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예술인] 한국화가 이선복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며 자연과 인간이 호흡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궁극적 목표라는 한국화가 묵정 이선복씨. 묵정은 광주예술고등학교에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 중이다. 화가이자 교육자로의 삶을 살고 있는 그를 만나기 위해 지난 6월11일 오후 학예관을 방문했다. 그가 주로 학생들을 지도하는 한국화실은 4층에 위치해 있다. 그곳에서 제자들을 지도중인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10여년만에 열린 세번째 개인전(7.13∼19일 무등갤러리)을 언급했다. 두번째 전시때는 수묵을 기본으로 남종화를 했고, 수묵풍경을 선보였다면 ‘묵향만리’(墨香萬里)라는 타이틀로 열린 이 전시에서는 수묵을 주로 추구했다. 작품 ‘무등산 전도’를 보면서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무등산 주변의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남종화를 기본으로 하면서 현대 점선면에 걸맞는 그림을 그리는데 몰입했다는 설명이다. 이를테면 풍경과 점경, 인물이 과거의 기조였다면 이번 전시에는 물에 비친 풍경을 반영한 연구작품 등을 출품했다.
이 전시에는 ‘무등산 전도’를 포함해 ‘무등만월’, ‘무등도원’ 등 어머니산으로 불리는 무등산 및 둥근 세상과 희로애락을 품고 안녕과 평화의 염원을 한 가득 담은 듯한 달(月)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풀어낸 작품들, 그리고 호랑이 등위에 무등산을 올려놓아 상상력이 돋보인 민화풍의 ‘무등산 호랭이’가 출품됐다. 이 작품들은 200∼300년된 간찰에서 떨어져 나온 조선시대 종이를 구해 조각을 덧대어 현대감각에 맞게 재구성했다는 설명이다.
출품작들은 모두 수묵의 전통적 형식과 본질을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이라는 범주 안에서 수묵이 갖는 특성을 발현하고 있는 가운데 자연의 소리와 향내를 공존하도록 하는 동시에 매개체 역할을 하게 하면서 자연이 갖는 섭리와 삶의 본연을 수묵의 형식을 빌어 먹색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그의 탄탄한 구도와 필력을 엿볼 수 있는 ‘오는 봄’, ‘나들이’, ‘소식’, ‘초설’, ‘귀로’, ‘몽유’, ‘꽃놀이’, ‘세월’, ‘국향’, ‘지난 날을 붙잡고’ 등 그만의 독창적인 시각과 감성으로 사물을 해석하고 풀어낸 작품 50여점이 출품됐다.
이처럼 묵정의 수묵 세계가 한 일가를 이룰 수 있었던데는 어린 나이에 아산 조방원(1926∼2014)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 탄탄한 구도와 필력을 갖추게 된 것이 결정적 출발점이 됐다. 그래서 문기(文氣)가 있는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 정평이 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작품 중 설경은 화단에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묵정은 15세때 남도 수묵화의 거장 아산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그의 미술 운명에 큰 변화를 맞는다. 아산이 그의 공부를 뒷받침해주지 않고, 대학까지 보내주지 않았다면 오늘의 자신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산 선생의 도움 덕분으로 교직에 종사하며 그림작업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아산 스승께서 "좋은 선생이 되는 것도 의미있지만 좋은 화가가 되는 것도 의미있다"고 한 말씀을 잊지 않고 마음에 되새겼다. "좋은 그림을 그리면 좋은 예술 선생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한다.
"197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작가들이 그림으로 생활이 가능했어요. 그것을 보고 그림으로 먹고 살 수 있겠구나 생각했는데 1980년대 이후 어려워졌죠. 저는 교직에 있어 그나마 경제적으로 고충이 덜 했지만 지금 미술환경은 최악입니다. 우리 세대들이 힘든 시대를 겪은 만큼 후예들이나 제자들은 더 좋은 미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요"
그러나 미술 전반에 대한 걱정은 차치해두고라도 수묵에 대한 근심은 저버릴 수 없다. 예고를 졸업한 뒤 대학에 진학하더라도 수묵이 어렵고, 힘들다보니 수묵을 한동안 다루다가 채색이나 비구상으로 작업을 바꾸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수묵으로는 작품도 잘 안 팔리는 형편이다. 조금 어렵더라도 남종문인화 장점이나 심오한 철학, 수묵의 맛이 있으니 젊은 작가들이 남종화 정신이니 수묵화 정신을 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피력했다.
