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밤이 되기를 기다린다. 사방이 어두워지면 연습실에 작은 핀 조명 스위치를 올린다. 빛 아래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확인한다. 춤을 추는 이들이, 가장 가슴 설레는 순간이다. 이내 장단에 맞춰 몸을 움직인다. 박수를 보내줄 이, 눈빛으로 응원을 전하는 이 하나 없지만 그는 어느 무대보다 더 열심히 춤을 춘다.
지난달 12일 목포 남악에 새로 연습실을 마련한 한국무용가 이연정씨(이연정무용단 예술감독)를 만났다. 그는 이곳을 자신의 ‘춤 터’라고 소개했다. 탁 트인 넓은 공간엔 천장 조명만이 반짝인다. 꼭 공연 무대를 그대로 옮겨온 것만 같다. 이곳 연습실이 밤이 되면 무대로 변신한다는 그의 말
이 저절로 이해됐다. 조명 하나 하나를 남편과 함께 손수 골랐고, 인테리어도 가족이 함께 도왔다. 무안이 고향인 그가, 바로 이웃동네에 자신만의 무대를 꾸며놨으니 본인은 물론 그의 춤 인생을 곁에서 지켜봐 왔던 가족들도 감회가 남다를 터였다.
자신만의 ‘무대’ 중앙에 앉아, 그는 30여년 춤 인생을 풀어내보였다.
한국무용을 전공한 그이지만, 처음 접한 춤은 현대무용이다. 무안 일로읍에서 나고 자란 그는, 초등학교 3학년 특별활동 시간에 현대무용 강사에 눈에 띄었다.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던 신체조건을 보고, "무용 하지 않겠느냐"고 권유를 받은 것. 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용’이란 것 자체가 시골 소녀의 가슴을 두드린 것이다.
"요즘에야 무용이 대중화 됐지만, 당시 무안에서는 무용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한국무용·현대무용·발레 등 장르를 구분 지을 수도 없었던 때죠. 그저 내가 무용을 한다는 것이 행복했어요. 예쁜 옷을 입고 무대에 서고, 또 그런 나를 많은 사람들이 바라봐 준다는 것이 너무 기뻤죠."
처음엔 방과 후 활동으로 ‘가볍게’ 시작했다. 그러다 초 등학교 5학년 때 그는 "무용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다. 부모님은 조건부 허락을 하셨는데, 바로 현대 무용이 아니라, 한국무용을 한다면 뜻을 존중해 주겠다는것이었다.
"사실 어렸을 때 저는 현대무용이 더 끌렸습니다. 한국무용이 닫아서 추는 춤이라면, 현대무용은 펼쳐 보이면서 추는 춤입니다. 현대무용이 발랄한 제 성격과도 잘 맞았죠.
그런데 부모님은 현대무용도 좋지만 한국적인 것, 고전적인 것을 풀어내 보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저를 설득하셨어요. 그땐 차선책으로 한국무용을 시작했지만, 춤을 추면 출수록 ‘아, 부모님이 옳았구나’ 몸소 느끼고 있어요. 역시 저보다 제 자신을 더 잘 아셨던 모양이에요."
그렇게 한국무용을 본격적으로 배웠다. 그는 무안에서 광주로 매일 개인 레슨을 다녔다. 지금에야 KTX가 있어 금방인 거리이지만, 당시에는 비둘기호나 통일호를 타야 했다. 기차에서 내려서는 버스를 타고 학원에 갔다. 이동시간만 두 시간이 훌쩍 넘었다. 광주예고에 진학하기 전까지 4년을 그렇게 생활했다. 부모님도 자식의 열정에 놀랐다.
"하다 말겠지" 싶었는데, 그는 끝까지 했다. "날씨가 좋지 않으니, 오늘은 쉬어라"는 말이 부모님 입에서 나오는 날 그는 꼭 울었다. 학원에 못 가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당시 그에게 무용은 그의 삶을 보듬는 든든한 버팀목이자, 친구였다.
