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구선수로 활약한 25년은 추억입니다." [야구이야기]해태 타이거즈 레전드 안방마님 최해식 전라도인 admin@jldin.co.kr |
| 2018년 03월 29일(목) 17: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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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해식은 초등학생 시절 학교 선생님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했다.
"익산 이리초등학교에 다닐 때 야구부가 창단됐죠. 당시 담임 선생님께서 체격이 좋고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야구부로 넣었어요."
이렇게 그는 뜻하지 않게 야구를 시작했지만, 창단 3년 만에 전국대회에 나가는 성과를 거두며 기나긴 야구 인생을 시작했다.
초등학교 야구선수들은 정해진 포지션 없이 운동하는 까닭에 그의 주 포지션 선택은 군산남중학교에 진학한 뒤 이뤄졌다.
"당시 어깨가 좋아 투수, 외야수, 포수 등을 놓고 고민하다 감독님의 판단에 따라 포수로 결정됐어요. 다른 친구들보다 포수 미트에 들어오는 공을 잘 잡았어요. 그래서 포수가 된 거죠."
최해식이 본격적으로 ‘야구선수의 꿈’을 갖게 된 것은 군산상고로 진학이 확정됐을 때다.
당시 군산상고는 조계현, 김성한 등 걸출한 스타들을 배출한 야구 명문 고등학교였다.
군산상고에 진학한 뒤 그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전국대회에 나가면 ‘신’으로 통했다. 고교시절 통산타율이 5할에 육박했고, 2학년 때는 김동수 선수와 함께 청소년 국가대표에 승선했다. 이 무렵 포수로서의 완성도가 만들어졌다.
특히 그는 2루 송구까지의 시간이 1.60초로 한국 야구에서 가장 빠른 포수로 기록돼 있다. 한국 야구 역사에서 뛰어난 포수로 손가락 안에 드는 진갑용이 2.0초, ‘앉아 쏴’라는 송구법을 선보인 조인성이 1.7초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이런 송구 능력을 갖추기까지 힘든 과정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어깨를 다치고 난 뒤 공을 제대로 뿌릴 수 없었다. 그래서 공을 포구하고 빼고 던지기까지 시간을 최대한 줄이려고 폼을 간소화했다"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매일 같이 이미지 트레이닝과 쉐도우 모션을 취했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 야구에서 대도로 통하는 정수근 전준호 유지현을 제외하고는 내가 출전하는 경기에서 선수들이 2루 도루를 시도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또 투수들이 공을 편하고 낮게 던질 수 있도록 포구 자세를 낮춘 것도 이 시절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건국대를 진학한 그는 1990년 프로 세계로 입문하게 된다.
첫 팀은 쌍방울 레이더스였다. 신생팀인 만큼 쌍방울의 첫 시즌 성적은 중요했다.
때문에 경기를 이끄는 포수 마스크를 신인이 착용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는 "투수들을 안정적으로 리드하고 수비 위치 등 게임 전체를 조율하는 포수인데, 그럴 만한 경험을 축적하지 못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의 야구 인생의 전환점은 1994년 시즌 중 해태로의 이적이다.
당시 쌍방울은 급성장한 박경완을 백업해 함께 시즌을 이끌 주전급 포수를 원하고 있었다. 해태에서는 장채근이란 카드가 있었고 쌍방울은 최해식을 내어주며 맞트레이드가 성사됐다.
"트레이드 소식에 기뻤어요. 주전을 꿰차기 위해 죽기 살기로 했죠."
그리고 그는 타이거즈의 주전 안방마님의 등번호인 22번을 받았다. 최해식 전에는 트레이드 된 장채근이 1987년부터 사용했고, 이후에는 김상훈이 주전 포수로 2002년부터 2014년까지 사용한 상징적인 등번호다.
그는 22번을 달고 해태의 안방마님으로서 1996년과 1997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그에게 1996년은 잊을 수 없는 시즌이다.
타이거즈의 레전드 선동열이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하고, 이종범, 이대진이 방위 복무로 시즌 초반 결장이 불가피했기 때문. 여기에 베테랑 선수들의 크고 작은 부상으로 팀은 ‘불안한’ 시즌을 앞두고 있었다.
