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백년의 '희로애락' 가얏고 12현에 담다" 광주시 제18호 가야금병창 무형문화재 이영애 박세라 기자 |
| 2017년 05월 04일(목) 16: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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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가야금 때문에 얻은 아픔과 괴로움도, 가야금 덕에 풀어지고 치유됐다. 함께 한 시간, 현 위로 쏟은 땀방울만큼이나 좋은 소리로 이미 다 보답 받았다. 그랬으니, 또 족한 인생이라 말한다. 생의 희로애락을 가야금과 함께 해 온 이영애 광주시 제18호 가야금병창 무형문화재 이야기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험난했다. 인터뷰는 그가 제자들과 공부하고, 교류하는 서구 동림동 자택에서 예정돼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 시각 엘리베이터가 ‘점검 중’이었다. 그리고 또 하필이면 가장 꼭대기 층인 20층이었다. ‘산 공부’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계단을 올랐다. 더 이상 못 오르겠다 싶을 때쯤 그가 부른다. "아이고, 어쩌나. 고생이시네" 단정한 생활한복을 입은 이영애씨가 나를 맞았다.
50년 가야금 인생을 털어놓으며 그는 몇 번이고 눈시울을 붉혔다. 예능인들의 꿈인 ‘대통령상’을 거머쥐는 과정을 이야기할 때 또, 그의 정신적 지주이자 스승인 박귀이 선생을 떠올릴 땐 목이 메어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씨에게 처음 가야금을 안긴 것이 아버지였다면, 지금의 그를 있게 한 것은 바로 그의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이영애를 만든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힘이에요. 어린 시절 우리 전통 문화가 가진 힘을 믿었던 아버지가 가야금을 시켰고, 훌륭한 스승님과 연을 맺게 돼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이죠. 한평생 늘 이들의 은혜를 잊지 말자, 스스로 다짐했었죠."
10살 소녀는 집에서 가야금을 튕겼다. 가야금 소리가 ‘들을 만 해’지자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 열 댓 명을 초대했다. 딸의 가야금 연주를 들려주는 자리였다. 당시 소녀는 멋모르고 가야금을 연주했지만, 돌이켜보면 남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연주할 수 있는 ‘배짱’이 그 시절에 길러진 셈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학교를 다니셨던 이씨의 아버지는 그에게 늘 말했다. "우리의 문화가 살아야 우리나라가 사는 것이다"고.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그때부터 전통 국악에 깊은 관심을 뒀던 그다. ‘깊은 관심’이라는 표현보단 ‘국악에 미쳤다’는 표현이 옳겠다.
본격적으로 예능인의 길로 나아가면서, 부모님은 그에게 "연습하라"고 다그친 적이 없었다. "제발 그만하고 잠 좀 자라"고 하기 바빴다. 그만큼 가야금을 손에 쥐고 내려놓질 않았던 그다.
동신여자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그의 별명은 ‘이 욕심’이었다 한다. 학교를 마치고도 연습실에 눌러 앉아 가야금을 튕겼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불을 끄고 연주를 했다. 온전히 가야금 소리에 집중하고 싶어서다. 처음에는 자꾸 틀리던 것이 어둠 속에서 더 잘 보이게 됐다. 그러다가는 그는 이내 ‘고개’를 들고 싶어졌다.
"전통 가야금 산조는 고개를 숙이고 해요. 줄을 보면서 하는 것이라, 고개를 들 수가 없는 것이죠. 가야금이 아니라 관객들과 눈 맞춤하면서 연주하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가야금 연주를 하면서 소리를 하는, ‘가야금병창’의 맛을 보게 된 것이죠."
고개를 들자, 세계가 넓어졌다. 어렸을 때부터 판소리를 비롯해 해금·대금·거문고·아쟁 등 다양한 국악기를 섭렵했던 터라 어려움 없이 ‘소리’도 하고 ‘연주’도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다 그의 인생에 큰 전환기가 찾아온다. 1977년 KBS에서 방영했던 ‘전국민속백일장’에 출전하게 된 것이다. 그는 주 장원을 차지한 것을 시작으로 월 장원도 거머쥐었다. 또 월 장원들끼리 실력을 겨루는 연말 결선에 올라 기악부 대상의 영예를 안는다. 당시 귀했던 흑백텔레비전 2대를 부상으로 받아왔다. 하지만 이보다 더 귀한 일은 그의 영원한 스승 박귀이 선생을 만난 일이다. 그가 선 무대의 심사위원이었던 박귀이 선생은 이씨의 연주에 큰 감명을 받고 그를 제자로 들인다. 그때부터 일주일에 한 번, 광주와 서울을 오가며 가야금병창을 공부했다. 늘 ‘고개를 들고 싶다’던 그의 바람이 가야금병창 문화재였던 박귀이 선생을 만나 꽃을 피게 된 것이다.
