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참 ‘센’ 사람이다. 그에게서 날아온 칼럼은 문장 하나하나가 날카로웠고,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음절마다 힘이 실려 있었다. 아마 그래서였을까. 문화 예술판에, 아니 사회적으로 이슈가 생길 땐 꼭 그의 의견이 궁금했다. 그는 누구보다 가감 없이 자신의 생각을 전해주는 사람이었다. 윤만식 한국민족극운동협회 이사장은 쉬이 설명하자면 문화운동가다. 그는 문화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지난 10월15일 동구 동명동에 자리한 ‘민주의 집’에서 윤 이사장을 만났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민중공연예술을 이끌었던 지난 40년의 세월을 들려줬다.
윤 이사장이 처음 접한 민중예술은 바로 ‘탈’이다. 그는 "탈춤은 마당극이나 민족극 등 전통민속문화에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우선 탈춤을 마스터 해야만 마당으로 나갈 수가 있어요. 춤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탈의 특징과 민족성에 관한 이론 공부도 해야 하지요. 탈춤은 조선시대 중기 이후부터 성행했어요. 잘 알다시피 사회 현실에 대한 풍자와 해학을 담고 있는 예술이죠. 상놈이 불의한 양반을 꾸짖고, 부조리한 제도권에 호통을 치던 공연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민족예술을 이용한 투쟁이었겠지요."
그는 탈춤에 푹 빠져 살았다. 윤 이사장이 자주 쓰는 말을 빌려 설명하자면 탈은 ‘불편부당한 행위를 저지하기 위한 투쟁’의 도구였다. 그가 군대에 다녀와 전남대에 복학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탈춤을 배우는 동아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름은 민속문화연구회로 지었다.
"암울했던 시절, 탈은 젊은이들의 울분이라든가, 의기를 일으키는 매개체였어요. 탈을 쓰면 무언가 굉장한 ‘무기’를 얻은 것만 같은 자신감이 솟곤 했죠. 당시 박정희 유신 정권이 들어선 때였고, 엄혹한 때였습니다. 매일같이 학교에선 데모가 있었고, 그 선봉장에는 늘 민속문화연구회가 있었습니다. 원래 시위대 앞에는 풍물패가 앞장서야 했기에, 북·꽹과리·장구·징 등 장단도 다 배워놓았죠. 쉽게 말해 우리는 운동권이었습니다."
학내 문화운동을 이끌던 윤 이사장은 대학 졸업반에 올라가면서, ‘사회문화운동’에 관심을 두게 된다. 소위 운동권에서도 정치·경제·사회·환경·문화 등 각 장르가 있기 마련인데, 그는 특히나 사회현상에 몰두했다. 1979년 가을에 만든 것이 YWCA 극회 ‘광대’다. 광대는 전남대 탈춤반·국악반·연극반과 조선대 탈춤반이 뜻을 모아 창단된 단체다. 말하자면 대학 연합 동아리 같은 것인 셈이다. 이들은 광주에서는 최초로 현장 ‘마당극’이란 장르를 선보이게 된다. ‘돼지풀이’가 그것이다.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놀이패 신명의 '언젠가 봄날에'

"정부가 농민들에게 돼지 사육을 권장했었어요. 그래서 너도나도 돼지 개체수를 늘렸는데, 돼지고기 수입이 이뤄진 겁니다. 그러니 돼지 가격이 폭락할 수밖에 없었죠. 정부의 말을 따랐는데, 그 손해는 농민들이 지게 됐죠. 이를 극으로 만들었는데 호응이 엄청났어요. 소설가 황석영씨가 참 많이 도와줬고요. 마당극사에서도 ‘교본’이라 꼽힐 만큼 잘 된 작품이었습니다."
1980년 5·18이 일어나자, 그는 문화운동가가 해야 할 일을 했다. 대자보를 제작했고, 시민회보를 만들어 배포했다.
통신이 차단돼 국내외 소식을 접할 길이 없으니, 단파방송으로 ‘미국의 소리’를 들어, 새로운 뉴스들을 알렸다.
