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조각 알리는데 온힘…목공예 활성화에 기여"

[남도명인] 광주시 목공예명장 1호 박영기
중 2때 목공예에 매료 1979년부터 석심공예 운영
"나무 만지고 있으면 마음 안정 편안" 소감 내비쳐
효령노인대학 등서 강의…'목조각학교'개설 꿈꿔

전라도인 admin@jldin.co.kr
2018년 08월 27일(월) 18:20
그의 작업실은 광주 북구 중흥동에 자리하고 있다. ‘내비게이션’(navigation)에 의지해 갔더니 도착지점은 있는 데 그의 공방이 보이지 않았다. 두바퀴 반 정도 골목을 돌고 나자 우연히 지나치다 1층에 부동산이 자리한 건물 2층을 보니 그의 작업실이 있었다. 건물 1층 입구에도 공방 명패가 있지만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지난 6월16일, 하필 토요일 오후 날씨가 무더운데다 몇 바퀴 허우적거리고 난 뒤여서 피로가 몰려왔다. 계단을 타고 올라갔더니 그의 공방이 나왔다. 그의 공방에는 각종 관련 도구들과 작품에 쓰일 목재가 가지런히 정돈된 채 필자를 맞았다. 그는 광주시 목공예명장 1호(2013년 7월 지정)로 지정돼 전통을 이으면서 목공예 대중화를 위해 온힘을 쏟고 있는 박영기 명장이다. 그는 62세의 나이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아마 나무와 함께 해온 삶이어서 젊게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 명장이 목공예를 처음 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학교 2학년 때 공방 개념이 성립하기 전이었는데 그때 자신의 삼촌이 제재소 식으로 목공예를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다. 소반 등을 만드는 삼촌의 목공예조각을 접하면서 반하기 시작했다. 군대 입대하기 전 2년 동안 서울에 머물며 불교조각의 매력에 빠져 지내기도 했다. 지금은 부조조각에 몰입 중이지만 그때 불교조각은 수준도 높았고, 수입도 작지 않았다는 게 그의 회고다.

그가 설립해 운영중인 석심공예는 1979년 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수석좌대(돌받침)도 했었다. 이것이 공방의 이름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설명이다. ‘석심’의 뜻이 ‘돌같은 마음’이라는 것이다. 작업만 석심이 지배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는 1979년 3월11일 오픈일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아간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잊을 수가 없다. 그는 핸드폰 뒷번호 역시 1979로 했을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의 핸드폰 뒷자리가 1979라는 것이다. 광주시 동구 지산동 법원 인근에서 22년간 공방을 운영한 뒤 현재의 자리로 옮겨와 목공예 전통의 명맥을 잇고 있다.

지산동 시절 그는 작품을 많이 하면서 각종 공모전에 다수 출품해 좋은 결과를 거뒀다. 전국대나무공예대전 국무총리상과 장관상 2회, 전국공예품경진대회 입선 및 장관상 2회 등 수상했으며, 특허만도 4가지를 취득했다. 다단 적층식 수납장치를 비롯해 다단 적층식 목공예 수납장의 제작 방법, 다기능 찻상(1), 다기능 찻상(2)이 그의 특허품이다. 또 그는 실용신안과 디자인 등록도 7가지에 이른다. 마우스 커버와 도장함. 낙관함, 메모지 케이스, 동전 보관함, 벼루, 보석함 등이다. 이같은 성과에 유추해 보면 그의 하루는 늘 나무로 깨어나고 나무로 잠든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돈이 생기면 나무를 사는 데 쓴다. 그래서 집에서는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하던 때도 있었다고 술회한다. 그가 목공예에 대한 집념이 없었다면 이같은 성과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목공예로 시작해 목공예로 끝나는 일상인 셈이다.

먼저 목공예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꾸미지 않은, 투박하지만 간결한 답이 돌아왔다.

"제 인생의 전부죠. 저는 목공예가 너무 좋아요. 나무만 만지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한 느낌이 듭니다. 목공예는 특정인들의 향유물이 아니예요. 일반인들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게 목공예입니다."

