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꾸눈광대가 쏘아올린 ‘80년 5월’의 희망

[예술인플러스] 국회서 공연 펼친 애꾸눈광대 이지현

2010년 5월 ‘1인극 품바’ 시작해 146회 맞아
5·18민주화운동 아픔 신명나는 놀이로 ‘승화’
‘어머니의 노래’로 변화…전국 순회공연 이어

전라도인 admin@jldin.co.kr
2019년 01월 07일(월) 16:15
1980년 5월 당시, 현장에서 투쟁하다 한 쪽 눈을 잃은 이지현씨의 자전적 이야기…. 연극 ‘애꾸눈광대’ 소개 기사를 쓸 때면 늘 빠지지 않는 문구였다. 공연 사진들을 하나씩 훑어볼 때 마다 가슴이 저렸다. 사진 속 광대 분장을 한 그가 웃고 있었다. 그런데 꼭 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단순히 ‘광대’가 주는 모순적인 이미지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11월12일 평일 낮 한가로운 카페에서 애꾸눈광대 이지현(이세상)씨와 마주앉았다. 주문한 커피가 앞에 놓이자, 그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고단했지만 찬란했던 지난날 광대의 삶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2010년 5월이 시작이었어요. 5·18민주화운동 30주년이 되던 해였는데 참 허탈하더군요.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세상은 변한 게 없었고, 진실은 저 너머에 가려져 있었으니까요. 그때 결심이 섰어요. 5월에 관한 이야기를 작품으로 표현해보아야겠다 했죠."
그길로 그는 도청 앞으로 갔다. ‘애꾸눈 품바’라는 별칭으로 1인극이 시작됐다. 80년 5월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투사 이지현이, 광대로 돌아온 사건이었다. 그를 알던 사람들은 원래 끼가 있었던 사람이니, 그의 1인극이 울분을 토해내는 창구 쯤으로 여겼다. 그런 ‘틈’이라도 없다면 그의 삶은 더없이 팍팍했을 것이니까.
"광대 분장을 하고선 마술을 보여주고 춤도 췄어요. 그러다 2011년 11월의 첫날 ‘애꾸눈광대 29’라는 타이틀로 첫 공연을 시작했죠. 5·18 때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다는 내용의 1인극이었어요. 29라는 것은 1980년 그해 제 나이를 의미해요. 부정한 폭력에 눈을 잃었던, 제 꿈들이 짓밟혔던 그 해 저는 스물아홉 살이었습니다."
스물아홉. 그는 하고 싶은 게 많던 건장한 청년이었다. 악극단 단원으로 일을 했고, 고교야구가 전성기를 이루던 시절에는 재경호남고교야구 응원단장을 맡았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좋았고, 다분한 끼를 나누며 사는 게 그의 꿈이었다.
"이 소박한 꿈을 뭉개버린 것이 바로 5·18이었죠. 당시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광주의 참상을 전해듣고는 곧바로 내려갔어요. 한 도시가 통째로 잿빛에 담가 진 것만 같은, 죽어 버린 것만 같았던, 그 참혹한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그는 이후 군부 독재의 잔혹한 폭력에 맞서 싸웠고, 사상자 수습에 손을 걷었다. 그러다 군인이 휘두른 개머리판에 맞아 한 쪽 눈을 잃었다. 상무대로 끌려가 모진 고문도 수없이 당했다. 그런 그의 이야기가 1인극으로 풀어졌다. 마술·댄스·난타·각설이·성대모사 등 즐거움을 선사하는 다양한 장르가 총출동했다. 무대 위 그는 웃었지만, 광주시민들은 그 탓에 울었다.
1인극으로 공연을 이어가다, 무대극으로 합을 맞춰간 것이 바로 2012년이다. 그해 5월9일 어버이날을 맞아 빛고을아트스페이스 소공연장에서 ‘애꾸눈광대’ 공연을 열었다.
객석에는 오월어머니들이 그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애꾸눈광대’ 초연 무대나 다름없는 공연이었다.
"광주의 애환을 끌어안고 사는 분들이 바로 어머니들이었기에, 오월어머니들께 첫 선을 보이고 싶었습니다. 극은 5·18 현장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신명나는 광대놀이로 풀어낸 것이에요. 아픈 역사이지만, 아픔으로만 끝나지 않도록. 웃음을 주고 이내 희망을 전하는 진짜 광대가 되고픈 제 마음을 담아낸 것이죠."
그는 그렇게 146회 공연을 펼쳤다. 광주는 물론 서울, 부산, 인천, 전주, 제주, 대구 등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초청공연을 열었다. 그 자리에는 고 안병하 치안감(당시 경무관) 유가족과 택시운전사 김사복씨 아들 김승필씨 등을 비롯해 인권위·국방부 조사관들이 함께해 공연을 관람했다.