코칭스태프들은 괌 전지훈련에서 평소보다 선수들을 강하게 몰아붙였다. 이로 인해 고참선수들과 코칭스태프 사이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이순철, 조계현, 이건열 등 고참급 선수들과 중견급 선수들이 ‘이런 식으로 더 이상 훈련을 못하겠다’며 단체행동에 나서며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대립하던 선수단은 결국 한 발씩 물러서며 팀 분위기를 일신했다. 시즌 초반 현대 유니콘즈, 쌍방울과 함께 ‘3약’ 구단으로 예측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4월 군 복무를 마친 이종범과 이대진이 팀에 합류하며 승승장구했다.
6월 들어 4위까지 순위가 상승했고, 7월 20경기에서 18승 2패를 거두며 1위로 올라섰다. 결국 1996시즌 또 한 번의 한국시리즈 직행을 만들어냈다. ‘아무리 해태라도 이번에는 어렵지 않을까’라는 팬들의 시선을 비웃는 듯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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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게 한국시리즈에 승선했지만 최해식은 야구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사건을 겪는다.
바로 ‘포스트 시즌 1호 퇴장’이다. 1996년 10월 23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해태와 현대의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김호인 주심에게 퇴장 명령을 받은 것.
"지금은 추억"이라며 웃지만 그에게 한국시리즈 6차전은 억울했다.
이날 사건은 해태가 3-2로 쫓기던 8회말 1사 2루 현대 이숭용의 타석에서 발생했다. 해태의 세 번째 투수 이대진의 2구째 커브가 한복판에 들어갔으나 김 주심이 볼로 판정했다. 이런 판정에 당시 포수 미트를 끼고 있던 그는 마스크를 바닥에 던지며 격렬하게 항의했고, 곧바로 퇴장 선언을 받았다.
퇴장이 선언되자 해태 선수단이 몰려나와 항의했고 일부 관중들마저 운동장에 난입하는 사태가 발생해 10여분 동안 경기가 중단되기까지 했다.
해태는 9회초 2점을 달아나 5-2로 이기고 8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그는 "시즌 내내 볼 판정이 이상했다. 특히 이 경기에서 4회말 이강철이 던진 9개의 공이 연속으로 볼 판정을 받아 납득할 수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사실 이대진이 7차전 선발 예정이었는데 6차전 마운드에 세울 투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등판했다. 때문에 이 경기에서 지면 우승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운데 들어온 공이 볼 판정을 받자 결국 쌓인 게 터진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퇴장 후 라커룸에서 우승 소식을 듣고 한동안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이렇게 1996년 시즌 우승과 함께 1997년 연속 우승을 달성하며 승승장구할 것 같던 그의 야구 인생에 위기가 찾아온다.
그의 뒤를 바쳐줄 백업 포수가 없었기 때문. 그는 1998년 114경기, 1999년 130경기, 2000년 101경기에 출전하며 어깨에 문제가 온 것이다.
결국 2001년 플레잉코치로 한 시즌을 더 뛰고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잠시 배터리 코치로 KIA에서 활약하다 이내 중국음식점 사업으로 인생 2막을 연다.
그는 타이거즈의 레전드로서 아직도 KIA를 응원하고 있다. 매 시즌을 앞두고 KIA의 성적을 예측하는 게 일이 됐다.
"지난해 우승 전력을 보존한 KIA는 올 시즌 더 강할 것이다. NC와 2강을 이룰 것 같다"며 "4월부터 안정감을 잡을 것으로 생각된다. 불펜진이 불안하지만 내·외야 선수층이 두터워진 것 같다"고 올 시즌을 진단했다.
이어 "김주찬, 이범호가 있어 경기 운용이 편했는데 베테랑 정성훈의 합류로 게임 관리가 더 편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야구에서 한 발 떨어져 사업을 하고 있는 그에게 남은 소원은 아들의 활약이다.
그의 아들인 상인군은 광주 수창초, 진흥중, 진흥고를 졸업하고 NC 다이노스에 투수로 입단했다.
야구가 얼마나 힘든 직업인지 잘 알고 있기에 처음에는 ‘야구를 하겠다’는 아들을 말렸다. 하지만 끝내 고집을 꺾지 못했고, 지금은 야구선수로서 대성하길 바라며 묵묵히 응원하고 있다. "앞으로 아들의 야구 인생을 지켜봐야죠. 제가 봤을 땐 타자로서 대형선수 감인데…. " 해태타이거즈의 레전드 최해식은 이렇게 여운을 남기며 인터뷰를 마쳤다.

2026.10.23 (금) 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