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이 행해왔던 향약은 민족정신의 바탕이죠. 저는 예향 광주의 뿌리가 올바로 정립되지 않은 슬픈 현실 속에서도 향약 계승이라는 마지막 목표를 이뤄야 눈을 감고 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광주 광산김씨 대종중의 고문을 맡고 있는 김용규씨(87)의 말에서 향약 발전과 계승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읽을 수 있었다.
김 고문은 공동체의 모범적 모델이자 조상들의 자치 법규였던 ‘향약’(鄕約)의 온전한 계승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온 것이다.
지난 15일 오전 ‘광주 향약’에 관한 자료를 모아왔다는 김씨를 빛고을아트스페이스 6층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날 그로부터 역사 교과서에서 접했던 향약을망라해 광주 향약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6년째 광산김씨 대종중고문을 맡고 가족간 화합을 위해 앞장서왔다는 그는 매
일 최고기온을 경신하는 폭염이 지속되는 가운데 각이 잡힌 삼베 한 벌을 단정히 차려입은 모습으로 필자와 대면했다.
그의 옆에 놓인 분홍색 보자기로 곱게 묶인 보따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궁금증을 꾹 참고 그의 말을 먼저 경청하기 시작했다.
그는 인터뷰 도중 꼼꼼하게 묶은 보자기를 풀었다. 거기에는 여지껏 수집해온 향약에 관한 고서와 관련 자료들이있었다. 또박 또박 설명을 이어갔다.
한문을 해석해 나가는 그는 거침이 없었다. 1931년생인 김 고문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6·25 전쟁에 참전해 거마전투를 현장에서 겪었으며 태평양 전쟁을 비롯해 여·순사건, 1·4후퇴를 지낸 세대다. 그야말로걸어 다니는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인 셈이다.
국가유공자인 그는 일제강점기에 소학교를 졸업한 뒤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한다. 이후 부친으로부터 배운 한자를 이용해 현재까지 한문으로 기록된 고서를 꾸준히 번역해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배움의 깊이보다는 애정이 훨씬 중요하다는 점을 언급했다. 이런 마음가짐 때문일까. 어른으로 존중받아야 될 나이임에도 자신을 낮춰 평가하고, 시종일관 필자를 젊은 선생이라 부르는 그의 모습에서 양반의 자세와 겸손함이 묻어났다. 김 고문은 청년 시절 한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6·25전쟁에도 참전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살아 돌아온 그는 화순 모후산 인근에 살던 부모님을 모시고 자녀들과 함께 광주로 거처를 옮겼다.
제도권 교육과정을 채 끝내지 못해 미련이 남았던 김 고문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과감히 광주로 이사했고, 이후 농사일에 매진해 3남 2녀를 키워냈다고 술회했다. 그러다 김 고문은 꾸준히 모아놓은 옛 선조들의 사료를 바탕으로 ‘광주 향약’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현재 향약 홀기, 광주읍지, 광산지, 호남절의록 등 조상들이 모아 놓은 자료들을 수집해 보관, 연구해왔다. 자손으로서 선조들의 행적을 보존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지역의 저명한 향토문화연구가들과 세미나를 여는 등 광주 향약 발전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향약은 유교적 규범과 마을 주민들의 약속을 토대로 인간이 살면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자세를 규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적 가치가 높고 계승해 나갈 의미가 있는 우리 고유 문화죠. 조선 초기 율법도 없었던 세상에서 향약을 기반으로 정치의 발전, 자주 국방을 이뤘어요. 이렇게 남겨진 기록들을 후학들에게 제공해 현 시대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고 선현들을 기려야 될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이렇듯 향약 계승에 대한 애정과 신념이 깊은 그는 광주 향약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칠석동 향약을 행한 김문발(1358~1418) 선생의 17대손 직계손이기도 하다. 김문발 선생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졸기에 따르면 사람됨이 청렴하고 간묵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향약의 효시인 칠석동 향약을 만든 사람이자 조운법의 토대를 다지기도 했다. 김 고문이 향약에 온힘을 쏟을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그는 다시 설명을 이어나갔다. 향약은 성리학이 널리 성행한 조선 중기에 본격적으로 실시된 ‘향촌자치규약’을 의미하며 이웃 간 서로 돕고 의지해 정신적 유대를 형성, 마을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점이 핵심 가치라는 것이다.