그는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거나 효령복지타운과 광주기계공고 등 여기저기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달려가 강연을 한다. 효령복지타운 내 노인대학에 6년째 출강하면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목공예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어르신들 반응이 좋다고 한다. 목공예를 경험해보면 목공예 대한 편견이 사라진다는 설명이다. 취미로 하기에 더없이 좋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목공예를 쉽지 않다고 생각해 접근을 어려워 합니다. 생활도자기처럼 생활목공예로 생각하고 접근하면 쉽고 재미있다는 것을 금방 느낍니다."

또 그는 해외에서의 목공예 사례들을 잊지 않고 들려줬다. 2008년께 관광공모전 동상을 수상한 것이 계기가 돼 호주를 방문했는데 그곳에 호주관광청의 목공예프로그램을 보고 큰 감명을 받는다. 이어 2015년에는 일본 공예단지 견학과 명장 교류전이 있었으며, 2016년에는 베트남과 광주 간 공예인 교류 당시 베트남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15일간 머물며 베트남 작가들과 조각교류를 진행했다. 이전에는 목공예를 포함해 베트남 작가 3명이 광주에 교류차 방문했었다. 이때 교류가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돼 버린 것이 못내 아쉽다는 반응이다.

부조조각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그에게 그동안의 부조조각 변화와 특허에 관한 생각을 들을 수 있었다.

"옛날에는 벽에 걸어놓고 하는 전시용이 많았는데 지금은 실용적 부조조각에 집중하고 있어요. 특허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에 주로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목공예 기술을 접목해 생활공예로 나가고 있는 것이 현재 추세이기도 하구요. 광주에 목공에를 하는 분이 거의 없어요. 시급한 게 인력을 양성해 후학들을 길러내는 일이예요. 목공예 전통을 계승하는 데 역점을 두겠습니다."

그는 다시 태어나도 목공예인으로서 살아갈 생각이다. 목공예로 인해 생기는 수입을 가지고 나무를 사버리는 통에 아내로부터는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지만 좋아서 하는 것이 목공예라는 것이다.

아울러 그의 작업실 한편에는 전시장이 있다. 그가 젊은 시절부터 해온 다양한 작품들이 진열돼 있다. 거기서 그의 목공예인으로서의 삶의 족적을 엿볼 수 있었다. 작품을 둘러보는 동안 그의 설명과 시연이 곁들여져 한층 더 작품에 대한 이해를 쉽게 가져갈 수 있었다.

이런 가운데 목공예 활성화와 관련해 인프라 구축의 중요성도 잊지 않았다.

"사람들을 많이 가르쳐 일본이 인프라를 구축해 간 것처럼 우리도 인프라를 잘 구축해 나가야 합니다. 인프라가 잘 구축되면 전반적으로 목공예를 보는 시각이 달라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구매자 폭도 확대시킬 수 있어요. 저는 공예가 앞으로 전망이 괜찮은 편이라고 봅니다. 먹고 사는 게 좋아져 수작업을 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구요. 그만큼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에 전망이 좋다고 보는 겁니다."

올 12월에는 효령노인대학 목공예 수강 어르신들의 작품을 한데 모아 작품전을 열 예정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목공예 관련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꿈이라고 언급했다.

"일반인들이 서각을 많이 하지만 서각도 목공예의 일부죠. 부조조각을 널리 알리는데 온힘을 쏟을 작정입니다. 그리고 ‘목조각학교’를 개설해 목조각을 널리 알리면서 목공예 활성화에도 기여하고 싶습니다."
전라도인 admin@jldin.co.kr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
회사소개회사연혁회원약관개인정보보호정책제휴문의고충처리인광고문의기사제보
광남일보 등록번호 : 광주 가-00052 등록일 : 2011. 5. 2.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광주 아-00193 등록일 : 2015. 2. 2. | 대표 ·발행인 : 전용준

광주광역시 북구 무등로 254 (중흥동 695-5)제보 및 문의 : 062)370-7000(代) 팩스 : 062)370-7005 문의메일 : design@gwangnam.co.kr

본사이트에 게재된 모든기사의 판권은 본사가 보유하며 “발행인” 의 사전 허가없이는 기사와 사진을 무단전재 복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