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없는 작가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독 많은 아픔을 겪은 작가의 글에서는 행간마다 삶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어쩌면 굴곡은 한 작가가 성장해가는데 자양분이 아닐까 싶다. 물론 당사자에게는 엄청난 고통이었을 터다. 글은 그런 아픔을 먹고 크는지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삶이 스며있는 글은 어디서나 읽혀지고 공감을 얻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아픔 역시 문명처럼 진화된 듯하다. 문명은 인간에게 여러 갈래의 선택을 요구하는 빌미로 작용한다. 주어진 선택에 따라 그 희비가 갈리는 것이 삶이 됐다. 그러나 어느 누군들 아픔을 겪고 싶겠냐마는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아픔과 맞닥뜨리거나 아픔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여기 다루고자 하는 시인도 녹록지 않은 아픔을 겪었고, 그 아픔들은 고스란히 문학에 투영됐다. 사는 것과 창작은 늘 비례하지 않는다. 복잡하고 무미건조한 삶은 오히려 창작을 어려운 환경으로 내몰기도 한다. 선택적 삶이 아니라 자연이 시키는 대로, 물 흘러가는 대로, 구름가는 대로, 바람부는 대로 삶을 맡겨도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아픔들을 피할 수는 없다. 글쓰는 사람 역시 문명의 짙은 그늘 아래에서는 예외일 수 없다. 사는 것은 온당 그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굴곡진 삶으로 인해 여러 아픔을 온몸으로 맞서며 시간의 뜰을 건너온 한 시인이 있다. 전남 화순 출생 정윤천 시인의 이야기다.
그는 인생 실패도 2번, 시적(詩的) 실패도 2번이라고 말할 정도로 굴곡진 삶을 살아냈다. 삶의 굴곡마다 시(詩)의 위기를 피할 수는 없었다. 생활인으로서의 삶은 만만치 않은 무게로 자신을 옥죄어왔다. 이런 일들로 인해 그는 스스로 절필 아닌, 절필시기마저 감당해야 했다.
이처럼 그는 순탄한 창작생활만 해온 것은 아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정윤천’이라고 하는 이름을 시단에 아로새길 수 있었던 것은 탄탄한 시적 사유를 지속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 그에게 시는 우연하게 찾아왔다. 20대 초반 반항기 때문에 가출했고, 일찍 가장이 됐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사회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다. 성격은 자유로운데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 되다 보니 거기서 느껴지는 쓸쓸함이나 외로움이 컸다는 술회다.
영암보건소 근무할 무렵이었다. 영암에 머물 때는 아예 문화적인 수혜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독서와 사유 쪽으로 기울어지게 된 것이다. 시를 쓴다기보다는 기록하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이것이 출발 아닌, 출발이된 셈이다. 그렇게 기록하던 것을 골라 딸의 이름으로 신춘문예에 응모했는데 그게 뜻하지 않게 당선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신춘문예 당선 이후 ‘제1회 실천문학상’ 공모에 응모하게 된다. 장편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상 공모였지만 그는 그것에 신경쓰지 않고 시집 한 권 분량을 일단 보내고 보는데 심사위원들로부터 시편들이 좋다는 반응을 이끌어낸다. 물론 실천문학상은 예정대로 장편소설에 주어졌다.
이때가 1990년 무렵이었다. 때마침 그것을 잊지 않았던 실천문학과 인연이 돼 그 이듬해 계간 ‘실천문학’에 7편이 수록되면서 신인으로 등단하게 된다. 당시 ‘실천문학’은 문학지망생이라면 모두 부러워할만한 계간지였다.
그 이후 실천문학사를 통해 1992년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이라는 시집을 펴낼 수 있었다. 그에게 이런 일들이 3∼4년만에 모두 벌어졌다.
그로부터 4년 뒤 ‘창비’에서 시집 제안이 들어오게 된다. 그는 ‘창비’를 모르는 상황이었다. 자신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주류 시단 안으로 진입해 버린 것이다. 그는 이때의 일을 정
확하게 기억했다.
"저는 ‘창비’를 모르는 상태였는데 시집 제안이 왔습니다. 아마 그것은 제 시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덜다듬어진 원석이라는 인상이 있었던데다 생태적으로 어떤 시인의 기질이 있었을 뿐 아니라 선천적인 요인 등을 높게 평가받았던 것 같아요. 원숙함이 아님에도 제게 기회를 준 것이죠. 누구든 투고하면 저처럼 되는 줄로만 알았죠. 제가 제 글에 대한 미래를 정리하지 못한 채 시인이 됐고, 문인이 돼 버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빠르게 문단으로의 진입에 비해 생활은 갈수록 헝클어졌다. 생계도 일찍 도맡아서 했는데 빚 보증을 잘못 서면서 삶이 계속 마이너스로 돌아서 버렸다는 설명이다. 이때를 그는 인생공부를 했던 시기로 간추린다. 심한 방황이 더해지자 시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마저 "뭐 저런 사람이 시인이냐"고 했을 정도로 질곡은 깊었다. 생의 근간이 흔들릴 정도였다. 그러다 그에게 ‘광주타임즈’에 입사한 뒤 생활인으로 살아가면서 시를 떠나보내는 일상을 지속하게 된다. 그러던 중 유종화 시인이 시집 원고를 하나 달라 했고, 그것이 나중에 창비에서 나온 ‘흰 길이 떠올랐다’였다.
