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된 머리카락…미용에서 아트를 보다

[이사람] 대한민국 미용명장 1호 김진숙

열여덟 살에 처음 ‘가위’든 후 45년 한 길 걸어
7080년 미용업계 주름잡던 ‘한울이미용실’ 경영
머리카락 예술로 승화한 ‘헤어아트’ 작품 활동도

전라도인 admin@jldin.co.kr
2019년 01월 07일(월) 16:29
사람들은 그에게 와 멀끔하게 변신해 나갔다. 머리를 잘랐고, 뽀글뽀글 파마를 말았고, 또 어느 귀한 자리에서 빛나기 위해 메이크업을 받았다. 그의 나이 열여덟살에 미용 가위를 든 이후, 40하고도 5년이란 세월 한 길을 걸어왔다. 지금껏 그의 ‘손’을 거쳐 간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김진숙 ‘한울이미용실’ 원장은 대한민국 미용명장 제1호다. 말 그대로 한국에서 미용 분야의 명장으로 이름을 올린 가장 첫 번째 사람이라는 소리다. 1986년 대한민국명장 제도가 도입된 이후 김 원장은 2002년 미용명장 1호 타이틀의 영광을 안았다.
지난 11월9일 대인동 ‘한울이미용실’로 그를 만나러 갔다. 숍 문을 열자, 단정히 머리를 빗어 넘긴 김진숙 명장이 반갑게 맞아준다.
한울이미용실은 1970~1980년 광주 미용계를 주름잡던 헤어숍이었다. 직원들은 깔끔한 유니폼을 차려입었고, 고객들의 ‘니즈’를 파악한 맞춤 스타일링으로 "참, 그 집 머리 잘 한다"는 입소문이 파다했다. 광주·전남에서 미스코리아는 한울이미용실에서 다 나온다했으니 그 명성은 말 안 해도 충분히 설명된다.
미용계에서 제1호 명장으로 이름을 올린 그이지만, 처음부터 좋아서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8남매 중 셋째인 그는 ‘돈을 벌기 위해서’ 미용 가위를 들었다. 학교에 다니고 싶었지만 등록금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미용을 하게 된 것이다.
"지금처럼 미용에 대한 체계적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그저 어깨너머로 기술들을 익혀가는 것이죠. 열심히 하다보니까 손님들이 ‘머리 잘 한다’, ‘너무 마음에 든다’는 이야길 해주시더라고요. 그때부터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당시 미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박했어요. 그러니까 오히려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내가 돈도 없고, 학교도 못 갔으니 미용으로 승부를 보아야 겠다 싶었죠."
그렇게 1976년 계림동에 개인숍 ‘한울이미용실’을 열었다. 변두리에 있었는데도 손님이 바글바글했다. ‘머리 잘한다더라’ 하는 입소문 덕이었다. 그는 고객 한 명 한 명에게 진심을 다 했다. 휴일에는 시간을 쪼개서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최신 트렌드를 배워 오기 위함이었다.
"참 열심히 했어요. 1979년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미용경진대회에 나가서 수상을 했어요. 그 덕에 일본으로 한 달 간 공부를 하러 갈 수 있었는데, 일본은 미용 부문에서 이미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이 안착 돼 있더라고요. 미용인들의 자부심도 대단하고요. 공부를 하고 돌아올 때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첫째는 제 머리죠. 빨갛게 노랗게 색을 넣어서 염색을 하고 들어왔어요. 주변에선 ‘꼭 닭 벼슬 같다’고 했었는데 당시에는 획기적인 모습이었죠. 그리고 두 번째 변화는 제가 미용실 ‘경영’을 시작했다는 겁니다."
이후, 한울이미용실 직원들은 깨끗한 유니폼을 맞춰 입었다. 한 번 다녀간 고객에 한해서는 일종의 ‘관리’에 들어갔다. 고객 카드를 만들어서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등에 쓸 수 있는 쿠폰 같은 것들을 발행했다. 지금에야 아주 흔한 일이지만 시내 미용실 중 한울이미용실과 같은 곳은 없었다. 그렇게 전성기를 맞았다.
"광주·전남 미스코리아 진을 많이 배출했죠. 미스코리아가 나온다는 것은 미용계에선 참 영광스러운 일이예요. 단순한 헤어 스타일링을 넘어, 메이크업·의상 등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인체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죠. 미스코리아를 만들어냈다는 것은 ‘미용사’가 아닌 ‘미용가’로서 큰 자부심이었습니다."