특히 호남화류 부흥 등 수묵의 활성화를 강조했다. "‘국제수묵비엔날레’가 활성화되고, 호남의 진경, 호남의 남종화가 발전하기를 기대합니다. 그전에는 남종화가 답보상태였죠. 시대적으로 토대가 미비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이 지역의 수묵운동이 활발히 활성화됐으면 해요. 진일보한 새로운 ‘호남화류’(남도그림바람)가 부흥될 것입니다. 더더욱 이쪽에 그런 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그러면서 그는 광주가 그동안 아무리 극복하기 힘들더라도 민초들의 삶을 망라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항상 하지못한 일들을 혁명으로 부흥을 이뤄냈다는 점을 생각하면 수묵 역시 부활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다.
"역량있는 젊은 작가들이 대견해요. 저도 학생들에게 떳떳한 선생님이자 화가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좋은 그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구요."
현시대 수묵에 대해 묻자 그는 관념과 진경을 들어 설명했다. 아산 선생은 남종화의 관념을 많이 했는데 지금까지는 관념으로써의 작품 승화는 어려울 것이다. 현재 작가들은 관념과 진경이 절충된 그림을 한다. 남종화 정신을 기본으로 한 주변의 사물, 인간의 삶의 모습과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는 한편, 1980년대 민중미술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 역할을 했던 것처럼 순수미술이 힐링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내비쳤다. 즉 민중미술이 했던 역할을 순수미술로도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순수미술로 상처받은 사람들이 위안과 치유를 얻어갈 수 있는 순수미술을 꿈꾼다.
"아산 선생님으로부터 순수미술을 배웠기 때문에 그 순수미술로 민주의 삶을 보듬고, 치유하며 위안을 주는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수묵을 버리지 않고 관념이 아닌, 진경이라든가 인간의 삶을 담아내기 위해 더욱 더 노력을 펼칠 각오입니다."
수묵으로부터 출발한 그의 작업은 수묵으로 끝맺음할 가능성이 커보인다. 수묵의 전통을 계승하되,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한 변화의 수묵을 늘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수묵이 워낙 어렵지만 그 수묵으로부터 단 한번도 온전하게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수묵으로만 7∼8가지의 색을 표현해낼 수 있다고 밝힌다. 수묵은 그에게 숙명이었던 셈이다.
수묵의 작업이 고루하고 관념으로 치부되더라도 짓눌리지 않고 채색이든, 비구상이든 다양한 장르에서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수묵으로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조금씩 찾아내 가볼 요량이다. 한때 수묵을 많이 쓰다 보니 선배들의 아류 밖에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은 적도 있다고 술회한다. 그래서 감필법(減筆法)과 발묵법(潑墨法)이 아닌, 구륵법(鉤勒法)과 백묘((白描·선묘)에 의한 사물의 표현, 인물이나 풍광 작업을 10여년동안 펼쳐왔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 구륵이나 백묘와 함께 수묵이 더 가미된 기법을 구사한다.
마지막으로 어떤 작가로 기억되기를 바라는가라는 질문으로 인터뷰를 갈무리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작가보다는 그림이 좋다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한국화가 이선복은
△충남 부여 출생 △전남대학교 미술교육과 및 한국교원대 대학원 졸업 △개인전 3회 △단체전 다수 △한국의 자연전 △부산·광주교류전 △광주광역시미술대전 대상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광주시미술대전·전라남도미술대전·무등미술대전·한국화대전 심사위원 및 초대작가 △한국미협 회원 △묵노회원 △원봉회원 △한동아리회원.

고선주 기자 사진=최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