‘흰 길이 떠올랐다’에 이어 새로운 눈 출판사에서 세 번째 시집 ‘탱자꽃에 비기어 대답하리’를 펴내게 된다. 그런데 이 시집은 사연이 있다. 물론 그에게 사연없는 시집은 없지만. 원고가 넘쳤다기보다는 선원고료를 지급받자 원고를 급하게 꾸려 시집이 나오게 된 것이다. 세번째 시집도 유종화 시인이 원고를 달라 해 넘겼더니 시집으로 나온 경우다. 세번째 시집 때는 갑자기 시를 급조하다 보니 부끄럽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던 것으로 회고했다.
그의 시 초반부는 광의롭고 은총스러웠지만 또 한편으로는 조악하고 실수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삶의 중간, 중간 시집은 출간됐지만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찾기 힘든 생활 여건이 상당기간 지속됐다. 엉덩이를 붙이고 어떠한 집적물을 만든다는 것은 더더욱 기대하기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봇짐을 싸들고 전라북도로 넘어간다. 3평 남짓한 고창민박집에 장기 임대로 머무르며 지내게 된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보내는 날들이었다.
광주에서는 생활을 급박하게 꾸리는 과정에서 상처도 입고, 소문도 좋지 않게 나서 내린 결론이 전북행이었다.
그곳에 머물 때 그는 공광규와 복효근, 조현선, 그리고 고인이 된 정세기 등이 활동 중이던 문학카페 ‘시의 지평’에 초대를 받는다. 처음에는 고사했지만 정세기라는 친구가 여러 차례 찾아와 같이 할 것을 권유하자 나중에 그 카페에 시를 몇편 올리게 된다. 그런데 반응이 좋아 그 카페에서 한동안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이때 ‘시가 몸안으로 찾아왔다’고 들려준다. 시인에게 가장 열심히 살지 않으면 안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옛날에는 손재주로 시를 썼지만 생의 질곡을 거치면서 선운사 풍경이나 적막이 제 몸 안으로 들어오더군요. 초기 세 시집의 시편들보다 시가 훨씬 깊어졌죠. 사람들 반응도 좋았구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시에 임했죠.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옛날에 는 멍사 모르고 시를 썼는데 독서도 하면서 문인들이 건너야 할 강을 거쳐 내적 충전을 했다고 볼 수 있어요. 시이론 공부도 했구요. 사람들에게 시는 이렇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죠."
이렇게 시의 토대는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그래서 시의 사유들이 포함된 시집 ‘구석’을 펴낼 수 있었다. 시집 ‘구석’은 ‘전라도 정서를 녹여 한국시 지평을 넓혀줬다’(안도현 표사)는 평가까지 받게 된 것이다. 아울러 그는 그나마 있던 독자들까지 없애버리는 미래파적 정서에는 반대한다. 시가 광폭해지고 난폭해져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문학동네에서 역대 처음 발간된 시화집 ‘십만 년의사랑’도 펴냈다. 문단에서는 별로 거론이 안됐지만 일반독자들로부터는 호응이 꾸준하게 이어졌다. ‘십만년의 사랑’이나 ‘별물’, ‘어디 숨었냐, 40만원’,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등 네 편의 시는 여전이 독자들로부터 애송되고 있다. ‘어디 숨었냐, 40만원’이나 ‘귀여’는 노래로 불려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고통이 끝났을 것이라고 생각할 무렵 화순 도곡에 술공장을 차린다. 하지만 이 일은 생계의 방편을 위한 것이었지만 다시 시단으로부터 7∼8년 동안 사라지는 결과가 된다. 시단으로 돌아온 것은 불과 2년 전이다. 광주보건대 평생교육원에서 시를 가르치며 시의 세상으로 나오고 있다. 한동안 떠나보냈던 시를 불러들인 것이다. 몸에 시를 쓰고 싶어하는 유전자가 들어있었지만 1년 동안 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시가 예전에 비해 단출해졌다. 그 덕에 최근 ‘지리산 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그는 많은 부침과 굴곡의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그러고 나서야 그에게 ‘시관’이 생겨났다.
"시를 더 깊은 곳에서 가져오려고 하더군요. 지금 생각해보면 굴곡을 겪을 때마다 시의 위기가 찾아오고, 극복했습니다. 그것을 반복했어요. 인생도, 시도 각각 두 차례씩 실패를 했는데 삼시 세판이라고 했잖아요. 지금은 좀 더 집요하고 복을 짓는다는 생각을 합니다. 멍사 모르고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를 담백하게 바라보려 하죠. ‘시관’(詩觀)이 생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지난 아픔의 시간들을 치유하며 꾸준하게 창작하고 있고, 여섯 번째 시집도 준비하고 있어요."

전라도인 admin@jld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