미용사와 미용가의 차이가 무엇인지 물었더니, 미용을 기능적인 측면에서 보느냐 기술·이론 등을 통틀어서 보느냐의 차이라고 말해준다.
이처럼 미용가들에게 잘 된 스타일링이란, 사람 본연이 가지고 있는 각자의 색깔과 매력들을 드러내주는 일이다.
이미지에 맞게끔, 자연스러운 스타일링이 가장 좋은 것이라 한다. 그렇게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의 손을 거쳐 갔다. 본업만을 소화하는 데도 벅찬 하루였지만 그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문화센터나 평생교육원에서 무엇이든 배우러 다녔지만 정규 교육을 마치지 못했다는 갈증이 늘 있었다.
"아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 저도 검정고시 공부를 했어요. 그렇게 광주대학교 산업교육학과에 갔죠. 4년간 낮엔 일하고 저녁이 되면 학교에 갔습니다. 한 번도 빠지지 않았었죠. 누군가는 졸업장이라는 타이틀이 필요 했겠거니 생각할 수 있지만 저는 아니었어요. 정말로 공부가 하고 싶었거든요. 그러다 학업에 대한 욕심이 생겨 조선대 보건대학원에서도 공부했죠. 이런 끝없는 공부들을 통해서 미래에 대한 비전들을 차근차근 설계해 나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몸은 힘들었지만, 뒤늦은 공부는 제 삶에 큰 에너지가 돼주었습니다."
그러다 또 눈을 돌린 것이 바로 ‘헤어아트’다. 그는 바닥에 툭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보면서 ‘아, 이것이 꽃이 될 수 없을까’를 생각했다. 너무나 당연한 혹은 톱니바퀴 같은 지난한 일상에서, 끄집어 낸 그의 예술적 감수성이었을 터다.
"무엇이든지 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버려지는 머리카락이지만 재활용을 해서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겠다 싶었죠. 처음에는 나뭇잎 같은 것을 만들어봤어요. 무엇보다 ‘작품’이 되기 위해선 고정력이 중요했는데, 스프레이로는 한계가 있었죠. 습하거나 물이 닿으면 모양이 흐트러져 버렸으니까요. 고민 끝에 목공예 풀을 써 작품을 하나 하나 만들어 갈수 있었습니다."
헤어아트는 그야말로 고된 노동이다. 머리카락을 원하는 색감으로 염색 시키는 게 우선이다. 그 다음은 모양을 내고, 그 위에 풀칠을 한다. 하루 이틀 건조시킨 후 이를 또 다시 원하는 모양으로 오려낸다. 이 같은 작업 과정을 수 없이 거치면, 머리카락이 ‘예술’로 재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혀를 찼다. 머리카락이란 게 조금 혐오스러운 이미지가 강한데다, 돈도 되지 않는 것에 몰두하고 있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그런데 완성된 그의 작품을 보면 곧 마음이 달라졌다. 머리카락이 한 송이 꽃이 되기도 하고, 나비가 되기도 했다.
"이게 머리카락이에요? 라는 게 첫 반응이에요. 색색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 작품에 깃든 저의 공들을 봐주시는 것 같아 너무나 기쁘죠. 그림을 그리는 한 작가님이 인사동 G&J 갤러리 전시에 오셔서는 물감으로 칠하는 자신의 작업에 비할 바 아니라면서 정말 아름답다고 격려해주셨어요. 그러한 감상평들을 들으면 그간의 고됨이 싹 잊혀지죠."
앞으로도 그의 삶은 분주하다. 늘 자신을 찾는 고객들을 위해 ‘한울이미용실’을 열어두고, 헤어아트 작업도 계속해 나갈 계획이다. 무엇보다 헤어아트를 일반 대중에게도 소개하기 위한 문화상품 개발에도 몰두중이다. 머리카락을 가지고 ‘아트’를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이제 공간에 대한 욕심이 나요. 예술의거리에 갤러리를 꾸며보고 싶습니다. 머리를 해주는 미용실이기도 하고. 또 그 한편으로는 헤어아트 작품을 전시하는 전시장과 문화상품들도 선보일 수 있겠죠. 18살부터 지금껏 쉼 없이 도전해왔는데, 앞으로도 재미난 인생이 펼쳐질 것 같아요.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즐길 수 있는 것들과 함께 오래 오래 동행하고 싶습니다."
전라도인 admin@jl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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