전통 사회에서 백성들은 생업인 농사를 짓기 위해 두레와 품앗이, 계를 했으며 격조 높은 생활문화를 가꿔 나기기 위해 수령이나 명망있는 지역 내 사림 대표자 혹은 선비들을 중심으로 전 향민을 대상으로 교화적 성격이 강한 약속을 마련해 지역 자치규약인 향약을 시행하고 지켰다 한다. 향약은 유교적 예절과 풍속을 향촌 사회에 보급해 도덕적 질서를 확립하고 미풍양속을 진작시키며 각종 재난을 당했을 때 상부상조하기 위한 규약을 각 고을별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지방자치제로 불린다.
이러한 향약의 대표적인 강목으로는 좋은 행실은 서로 권장하도록 하는 ‘덕업상권’(德業相勸), 잘못을 서로 고쳐주고 규제하는 ‘과실상규’(過失相規), 좋은 풍속은 서로 교환한다는 ‘예속상교’(禮俗相交), 어려운 일을 당하면 서로 돕는다는 ‘환난상휼’(患難相恤)이 있다.
김 고문은 향약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향약은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해 신분제의 위계를 유지하는데 목적이 있지만 그 안에서 이웃 간 서로 돕고 의지해 정신적 유대를 형성하고 마을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한 점은 재조명해야 할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향약은 중국 송나라 1076년 창시된 남전여시향약(藍田呂氏鄕約)이 그 기원으로 이후 주자에 이르러 주자증손여씨향약이 재정립됐다. 주자향약은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실려 고려 말에 유입됐으며 중종 12년이던 1517년에 이
르러서야 조광조를 대표하는 사림들에 의해 전국적으로 실시됐다.
사실 우리 고장인 광주 남구 칠석동에서는 그보다 100여 년 앞서 조선 초기 1418년 이전에 이미 향약을 시행했다 한다. 김 고문은 "‘광주읍지’ 재학편에 황해감사를 지낸 부용김문발이 광주에서 최초로 향약을 설치하여 행했다는 기록이 나온다"고 말했다.
조선시대 초 전라·황해 감사를 지낸 부용 김문발 선생은 태종 11년인 1411년에 병환으로 관직을 은퇴하고 고향인 광주 칠석동에 내려와 부용정을 짓고 머물면서 중국 향약을 참조해 향약의 규약을 만들고 이를 지켰다 한다. 이러한 향약을 부용정 향약이라 부른다.
같은 마을 출신인 이선제(1390~1453) 선생이 양과동 향약을 만들어 시행하는데 이 향약이 오늘까지 전해 오고 있다. 양과동 향약은 그 당시 광주 지방의 유력 가문들을 중심으로 형성돼 지역사회에서 지배력을 확장했던 가문들의 실제 모습이 투영돼 사료적 가치가 크다 할 수 있다.
향약의 규정은 마을마다 다를 뿐 아니라 사람마다 다르게 불러 칠석동 향약을 비롯해 부용정 향약, 양과동 향약, 광주 향약, 광주향 조약, 광주 향약 등으로 명명되기 때문이다.
김 고문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향약을 발전시키는데 있어 한데 아울러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남구 칠석동 향약이 광주 향약의 효시인 만큼 서로 다른 향약을 한데 모아 ‘광주 향약’으로 통합하는 작업이 필요하죠. 이를 위해서는 흩어져 있는 사료를 모아 보존·계승해나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김문발 선생이 돌아가신지 올해 600년이 됐다면서 향약 계승에 대한 입장을 드러냈다.
"다른 지역에서는 기념관을 세우는 등 향약을 보존해오고 있어요. 남구 칠석동이 향약의 태동지이기에 역사적 가치는 실로 상당하죠. 국가차원에서 선조들의 빛나는 문화를 기리고 향약 계승을 위한 공간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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