처음에는 5·18이란 역사적 사실에 대해 생소해 하던 사람들도 그의 무대를 인상 깊게 보았다. 공연이 막을 내리고, 따로 찾아와 눈물을 쏟는 사람들도 있었다.
"부산에서 제 공연을 보러 왔다는 한 관객이, 손을 꼭 잡고는 고맙다고 하셨죠. 어떤 학생은 부모님들이 이렇게 고생해서 이뤄낸 민주주의임을 새삼 깨닫게 됐다면서 감사 인사를 하더라고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요. 그때, 참 작지만 소중한 일들을 해내고 있구나 싶어 가슴이 뿌듯해집니다."
‘애꾸눈광대’는 2017년 변환점을 맞는다. 바로 이 시대의 ‘어머니’를 극의 중심으로 끌어온 것이다. 부제는 ‘어머니의 노래’다. 극은 실제 이지현씨의 슬픈 가족사를 담고 있다.
"우리 어머니는 한이 참 많은 분이에요. 저도 그렇고, 제 남동생 또한 데모를 하다가 잡혀갔어요. 당시 국가에 반기를 들면 ‘폭도’로 몰리던 때였으니까요. 아들들이 출세는 고사하고 결혼도 못한다고 하니 어머니가 속병이 깊게 나셨죠. 그런 어머니의 한을 작품에 녹여냈어요. 이것은 평생 제대로 된 효도 한 번을 못한 제가 어머님께 바치는 전상서나 다름없어요."
그의 어머니는 일제강점기에 남편을 강제 징용 보내야 했고, 6·25도 겪었다. 세상이 살만해지는 가 싶더니 1980년 5월이 또 다시 그의 삶을 흔들어놓았다. 이씨의 기억 속 어머니는 ‘흥’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어쩌면 그 흥은 어머니가 제 삶을 살아 내기 위한 하나의 지혜 혹은 방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집에 혼자 계시는 걸 못견뎌하셨어요. 시간만 나면 산으로 나물을 뜯어다가 남광주시장 앞에서 파셨죠. 아마 가슴에 응어리 같은 것들이 어머니의 일상들을 방해했던 모양이에요. 그렇게 한으로, 눈물로 모은 돈들을 제가 많이도 가져다 썼습니다. ‘어머니 곧 갚아드릴게요’하고선…. 두 말 않고 돈을 내어주던 어머니가 있었기에 애꾸눈광대 공연을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 어머니는 아들이 당신에게 바치는 ‘어머니의 노래’를 못 보고 눈을 감으셨다. 2015년 2월 일본 공연을 다녀온 뒤, 그는 앙코르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오후 7시30분 공연이었는데 그 한 시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런데 갈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마지막을 함께 해드리지 못한 것이죠. 극을 마무리 짓고, 마이크를 잡았어요. ‘일본에 남편을 빼앗기고, 육이오 때 젊음을 바치고 오일팔 때 큰 상처를 입은, 한 많은 분이 오늘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제 어머닙니다’라고 관객에게 전했습니다. 그날 저도 울었고, 관객들도 울었죠. 그리곤 이내 어느 때 보다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마지막까지 저는 불효자식이었어요."
그의 어머니 삶만큼이나 이씨의 생 또한 고단했다. 얼른 떨쳐버려야 좋을 과거의 상처를 꺼내고, 터트리고, 또 드러내보여야 하는 광대의 삶이었기에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희망으로 가는 길’이라 여긴다. 상처가 상처로만 남아있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자꾸만 들여다보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들이 곧 마음을 치유하게 함은 물론이고, 오월의 자긍심을 고고히 지켜내는 일이라 믿는다.
"80년 5월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지만, 그 희생이 있었기에 우린 오늘 희망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움트게 한 것이 바로, 광주의 역사이죠. 슬픔을 뚫고, 희망으로 나아가는 것. 더 나은 세상으로 변화하는 데 작게나마 힘을 실어주는 일. 그것이 바로 광대가 가고자 하는 오직 ‘한 길’입니다."
전라도인 admin@jl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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