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은 숙명이었다" 작업 힘들지만 희열감 있어 지속

[아트인] 조각가 김홍곤
담양 수북에 1996년 작업실 마련 4년 전부터 전업 활동
30년 재직한 대학교수 명퇴…‘동행’ 시리즈 작업에 몰두
새로운 작품·다양한 작업 구상…‘국제조각페스타’ 준비

전라도인 admin@jldin.co.kr
2021년 11월 04일(목) 17:48
(2021년 11월호 제102호=글 고선주 기자)모처럼 빡빡한 도심 풍경을 뒤로 하고 전남 담양 수북 대방리 2구를 찾아가는 길, 호젓할 것이라는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 마을 초입에 들어섰다. 아직 산야는 푸른 빛 그대로 였다. 아스라히 손에 잡힐듯 병풍산 자락을 끼고 그곳을 향해 가며 만난 들판은 황금 들판이었다. 가을은 그렇게 꼭 표현을 하며 찾아온다. 마을입구에 다다르자 동네가 꽤 짜임새가 있어 보였다. 마을 안쪽에 드러누운, 정겨운 돌담길이 맞아줬다.
시멘트로 쌓아올렸다면 이런 호젓한 풍경과 조우하기는 어려웠을 터다. 곳곳이 돌담이어서 마음이 아늑해진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주택들 역시 한번쯤 살아봤으면 하는, 내심 부러움의 대상으로 다가왔다. 아마 천천히 느리게 가는 시간과 느리게 가는 시간에 기대어 가는 여유가 더더욱 마을에의 운치를 더했을 것이다. 돌담을 끼고 한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가니 큰 당산나무 역할을 하는 듯한 두 그루의 고목이 서 있었다. 수시로 말썽을 부리는 내비게이션 때문에 50m 정도를 남겨두고 헤매야 했다. 예술가의 작업실이 있었지만 쉽게 찾지 못해 기어이 전화를 걸었다. 차를 돌려 가니 그가 집 입구까지 나와 손을 흔들었다. 평생 교육자로 후학을 양성하며 조각 활동을 펼쳐온 전북 순창 출생 김홍곤 작가(64·전 서영대 교수)가 그다. 30년 동안 재직하던 대학에서 2019년 명예퇴직하고, 온전하게 전업작가로 돌아온 그는 1996년 지금의 자리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그는 이곳에서 학교 교사 출신으로, 캠퍼스 커플로 만난 아내와 함께 일상을 보내며 구상한다. 그의 아내 역시 미술을 전공했다고 한다.
그의 작업실은 안집이 딸려있다는 표현이 맞을 게다. 작업실로는 건축 허가가 나지 않아 대밭이었던 부지에 별도로 거주할 수 있는 주택을 건립한 뒤 작업실을 지어서다.
그에게 작업실이 필요했지, 별도로 생활하며 지낼 거주 공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조각은 살람살이가 평면 회화보다는 압도적이다. 작업 과정 역시 판이하게 다르다. 도심의 건물 임대로는 엄두를 낼 수 없다. 그래서 그도 담양에 장소를 물색해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이다.
그의 작업실은 55평 규모로 실제 작업장과 개인 연구실(스케치실), 그리고 개인 전시실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그는 인터뷰를 진행하기 전 작업장에서 조각을 이해해야 한다면서 구석구석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림은 실내에서 계절 따라 환경에 맞춰 음악을 들으며 작업을 할 수 있으나 조각은 그림과 노동력이 차원이 다르죠. 먼저 구상을 하며 스케치를 하고, 심봉에 뼈대를 만듭니다. 뼈대가 있어야 점토가 무너지지 않아요. 사진을 보고 스케치를 하며 형상을 구축합니다. 뼈대와 점토를 만든다는 이야기예요. 흙으로는 보존하기 어려운 탓이죠. 그리고 나서 석고를 뜨는 등 순으로 작업이 진행됩니다. 석고 안 플라스틱에 액체를 발라 꺼낸 뒤 수도권의 주물공장으로 보내 브론즈 작업을 거치는 과정이 간단치 않습니다."
그는 조각이 시간과 노동력, 장소가 그림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설명이다. 더욱이 여름에는 작업이 고역이다. 날이 뜨겁고 기온이 높아 흙이 빠르게 마르는 관계로 선풍기나 에어컨을 틀 수 없기 때문이다. 실내에서는 작업을 하기가 어려운데다 별별 도구가 다 필요하고, 많은 장비가 요구되는 점 또한 조각의 어려움으로 꼽았다. 야외 환경이 돼야 조각이 가능할 것이라고 귀띔한다. 도심 건물을 임대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작품을 만드는 과정보다 구상 단계가 중요한데 어떤 철학적 사유로 만드느냐, 어떤 테크닉으로 만드냐가 중요하죠."

