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호·제70호=고선주 기자) 토박이 소설가들과 광주에 뿌리를 내린 출판사의 소설들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지역 출판사 중 유일하게 소설을 꾸준하고 펴내고 있어서다. 특히 남도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면서 창작에 매진하는 소설가들의 작품집이 광주연고의 ‘문학들’에서 잇따라 출간돼 모처럼 독서의 즐거움을 안기고 있다.
더욱이 근래들어 여류 소설가들의 부침이 눈에 띈다. 성별로 구분짓는 것이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지만 그래도 척박한 환경 속 일과 가정, 엄마와 아내로 살아가면서 창작생활을 병행해가는 등 여류소설가들에게 글을 짓는 일이야말로 쉽지만은 않은 여정일 터다. 작품집 출간이 갖는 무게감을 익히 알기 때문에 그들의 소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지면을 통해 조명한 바 있지만 ‘별의 시간’ 이후 8년여만에 신작 소설집 ‘의자’를 펴낸 백은하씨로부터 1년전 늦깎이로 등단한 뒤 곧바로 소설집을 펴낸 김용매씨에 이르기까지 글쓰기의 고단함을 이겨내고 펴낸 소설집은 각양각색 인간군상의 삶을 펼쳐보이고 있다. 덩달아 문학들 소설들은 물론이고 지역의 소설 내외연을 확대해가고 있다는 평이다. 최근 출간된 여류 소설들을 들여다본다.

모든 고양이의 이름은 다 나비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너희들한테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언니들은 크게 분노했다. 이 분노는 당연히 오빠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나보다 열여덟살이 많은 오빠는 동생들의 삶을 헤아리려고 하지 않았고 어머니와의 삶이 지속된다면 자신이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은유 소설집 23쪽 내용

고슴도치의 방

그날 새벽 전화 벨소리가 울릴 때부터 알아봤죠. 나를 혼돈과 미망 속으로 몰아넣었던 그 전화 벨소리를 들었을 때 말이죠.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네요. 나를 찾아주세요. 구렁이알처럼 소중한 그 돈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죠? 도대체 누가 범인인가요? 누가 제발 대답 좀 해 주세요, 네?
김민라 소설집 69쪽 내용

혼자라면

"우린 정말 몇 초의 간극으로 서로의 몸이 원하는 걸 알아차린다. 그럴 때면 안간힘을 써서 헐거워진 온몸의 근육들을 짱짱하게 만들어서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섞는다. 우리의 몸은 이제 곧 사라질 거라고."
박이수 소설집 67쪽 내용

유리병이 그려진 4번 골목

난 구청으로 갈 거야. 누나와 남자 이름으로 된 도장을 파고 혼인 신고부터 할 거야. 설사 내일 사망 신고를 하더라도 내가 진우의 부인이었다는 증거는 남잖아.
김해숙 소설집 84쪽 내용

푸줏간 남자

꼰대가 엄마와 나를 장애인으로 등록했다. 재주가 메주라더니. 우리는 장애인이 되어 나라에서 돈을 탔다. 내가 어리다는 핑계로, 후원자까지 만들었는데 할마씨는 돈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우리 식구는 국가에서 먹여 살리니 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할마씨가 말했다. 그런데 그 돈은 다 어디로 갔을까.
김용매 소설집 48쪽 내용

