 경기는 ‘8강’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후 메이저 전국대회를 3차례 출전했지만 모두 8강 문턱에서 주저 앉았다.
2002년 결국 그는 복싱계의 텃세와 판정에 불만을 품고 글러브를 던져버렸다.
2년 여의 공백기를 지나 2004년에 도민체전 출전 제의가 들어왔고, 4개월 가량의 훈련으로 웰터급과 미들급에서 금메달,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어 프로복서의 길을 가기 위해 2005년 MBC 전국프로복싱 신인왕전에 출전했다.
1차 예선에서 2라운드 KO 승리, 2차 예선에서는 4라운드 3-0 판정승을 거두고 준결승에 올랐다. 준결승 상대는 김주태(부산거북) 선수로 지난 대회 준결승 진출자였다.
준결승전에서 2라운드 경기 중 버팅으로 김주태의 눈이 많이 찢겨나가면서 시합이 중단됐고, 결국 2-1 판정패 했다. 이기고 있다고 생각되는 상황에서 심판진의 판정은 억울했다. 그래서 또다시 권투를 접게 된다. 이 때까지의 프로전적은 3전 2승 1패(1KO)였다.
이후 사회에 나와 배달일을 하다가 2008년 군대에 입대해 중사로 제대했고, 2012년 1월 주변 복싱인들의 권유로 광주 전일복싱체육관에서 코치 근무를 시작했다.
김 관장은 "다시는 글러브를 끼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복싱의 매력에 자꾸만 돌아보게 된다"면서 "지금은 복싱이 평생을 함께 할 동반자와 같은 느낌이다"고 말했다.
이어 "오전 9시 30분부터 저녁 11시 30분까지 체육관에 머무르면서 시간의 소중함을 알게 됐고,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복싱으로 체육관 관원들과 인간관계를 쌓으며 지도자로서 보람도 느꼈다"고 회상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그는 또다시 선수로서 링 위에 오르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다시 활동하기 늦은 나이지만 ‘해보자’ 라는 생각으로 코치생활과 운동을 병행했다. 긴 근무시간 때문에 수면 시간을 줄여가며 운동에 매진했다.
그는 "출근하기 전에 로드워크, 점심시간에 복싱훈련, 쉬는 날에는 원정 스파링을 다니며 시합을 준비했다"면서 "정해진 하루, 나아가 일주일을 보다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나 자신을 강하게 밀어붙였다"고 회상했다.
선수로 복귀하고 6개월 뒤인 2014년 첫 시합을 가졌다. 일반인 생활체육복싱대회에서 이벤트성으로 마련된 전 아마와 프로선수가 출전할 수 있는 챔피언부에 출전한 것이다. 이어 7월 망상해수욕장, 10월 서울동대문구 대회에 출전해 슈퍼웰터급에서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 과정에서 그는 ‘2015 MBC전국프로복싱 신인왕전’이 3년 만에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의 가슴 속에 항상 한으로 남아 있던 2005년 MBC신인왕전을 생각하며 맹훈련에 돌입했다.
김 관장은 "코치와 선수 생활을 병행하면서 기량을 끌어올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다시 후회하는 시합을 하고 싶지 않아 경기 1개월여 전에 코치직을 그만 두고 준비했다"고 말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오전에는 10㎞ 로드워크, 오후에는 복싱 훈련, 야간에는 기술과 웨이트 훈련을 했다.
그는 MBC신인왕전 김현섭 선수에게 3:0 판정승을 거두며 예선을 통과했다. 준결승전 정승근 선수와의 승부에서도 3:0 판정승을 거뒀다.
그는 "준결승이 끝나고 심한 몸살감기로 운동을 못해 시합 4일 전 계약 체중을 5㎏이나 넘긴 상태였다"면서 "시합을 포기할까도 고민했지만 김광현(페더급 전 42대 한국챔피언)씨가 많은 조언을 해줬다"고 말했다.
승부에서 지더라도 모든 걸 쏟아보자는 생각으로 4일 동안 진통제를 먹으며 체중 감량과 훈련에 임했다.
결승전은 4라운드 시합이 아닌 6라운드 시합으로 김석현 선수와 맞붙었다.
그는 시합 전 영상을 분석한 대로 거리를 주지 않고 오른손 쨉과 왼손 카운터 펀치를 적중시키며 유리하게 경기를 이끌어 갔다. 결과는 6라운드 3-0 심판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뒀다.
그는 "10여년 동안 가슴 속에 맺힌 한이었고, 복싱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꼬리표를 지웠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당시 우승을 돌아봤다.
그리고 그해 5월 한국프로복싱연맹 슈퍼웰터급 챔피언으로 등극했고, 2016년 아시아 무대에 도전, WBA PABA 범아시아 챔피언에 올랐다.
이후 그는 광주 동천동에서 ‘김주헌 챔프복싱 클럽’을 운영하며 선수 양성과 시민들의 체력 증진에 힘을 쏟고 있다.
그는 "나이가 많아 선수로서 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 "하지만 갈 수 있는 최대한까지 올라가 보겠다"고 말했다. 이어 "선수생활을 마치면 보다 많은 시간을 체육관에서 선수 양성과 시민들의 건강을 위해 쓰겠다"고 덧붙였다.

전라도인 admin@jld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