작업장에서 설명을 한뒤 다시 개인 전시실로 이동해 조각에 대한 설명은 계속 됐다. 그는 다시 작업 초창기 이야기를 들려줬다. 대학 재학 무렵 미술대학은 없었고, 사범대학에 미술교육과만 있었다고 한다. 1학년 때는 미술 전분야를 학습하게 한뒤 2학년 때부터 오늘날처럼 전공을 찾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서양화를 하기 위해 대학에 입학했으나 점토를 만지면서 촉감이 좋아 그후 흙에 빠져 지내게 됐다고.점토를 만지다 딱히 어떤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하나의 형상이 만들어지면 그게 신기하게 느껴진 것이 조각에 빠지게 된 계기였다. 그는 수준높은 조각을 위해 대학 졸업 때까지 주구장창 쉼없이 크로키에 집중했다. 수업시간도, 시외로 이동할 때도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읺고 크로키에 몰두한 것이다. 그가 젊은 날 많은 시간을 크로키를 하며 보냈다는 것은 그가 스케치를 하고, 개인 연구실 한쪽 책꽂이에 꽂아진 노트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처음에 조각을 사실적으로 작업했다. 누드 조각으로 갈 수 있었지만 당시에는 누드 모델이 거칠어 아예 착의 조각을 시도했다. 그러던 차 대학 2학년 때 목우회 공모전에서 최고상을 수상, 불확실한 상황일 때라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지만 수상을 통해 자신감을 충만할 수 있었다고 밝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것으로 고생길에 접어들었다고 술회한다. 그는 조각이 어려운 작업이어서 삶에 비유했다.
"조각은 숙명이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각기 재능이 있지만 저는 미술에 재능이 있었던 듯 싶어요. 유년기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만화를 따라 그렸으며, 그릴 곳이 마땅치 않을 때는 땅 바닥에 나뭇가지로 그렸고, 심지어는 교과서 여백에도 그림을 그렸죠."
이처럼 그는 그림에 푹 빠져 헤어나지 못했지만 부모님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외아들이어서 ‘미술을 하면 못산다’고 한데다 틈만 나면 그림을 그리는 바람에 극심한 반대에 맞닥뜨려야 했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자석에 끌려가듯 미술에 빠져드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그래서 숙명이었다고 표현한 듯하다. 대학 재학 시절 은사였던 고정수 교수의 권유도 그가 조각을 하게 된 이유의 하나다. 그는 그 어려운 조각가로서의 길을 가면서도 힘든 것은 사실이나 하다보면 희열감이 있고, 만족감이 높다는 전언이다.
여기다 대학에 재직하면서 작품 판매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게 돼 작업을 소신대로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세상과 타협을 하지 않아도 됐으니 행운이었던 것 같다고 소감을 잊지 않았다. 예순이 넘어 그는 새삼 ‘동행’을 다진다. 실제 유기묘까지 함께 거두며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그는 ‘동행’ 시리즈로 가는 자신의 작업이 자연스런 흐름이라고 언급했다.
지난 9월 고향 순창에서 첫 전시를 열었다는 그는 마지막으로 계획을 들려주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하고 싶은 작업을 지속할 거예요. 정년을 4년 앞서 대학을 나온 것은 ‘동행’ 후 새로운 작품과 다양한 작업을 해보고 싶어서였죠. 당장 11월말께 서울에서 예정된 ‘국제조각페스타’가 있어 여기에 집중할까 합니다."
전라도인 admin@jldin.co.kr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
회사소개회사연혁회원약관개인정보보호정책제휴문의고충처리인광고문의기사제보
광남일보 등록번호 : 광주 가-00052 등록일 : 2011. 5. 2.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광주 아-00193 등록일 : 2015. 2. 2. | 대표 ·발행인 : 전용준

광주광역시 북구 무등로 254 (중흥동 695-5)제보 및 문의 : 062)370-7000(代) 팩스 : 062)370-7005 문의메일 : design@gwangnam.co.kr

본사이트에 게재된 모든기사의 판권은 본사가 보유하며 “발행인” 의 사전 허가없이는 기사와 사진을 무단전재 복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