먼저 전남 장성출생인 이은유씨가 작품집 ‘손’을 펴낸 뒤 5년만에 두번째 소설집 ‘모든 고양이의 이름은 다 나비다’를 펴냈다.
표제작 ‘모든 고양이의 이름은 다 나비다’는 화자와 케이(K)라는 인물을 통해 결국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단절돼 서로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밥 이야기’는 화자의 오빠와 여동생들을 통해 혈연관계로 묶여 끈끈한 유대를 가지고 있어야 할 가족이라는 것이 남자와 여성의 관계로 구분, 단절돼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비파나무의 노래’에서도 부부라는 이름으로 이십 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살았지만 화자는 이혼함으로써 삶의 필수요소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집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소설집에는 표제작을 포함해 ‘밥 이야기’, ‘비파나무의 노래’, ‘바람의 말’, ‘백합’, ‘포르말린’, ‘다섯 손가락 사이로 지나는 바람’, ‘그 여자의 별자리’ 등 8편의 단편이 수록됐다.
이어 전남 담양출생인 김민라씨(동신대학교 외래교수)가 첫 소설집 ‘고슴도치의 방’을 출간했다.
앞서 나온 백은하씨가 1950년 함평양민학살사건을 배경으로 소설 ‘귀향’을 발표했던 것처럼 저자는 5·18광주민중항쟁을 배경으로 ‘고슴도치의 방’을 집필했다. ‘고슴도치의 방’은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공간으로, 화자의 아버지가 아내의 부탁으로 가까운 G에서 자취를 하는 막내 외삼촌에게 반찬을 전해 주러 갔다가 화를 당하게 된다. 이를테면 죽음의 도시 광주를 드러낸다.
‘마흔 줄의 미망’은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지만, 죽음보다 못한 삶과 삶 못지않은 죽음 사이의 풍경까지 아우르고 있다. ‘카르페 디엠’은 죽음이 성큼 다가와 있는 윤미와 한쪽 팔을 잃은 육체적 결핍을 얻게 된 준영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번 소설집에는 표제작을 포함해 ‘마흔 줄의 미망’(迷妄), ‘카르페 디엠’, ‘회저의 시간’, ‘매직풍선’, ‘배롱나무가 있는 주유소 풍경’ 등 6편의 단편이 수록됐다.
또 전남 나주출생인 박이수씨는 등단 5년차로 장편소설 ‘혼자라면’을 펴냈다.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빠른 속도로 고령 사회로 진입하는 한국사회를 소설가적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아내가 있는 남자 광일씨와 사귀는 일흔세 살 장영희씨의 이야기로 사랑이 주제의식이다.
노년의 불륜이 소재인 셈이어서 꽤 파격적으로 읽힌다. 작품의 화자는 한때 짧은 결혼 생활도 했으나 남편의 외도로 이혼한 뒤 혼자 거주하고 있다.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독서지도와 논술 교습으로 생계를 이어 가지만 부모의 유산과 가입해놓은 보험으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지는 않는다. 여느 독거노인들이 빠지는 빈곤과 과도한 노동의 덫에서 자유롭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런 약간의 경제적 여유가 그녀의 곤궁함을 모두 덮어 주지는 못한다. 그녀의 곤궁함은 경제적 결핍이 아니기 때문이다. 텅 빈 내면, 허무와 권태에서 나오는 외로움에 그 본질이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전북 고창 출생인 김해숙씨 역시 첫 소설집 ‘유리병이 그려진 4번 골목’을 선보였다. 고통스러운 기억으로부터 자유를 갈구하고 있는 소설들에는 고정된 과거의 부정적 사실성을 미래지향적인 자유의 운동에서 긍정적으로 변형시키고 있는 흔적들이 곳곳에서 노정된다.
‘유리병이 그려진 4번 골목’의 화자(빈)는 남자친구 아버지의 자살을 처음으로 목격한 여자가 등장한다. 그녀는 눈덩이가 파랗고 죽은 돼지처럼 두툼한 혀를 빼낸 남자 유령과 마주하는데 그 유령은 빈의 삶을 흙탕물로 만든 남자였다. 남자친구의 아버지가 자살한 모습을 목격한 빈이나, 마을 사람들의 질투에 떠밀려 죽음을 선택한 아버지를 목도한 현수가 그 마을에 계속 남는 것 또한 ‘고통스러운 기억’이다. 빈은 남자 유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현수를 사귀게 되고, 그리고 현수를 자유롭게 해 주기 위해 담벼락의 그림을 지운다는 스토리다.
‘어쩔 수 없다’에서 나온 화자는 동거인이지만 정작 남자친구 진우의 가족에게서 인정받지 못하게 된 여성이 등장한다. 소설 속에는 굴곡진 기억들을 안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삶이 펼쳐진다.
이번 소설집에는 표제작인 ‘유리병이 그려진 4번 골목’을 비롯해 ‘사소한 일거리’, ‘어쩔 수 없다’, ‘고의’, ‘해를 삼키다’, ‘훅’, ‘누룩을 깎다’ 등 7편이 실렸다.
이외에 전북 익산 출생으로 광주에 머물며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용매씨도 눈길을 끈다. 그는 이들 소설가들에 비하면 중고 신인에 해당한다. 오랫동안 소설쓰기를 해왔지만 늦깎이로 지난해 초 등단했다. 이런 그가 등단 1년만에 첫 소설집 ‘푸줏간 남자’를 내놓았다.
자본주의 사회의 물신화 속 양상들을 소설의 주요한 모티프로 차용하고 있는 그의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모두 힘겹고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주변부적 존재들로 그려진다.
등단작인 ‘봉이’는 알코올 중독으로 치료시설에 끌려간 아버지를 둔 봉이의 어두운 삶이 펼쳐진다. 봉이는 어디에도 장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으로 등록돼 장애인 교실에서 공부를 해야만 한다는 줄거리다.
‘병리 가족’은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가장이 되어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던 가족의 우울한 풍경을 펼쳐놓고 있다. 가정폭력과 불륜, 알코올 중독과 비정상적이거나 상식을 넘어서 훼손된 섹슈얼리티의 양상이 제시된다.
이번 소설집에는 표제작을 포함해 ‘봉이’, ‘라이타돌’, ‘잠복기’, ‘흔적’, ‘병리 가족’(病理 家族), ‘환삼덩굴’ 등 7편의 단편이 수록됐다.
이들 작가는 모두 지역에 머물며 지역을 연고로 한 출판사에서 작품집을 펴냈다. 작품의 깊이가 중요하면 통하는 것이라는 정설에 다시금 믿음이 갔다. 이들 중 몇몇 작가들은 최근 문학현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그들의 얼굴에서 글의 풋풋한 생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다음 문학적 행보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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