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발전·호남의 웅비 국민 화합 위해 누군가 숙명의 과업 이어가야 할 때 확신

[커버스토리] 이윤석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총장
전남도의원 거쳐 제18대 때 국회 입성 주민위해 농성 불사
대학 재학 중 5·18 경험 시위…옳음 담대하게 실천 노력
정치는 운명같아…국회의사당 앞에서 네 번째 기도를 꿈꿔

전라도인 admin@jldin.co.kr
2022년 11월 06일(일) 15:12
(2022년 9월 112호=이성오 기자)"한두 번 약속을 어겼어야죠. 장관님 개인은 믿지만 정부는 믿지 않습니다. 예산 다시 확보해 주십시오. 해주시려면 들어오시고, 안 해주시려거든 들어오지 마십시오. 안 해주고 들어오시려거든 4층에서 저와 함께 뛰어내립시다."
이윤석 국회의원(제18대, 무안·신안)은 2010년 7월22일 국토교통부 장관실에서 철야 농성에 들어갔다. 현직 국회의원이 정부 부처를 상대로 삭감된 지역예산을 되살리기 위해 농성을 벌인 것은 전례를 찾기 힘들다. 하지만 경제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밀려난 ‘무안 현경~해제 도로확장사업’을 관철하려면 어쩔 수 없다고 마음먹었다. 장관은 끝내 들어오지 않았다. 박지원 의원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전화가 오고 부처직원들이 말렸지만 철야농성을 멈출 수는 없었다. 다음 날 장관의 확약을 받고서 물러났고, 장관은 그 약속을 지켰다.
2013년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계수조정소위 위원이었던 이 의원은 강운태 광주시장과 박준영 전남도지사의 뜻을 함께 담아 국회 기자회견장에 섰다.
"… 박근혜 당선자는 국민대통합을 주장하고 있지만, 이번 기획재정부 예산안 반영 추이를 보면 당선자에게 과연 국민대통합 의지가 있는지 의구심을 감출 수 없다.
광주전남의 예산이 거의 대부분 거부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당선자가 약속을 지키려 한다면 낙후되고 침체된 광주전남지역 예산 배정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마땅하다 …."
국회에서 심의에 들어간 2014년도 국고 예산에 대한 보이콧 선언이다. 호남예산 삭감에 맞서 시도지사와 함께 정면승부를 건 것이다. 기획재정부가 발칵 뒤집혔다.
그는 박재완 기재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예산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차라리 호남을 대한민국에서 분리시키고 예산을 편성하시오"라고 말했다.
2011년 ‘무이파’와 2012년 ‘볼라벤’ 태풍이 신안과 무안에 큰 피해를 안겼을 때 그는 비지땀을 흘리며 뛰어다녔다. 특히 신안에서 태풍에 넘어져 쭉정이가 된 벼를 직접 들고 국무총리실과 농림부 장관실을 찾아 읍소했고, 마침내 국가재난구역 지정을 두 차례나 받아냈다.
그는 1960년 무안 삼향면 용포리 이동마을에서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빈농의 아들이었기에 쇠꼴을 베고 날마다 땔나무를 해 지게를 지고 날라야 했다. 아홉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농사일을 시작했고, 수레까지 끌었다. 어느 날 자다가 깨서 부모님이 밭을 파는 일을 의논하는 얘기를 듣게 됐고,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마음속으로 반드시 성공해서 더 크고 좋은 논밭을 사 드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열 살 때 마을에 지프차를 타고 온 국회의원 일행을 보고, 저들처럼 되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는 안 되는 일이라며 그런 생각 말고 공부 열심히 해서 면직원이나 학교 선생님이 되라고 했다. 철부지의 꿈이라고 생각하신 듯하다. 비록 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일을 해야 하는, 가난한 유년의 삶이었지만 그는 ‘눈물 나도록 아름답고 그리운 시절’이라고 회고한다.
청년시절에는 군부독재와 5·18민주화운동을 경험하고, 암울한 현실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대학 때 시위활동에 참여했고, 집회가 열리면 연단에 올라가 연설을 했다. 틈틈이 갈고 닦아온 웅변솜씨가 힘을 발휘했다. 1985년 2·12총선거를 통해 신민당이 제1야당이 됐고, 지도부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공식당론으로 확정, 전국을 순회하며 집회를 열었다. 정치학을 전공했던 그는 집회를 찾아가 야당과 재야 정치인들의 연설을 녹음했다. 그때 신순범 의원의 눈에 들어 신 의원의 소개로 손주항 의원의 비서이자 민추협 문화부 차장을 맡게 됐다. 이때부터 광목 수의를 입고 전국 각지에서 열린 ‘전국직선제개헌본부 현판식’에 참여해 연설을 했다. 김대중 총재를 비롯해 동교동계 의원들을 만나 소중한 인연도 쌓았다. DJ는 1988년 그의 결혼에 붓글씨 한 점과 흑산도홍어를 선물로 보냈다.

