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역사는 앞으로 나아간다

[칼럼]무등로에서
양지영 2025 광남일보 신춘문예 동화당선자

전라도인 admin@jldin.co.kr
2025년 04월 02일(수) 18:12
그날은 한겨울 추위 탓에 일찍 귀가했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다음 날 출근을 위해 이른 잠자리에 들 참이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문자 메시지에 텔레비전을 켰다. 헬기가 국회의사당 마당에 내려앉더니 총을 든 군인들이 국회 건물로 들어가기 위해 창문을 깨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영상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 착각될 정도였다. 도로 1980년으로 돌아가는 건가? 뭐가 뭔지 정신이 어리둥절한 사이 대통령이 발표한 계엄 포고령이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나는 이른바 ‘민주화 세대’는 아니다. 민주화는 책과 영화로 배웠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그제야 광주 금남로를 가보았을 정도니까. 민주화를 위해 몸 바쳐 싸운 사람이 아닐지라도 그날 밤 사건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갖게 했다.
다음 날부터 많은 이들이 거리로 나왔다. 매서운 바람에 맞서고 찬 길바닥을 체온으로 데우며 몇 날 며칠을 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나도 장갑, 털모자, 핫팩으로 중무장을 하고 친구와 주말마다 거리로 나갔다. 나의 선배들이 피 흘려 이루어 놓은 민주주의가 파괴되었다는 분노가 치밀었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광장에 서니 수십 년 전 대학생 때, 아스팔트 길 위에 앉아서 구호를 외치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는 다시 이렇게 목소리를 높일 때가 또 오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스무 살 새내기였던 내가 머리 희끗한 중년이 되었는데도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싸워야 하는 현실이 참담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광장의 분위기는 그때와 달랐다. 엄숙함과 비장함 속에서도 흥과 여유가 느껴졌다. 군중 속에는 많은 어린아이들과 젊은이들이 눈에 띄었다. 부모와 친구들과 나란히 앉아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이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광장은 그야말로 전 세대가 함께 어우러진 ‘화합의 장’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그들이 흔드는 응원봉이었다. 콘서트장에서나 보았던 응원봉이 광장에 등장하다니……. 신기하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설레었다. 수년 전 촛불이 광장을 뒤덮었을 때와 다른 느낌이었다.
각자 자기 개성을 드러내듯 그들이 흔드는 응원봉은 모양도 가지각색이고 뿜어내는 빛도 제각각이었다. 젊은 시절의 나는 맨주먹을 하늘 높이 올려 들었는데 광장에 선 젊은이들은 주먹 대신 자기만의 응원봉을 높이 들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맨주먹에서 촛불로 촛불에서 응원봉으로 표현 방법은 바뀌었지만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나이와 성별을 떠나 우리는 이미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었고 스스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역사 속에 당당히 서 있었다.
이제 새로운 민주주의가 시작될 때가 왔다. 우리가 지나온 역사에 깊은 뿌리를 내린 채 새잎을 틔우고 더 짙은 초록을 드러내리라 기대한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흘러서 온 민주주의를 다시 한번 펼쳐보자. 지금까지 그랬듯이 역사는 앞으로 나아간다.
전라도인 admin@jl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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