"연습실에서 춤을 추는 시간이 가장 좋았어요. 사춘기 시절을 지나면서 마음의 얹힌 감정들을 풀어내는 창구가 됐죠. 말을 하지 않아도, 나와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으니까요. 무용학원이 끝나면 그 시간을 기다렸다가 혼자 춤을 췄어요. 불이 꺼진 캄캄한 곳에서,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서 몸을 움직였죠. 그렇게 다시 새벽차를 타고 무안으로 내려와서 학교에 갔고, 하교 후엔 또 학원으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또 그리도 좋았던 게 춤이었다. 그는 돌이켜봐도 당시가 무용을 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밝힌다.
광주예고에서 춤 공부를 이어가다, 서울 세종대 무용과에 진학했다. 그는 대학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참 지역 차별이란 게 무엇인지 몸으로 깨닫던 때"라고 회고했다.
"제가 96학번인데 한국무용 쪽에서는 전라도 출신이 저 혼자였어요. 고향을 전남 무안이라고 하면, 당연히 ‘거기가 어디야?’란 반응이 왔고, 목포 쪽이라고 하면 얼굴빛이 바뀌었죠. 그때는 그런 때였어요."
학교생활의 적응이 힘들자, 그는 서울시립무용단을 목표로 더 열심히 춤을 췄다. 졸업하고 그해 4월에 시립무용단에 입단해 활동했다. 어려움을 기회로 승화시켜낸 케이스다.
여리 여리한 몸처럼, 그의 춤은 여성미가 넘친다. 선이 예쁘고 고와서 보는 이들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평을 받는다. 이 같은 시각적 평화로움은 음악과 춤꾼의 동작, 그리고 춤으로서 표현코자 하는 스토리가 잘 어우러지기 때문일 터다.
그가 안무한 ‘카디날의 겹’은 그의 춤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작품은 3개월 간 입 안에서 수 천 개의 알을 품는 물고기 ‘카디날피쉬’의 부성애를 한국무용 특유의 절절함으로 다뤘다. 지난해 전국무용제에서 대통령상·연기상·무대예술상·무대조명상 등 4관왕을 차지한 이연정무용단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작품의 시작은 바로 ‘겹’이란 한 글자였어요. 겹이란 점과 점, 선과 선, 면과 면 그리고 결국 사람과 사람까지로 생각이 가 닿더라고요. 이것을 부성애가 강한 ‘카디날피쉬’와 접목 시켜 풀어내 봐야겠다 마음먹게 됐죠. 작품은 특히 힘좋고 역동적인 남성 군무가 아닌, 왠지 모르게 안아주고픈, 갸냘픈 11명 남자 무용수들의 몸짓이 인상적입니다. 그런 메시지들이 관객에게 잘 전달돼서 좋은 결과로 이어졌고요."
그는 일상에서 영감을 얻는다. 가만 앉아 있다가 스치는 바람에
서 감수성이 발동되기도 하고,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혹은 홀로 차를 마시다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그것은 어떤 멋들어진 춤사위가 아니라, 그가 느낀 그때의 충실한 감정일 것이다.
꼭 표현해보고 싶은 것은 나무다. 이씨는 늘 식물을 곁에 둘만큼 꽃나무를 좋아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꽃나무에 물을 주는 일이다. 좋아하는 것인 만큼, 더 조심스럽게 작품에 녹여내 볼 작정이다.
그는 이제 자기 자신에 더 집중할 생각이다. 그간 제자들을 가르치고, 또 안무가로서 활동해 왔지만 앞으로는 춤꾼 이연정으로서 춤 공부에 더욱 매진할 계획을 갖고있다.
그래서 ‘때’가 됐다고 생각되면 이연정 만의 춤판을 벌이고 싶다. 오직 이연정의 손짓과 발짓으로 꾸며지는 무대이다.
그날의 피날레도 생각해뒀다. 바로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온 제자들과의 협업 무대다. 스승과 제자가 ‘우리 이렇게 함께 성장했어요’ 하고 춤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이곳에서 더 깊이 있어 졌으면 좋겠다"고 전해준다.
"한국무용은 한 살 한 살 나이가 먹어갈수록 묵은 맛이 있는 것 같아요. 손 하나를 올리더라도 춤꾼만의 색이 묻어나오는 것 처럼요. 한국무용으로 30여 년 춤을 춰왔지만, 전통을 공부하는 것은 끝이 없습니다. 정말 한국적인 것과 또 현대적인 창작을 접목시켜서 한국의 맛과 멋이 살아있는 춤을 선보이고 싶어요."

전라도인 admin@jld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