대회에 나가 상을 휩쓸고, 인생의 스승을 만나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순탄한 삶을 살아온 것 같지만 그가 늘 ‘꽃길’만 걸은 것은 아니다.
전남도립국악단 단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당시 어마어마한 명인들이 배출되던 ‘전주대사습놀이’에 출전한다. 처음엔 역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해년마다 대회에 나갔다. 더 노력하지 못하는 자신을 채찍질하며 인고의 시간을 보낸다.
"연주를 잘하는 선배들을 보고 있자니 참 귀해 보여요. 내가 이 길을 가면서도 감동을 하는거죠. 그 후 나도 정말 귀한 사람이 돼야겠다 다짐했어요. 죽기 아니면 살기로 연습에 매달렸죠."
다음해엔 장려상, 또 다음해엔 우수상을 받다가 ‘차상’까지 올랐다. 전주대사습놀이의 꽃이 ‘장원’인데 꼭 한 번 받고 싶었다. 해년마다 울고불고 또 새롭게 시작했다. 나중에는 "내가 환갑 때까지 도전하면 장원 한 번은 하겠지"란 생각으로 버텼다. 그렇게 장원을 거머쥐기까지 8년이 걸렸다. ‘칠전팔기’하면 이영애가 거론되는 이유다.
2007년 장원을 하고 펑펑 울었다. 지나온 세월이 서럽기도 했고, 박귀이 선생에게 장원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자책 때문이기도 했다.
"박귀이 선생은 간암 투병을 하시다 돌아가셨죠. 배에 복수가 차서도 제 경연을 보러 오실 정도였어요. 사실 선생님의 수제자로 이름을 올릴 때도 많은 서울의 제자들이 입적을 반대했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김영애는 국악계 일을 할 애다’고 믿어주신 거에요. 정말 큰 사랑을 받은 제자죠."
스승의 ‘예언’대로 국악계에서 열심히 일했다. 그는 2007년 가야금병창 한 장르만을 대상으로 한 대회를 만들었다. ‘낙안읍성 전국가야금병창경연대회’가 그것으로, 올해로 10회째를 맞는다. 이씨가 그간 대회에서 받았던 상처 탓에 보다 투명하고 진솔한 대회의 장을 펼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성공리에 대회를 치르자, 순천에서 ‘같이 일 해보자’고 전화가 왔다. 때가 되면, 제자들과 산 공부를 들어가는데 한 담당자가 "산으로 들어가지 말고, 나와서 해보라"는 제안이었다. 낙안읍성 안에 한 공간을 비워줬고 그와 제자들이 둥지를 텄다. 산에서 공부하듯 가야금을 튕기고 소리를 하니, 낙안읍성에 놀러온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처음엔 문을 살포시 열어놓고 하다가, 이내 반치마를 차려 입고 마당으로 나갔다. 낙안읍성 주말상설공연의 시작이었다.
"공연을 하다보면 스승님 말이 실감나요. 스승님은 가야금 연주도 하고, 생긋 생긋 웃으며 소리도 하니, 보물 중에 보물이 가야금 병창이다 했거든요. 관광객들도, 외국인들도 정말 좋아하죠."
그의 연주를 들은 많은 사람들은 "깊은 강물 같다"한다. 좋다고 금방 촐랑대지 않고, 슬프다 하여 질질 짜지 않는, 깊이가 있다는 말이다. 연주와 소리로서 이야기를 전하고, 감정적으로 관객과 소통하는 가야금병창의 매력이 도드라지는 부분이다.
2014년 그는 광주시 제18호 가야금병창 무형문화재에 이름을 올렸다. 예능인으로서 최고 영예를 받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멀었다 한다. 문화재로서 끝이 아니라, 문화재로서 해야 할 새로운 역할을 위임받았다고 믿는 그다.
"문화재 지정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죠. 무대에서 감동적으로 연주를 보여주는 것, 끊임없이 가야금병창으로 시민들을 만나는 것이 제 역할이자 의무죠. 그래야 문화재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거든요. 다만 이전에는 나의 예술 세계만을 위해 뛰었다면 이후엔 가야금병창 분야의 발전을 이끌고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내는 일이 남아있는 것 같아요. 가야금에 ‘미쳤다’던 옛 시절처럼 언제나 노력하는 연주자가 되고 싶어요."
-가야금병창 무형문화재 이영애는
△원광대학교 국악학부 박사과정 수료
△제25회전주대사습놀이 가야금병창부문 장원
△제12회우륵전국가야금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
△(사)낙안읍성가야금병창보존회 이사장
△임방울국악진흥회 이사
△광주민속박물관회 이사

2026.10.10 (토) 20: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