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호·제69호) 공장들이 줄지어 늘어선 평동공단 쪽 낯선 길. 이쪽이 맞나. 세 번쯤 고개를 갸웃했을 때 소담스런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시골 할머니 댁 같은 포근한 집이다. 지난 날 복닥거리며 살던 추억들을 가득 품은 곳. 아기자기 꾸며놓은 마당정원에는 돌탑이 서 있고, 유리 미닫이 문 너머로는 책으로 쌓아놓은 탑이 빼곡하다. 과연 시인의 집이로구나, 싶다.
집의 주인은 향토시인 강성수(필명 강산에늘봄잔치)씨. 그의 이름 앞엔 늘 ‘향토시인’이란 부연이 따른다. 그의 작품에 깃든 애향심 덕이다. 고향의 소소한 풍경들은 그에게로 와서 시가 됐다. 어느 날은 아름다운 어등산을 또 어느 날엔 광산이 낳은 소리꾼 임방울 선생의 삶을 끄집어냈다. 왜적에 맞서 고향을 지켰던 의병들의 이야기도, 고고한 선비들의 모습 도 그의 시에 담겼다. 그렇게 40여년의 세월동안 써낸 작품이 1200개가 넘어섰다. 애향시가 담긴 검정노트가 차곡차곡 탑으로 쌓인 이유다.
"제게 고향은 평생 문학적 영감의 원천이자, 무거운 과제이죠. 제 고향이 광산 도호리인데 광주공항이 들어서면서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됐어요. 세상이 변화하는 한 방법일 테지만, 제게는 나고 자란 흔적이 통째로 사라진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 것들, 한 세대가 저물면 함께 저물어 갈 것들을 ‘기록’해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그의 노트엔 고향을 노래한 시들로 들어찼다.
노트 1권 ‘빛메고을’, 2권 ‘어등에 의병이 살고 있다’에 각 150여편 씩, 3권 ‘광산에 살어리랏다’에는 230여편, 4권 ‘광산 선비들의 노래’ 260여편 등 각 테마별로 시들을 엮었다.
특히 강 시인은 광산 곳곳에 있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의 스토리를 발굴, 작품으로 승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국창 임방울 선생에 관한 시만 130여편이 됩니다. 문학 부문에서는 용아 박용철 선생을 담아보았죠. 또 나주 문평면 출신이지만 어등산에서 활동하다, 그곳에서 운명을 맞은 죽봉 김태원 장군도 제 문학적 감수성을 자극시킨 인물입니다. 광주에서 ‘광산’ 지역만 놓고 본다고 해도 역사문화자원들이 이렇게 훌륭합니다. 우리가 놓치고 사는 아까운 콘텐츠들이죠."
그가 기록한 광산의 숨결은 책으로 빛 보기를 기다리고 있다. 언제쯤 발간될까요? 물으니, "광산에서 쓰여지고, 광산을 노래한 시인데 누가 사보겠습니까. 서울사람이 보겠습니까, 부산사람이 보겠습니까" 라고 반문한다. 생각해보니 그가 쓴 애향시는 애초 광산을, 그리고 광산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광산 지자체의 관심이 절실히 필요한 까닭입니다. 탈고까지 해놓았는데 아직은 좋은 연과 닿지 못했죠. 광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심이 있어야만, 작품이 독자들을 만날 수 있겠죠. 시가 시로서 발표되고, 또 광산의 기록으로 또 사료로서 오래 오래 남는 게 제 꿈이자 바람입니다."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광주 광산의 역사가 술술 흘러나온다. 1200편의 시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닐 터. 강 시인 뒤로 빼곡한 서고에는 광주·전남의 향토서가 가득이다. 틈 날 때마다 꺼내어 읽곤 하다가, 재미난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그 길로 집을 나섰던 그다. 어등산은 틈 날 때 마다 올랐고, 극락강 변은 수도 없이 걸었다. 광산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그 머릿속에 척척 정리가 돼 있다.
무엇보다 그는 태조 왕건과 나주 오씨부인(장화황후)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깃든 곳 ‘희여재’를 작품화하는 데 몰두했다.
"희여재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재회를 꿈꾼 고개이지요. 이곳을 지나며 몇 번이고 뒤돌아봤을 1000년 전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영겁의 시간을 지나왔지만 그 사랑의 흔적은 강시인의 시 속에서 오래도록 살아 숨 쉰다. 백발 성성한 노시인이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어색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지난 2017년 강 시인은 아내에게 바치는 장편서사시집 ‘우린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사랑으로 다시 만나랴’를 발표해 화제를 모았었다. 오직 아내만을 위한 시 700편이 담겼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저에게 있어 시는 기록이에요. 22년 전 먼저 떠나 이 세상엔 없는 아내이지만, 제 시집 속에선 여전히 살아있죠. 저에게 시집 와서 종부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 서의 삶을 살다간 아내를 기리기 위해 시를 썼어요. 여자의 일생을 기록해 헌정하고 싶은 마음이었죠."
지금껏 수많은 작품들을 썼지만 강 시인은 여전히 하고픈 이야기가 많다.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그가 마음이 바빠지는 이유다. 요즘에는 철학적인 물음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온다. 이를테면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것들이다. 살아 갈 세월 보다, 살아 온 세월이 더 많은 그이지만, 아직 명확한 답은 내놓을 수 없었다 한다.
"저는 현재 너무나 건강해요. 당뇨도 없고, 혈압도 정상이라 합니다. 지금 생각 같아서는 꼭 안 죽을 것 만 같아요. 그런데 옆에 친구들이 하나 둘 가는 것을 보면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죠. 저녁에 잠 들어서 아침에 눈을 뜨면 살아있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어요. 죽는다는 것에 앞서, 산다는 것.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작품에 남기고 싶어요. 더 공부하고 수양해야 할 이유죠."
마지막으로 그에게 앞으로 바람에 대해 물었다. 이제야 또 무슨 바람이 있겠냐며 웃더니 켜켜이 쌓인 검정노트들을 가리킨다.
"지난날의 기록들이 저렇게 모였어요. 그것의 양은 중요치 않습니다. 시는 자고로 작품성이 있어야 하죠. 작품이 작품다워야 후세에 전해지지 않겠습니까. 훗날, 제가 떠나고도 오래 오래 남아 있을 시가 저 안에 있기를. 세상에 작게나마 위로를 전해 줄 시가 언젠가 빛 보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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