1995년 전남도의원에 당선됐다. 도의원이 되자마자 현안은 전남도청 이전이었다.
당시 광주와 전남의 통합을 주장하며 도청 이전을 반대했던 허경만 전남도지사에 맞섰다. 그때부터 2006년까지 3대에 걸친 그의 도의원 활동은 도청이전으로 시작해 도청이전으로 마무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2년에 도의원 3선을 시작하면서 도의회의장 선거에 나섰다. 49명 도의원들의 참여한 투표에서 무려 46표를 얻어 당선됐다. 41세 평의원 출신의 젊은 도의원이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하나님! 정의와 공의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 불의에 타협하지 않게 하시고 저보다는 이웃을 먼저 생각하게 하시고 옳음을 실천함에 있어서는 담대하게 하십시오 …."
2008년 5월 30일, 제18대 국회의원의 임기가 시작되는 날, 그는 국회의사당 앞 넓은 잔디밭에 무릎을 꿇었다.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모으
고 눈을 감았다. 기적처럼 실현된 꿈, 여의도 입성이었다. 1983년 군을 제대하고 "이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기도를 올린 지 25년만의 감사 기도였다. 빗물이 촉촉이 스며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4년 뒤 2012년에도 국회의원에 재차 당선돼 의사당 잔디밭에 무릎을 꿇었다. 세 번째 기도를 올렸다.
"오세훈 시장님! 우연히 던진 돌에 개구리가 죽는다고 ‘오세훈 성과주의’가 던진 돌에 불쌍한 낙지 어민, 판매 상인이 다 죽었습니다."
2010년 10월11일, 이 의원이 서울시청에서 낙지를 움켜 쥔 손을 번쩍 치켜들자 국정감사장 분위기가 일순 싸늘해졌다. 한 달 전 서울시가 ‘낙지머리에서 중금속인 카드뮴이 다량 검출됐다’고 발표하면서 큰 파장이 일었다. 식약청과 농식품부는 ‘문제가 없다’고 반박했지만 서울시가 입장을 굽히지 않으면서 일어난 혼란이었다. 이윤석 의원은 낙지샘플에 중국산이 대거 포함된 점, 현지가 아닌 시장에서 낙지를 구입해 조사한 점, 검사요건을 갖추지 못한 검사장에서 검사한 결과를 마치 국내산 낙지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발표한 점을 조목조목 짚었다.
점심에 그는 오세훈 시장에게 무안낙지를 권했고, 오 시장의 얼굴에 낙지가 쫙 붙었을 때 사진기자들의 플래쉬가 터졌다. 저녁에도 시청 앞 낙지집에 갔는데 오 시장은 낙지를 먹으면서도 머리만은 먹지 않았다. 그가 주인에게 머리를 전부 가져오라고 하니 낙지 머리 10여 개가 상에 올라왔다. 이 의원은 오 시장과 낙지 머리를 나눠 먹었다. 결코 즉흥이나 쇼맨십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농촌에서 살아온 본능이었다.
"준비없이 국회의원이 되다보니 지역발전과 예산확보는 열심히 했지만 우리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는 일들은 미흡했던 것 같아요.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고 길잡이가 되는 일들을 했어야 했는데, 해야 하는 일에만 매달리지는 않았나 후회가 듭니다. DJ가 말한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갖고 정치하는 사람이 반 보라도 앞서가야 한다잖아요. 5년 넘게 정치일선을 떠나 있으니 그런 게 보입니다."
그는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나서 고(故) 김대중 대통령 아들인 김홍업 의원과 겨룬 일도 떠올렸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가 당선됐지만, 그는 가끔 ‘훌륭한 사람인데, 내가 양보했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요즘 고민에 쌓여 있다. 다시 광야에 서야 하는 것 아닌가.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고 지역발전의 새 비전을 마련하며 화합을 외치는 일에 나서야 하나. 그는 전남도청 소재지인 삼향면 출신에 목포공고를 나왔기에 내후년 총선에 목포 출마를 권유받고 있다.
정치에 대한 생각을 물었더니 "돈 안 드는 선거가 실현된다면 직업으로서 정치는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두 명의 자녀들에게 정치를 하지 말라 했고, 그의 친인척들도 못하게 말린다고 한다. ‘친인척들 가운데 정치인은 자신 한 사람으로 족하다’는 얘기인가 물었더니 "여러 여건과 상황을 고려한다면 작금의 정치는 친척과 가족에게 큰 고통이고 멍에이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20대에 비서생활로 시작해서 운 좋게 정치인이 됐지만 수만 분의 1에 불과한 성공 확률이다. 그리고 그렇게 성공했다고 하지만 크게 좋은 것도 없다. 그저 배우고 익히며 본능처럼 살아왔고, 운명처럼 받아들인 길이다.
하지만 마땅한 리더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것이 요즘 호남의 정치다. 이제 지역발전을 위해, 호남의 웅비를 위해, 국민 화합을 위해 누군가 숙명의 과업을 이어가야 할 때가 아닌가. 그는 국회의사당 앞에서의 네 번째 기도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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