그러면서 그는 마당극을 통해 정치사회의 부조리함을 건드는 일을 지속했다. 군부독재가 저지른 행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데 천착했다. 그것을 보면서 시민들은 울었고, 분노했으며 그 중 몇몇은 곧바로 시위행렬에 참여하기도 했다.
"문화운동가들의 역할이자 몫이었습니다. 사회의 불의를 ‘놀이’로서 꼬집고, 그 놀이 끝에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죠. 무엇이 문제인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까지. 우리는 마당에서 판을 벌이고, 관객들을 이 ‘판’에 깊숙이 개입시키는 겁니다. 마당은 그러한 힘을 가졌거든요."
윤 이사장은 1982년 마당극 전문 단체인 놀이패 ‘신명’을 만든다. 본격적으로 마당에 뛰어든 것이다. 5·18을 다룬 ‘일어서는 사람들’을 비롯해 풍자극 ‘호랑이놀이’,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 등 시대를 담아낸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슈를 담아내는 것이기에 시대상에 따라 주제가 다채로운 게 특징입니다. 1980년 초에는 당연히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요. 울분이 고스란히 남아있던 때라 극이 아주 강했습니다. 극을 하던 사람들도 이를 보는 사람들도 모두 많이 울었어요. 이후에는 노동자 그리고 농민
들의 투쟁기가 주로 쓰였고, 남북 분단에 대한 문제도 많이 다뤘죠. 80년 광주의 5월에서부터 통일까지. 마당에는 어떤 한계도 없었어요."
실제 마당극은 사회극이라고 하기도 하고, 더 강하게 말해서 정치극·선동극이라고도 규정한다. 공연 자체가 하나의 집회이자, 시위였던 셈이다. 요즘처럼 SNS 등의 미디어가 활발하지 않았던 시절, 마당극은 작은 언론이나 마찬가지였다. 뉴스에서 다뤄주지 않는 농민·노동자·민주·인권 등의 이야기를 마당극으로 펼쳐 보여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마당극의 장르적 매력은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무대극은 무대와 객석이 나뉘어져 있어요. 분리 돼 있을 뿐 아니라, 공연자와 객석이 마주 보는 형식입니다. 하지만 마당극의 기본은 원형이에요. 한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방팔방을 모두 염두하고 연출을 하죠. 관객들도 마찬가지 겠고요. 일 방향이냐, 팔방이냐의 차이는 공연자와 관객의 관계 형성에서부터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마당극에서는 관객이 자연스럽게 작품에 개입할 수 있다.
계엄군에 아들을 잃고 울고 있는 어미의 손을 잡아줄 수 있고, 탐관오리의 행패를 보다 못해 시원하게 욕지거리를 날려도 무방하다. 이 같은 관객의 추임새는 마당극을 살리는 카드이자, 진짜 예술의 매력이다.
"지난 9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민족극한마당에서는 이 같은 마당극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선보여져 시민들의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엄혹했던 시절부터 최근까지 풍자와 해학의 판을 벌여왔던 전국 20여개 단체들이 광주에서 판을 벌였죠. 그렇게 거리에서, 마당에서 어젠다를 던져 온 세월이 벌써 40주년을 맞습니다."
윤 이사장은 오는 12월 열리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광주전남 문화운동 40주년’ 행사 준비에 열심이다. 공연 장르는 물론 미술·사진·문학 등 민예총 소속의 예술인들이 총출동한다. 사회 부조리함에 예민하게 반응해 온 진보적 예술인들이 한 자리에서 만나는 것이다.
"예술가로서 제 목표는 단 하나에요. 우리 광주의 5·18정신이 각 문화 장르로 승화, 전국을 넘어 세계로 확산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널리 널리 알려지다 보면, 치열했던 젊은 날 버릇처럼 말했던 ‘오월광주가 곧 통일’이란 명제가 통하는 날이 머지않아 올 것입니다. 처음 탈을 쥐었던 그 마음처럼, 꿋꿋하고 올곧게 나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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