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문화 연구 계승 앞장 "한글세대에 고전문화 전달" [예술대담] 221년 된 정조 ‘어제책문’ 공개한 한학자 김경욱 전라도인 admin@jldin.co.kr |
| 2019년 03월 10일(일) 17: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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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직접 짓고 썼다는 ‘어제책문’(御題策問)이 그것으로, 55×60㎝ 크기에 ‘호남지역의 모든 적폐를 청산해 새로운 발전을 기할 수 있는 대책을 제시하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 ‘어제책문’은 우천(又泉) 김경욱씨가 소장해온 것이다. 이날 공개된 ‘어제책문’에는 정조 재위시절인 1798년 호남 인재를 특별 등용하기 위해 직접 짓고 썼다는 표제가 붙어있어 그의 호남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었다.
김씨는 ‘어제책문’ 외에도 ‘어고과지’(御考科紙·과거시험 답안지 88×164㎝) 8점과 ‘어고방’(御考榜 60m×54㎝) 1점, 임흥원의 ‘간찰’(86×21㎝) 1점, ‘어사화’ 보관함 1점과 ‘어제책문’ 보관통 1점 등 총 13점을 공개해 남다른 문화유산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이런 그를 지난 2월12일 동구 계림동에서 만나 ‘어제책문’의 중요성과 공개하게 된 이유 등을 더 상세하게 들어봤다.
그는 적갈색 두루마기를 차려입고서 앉자마자 ‘어제책문’을 펼쳐보이며 거침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먼저 그는 손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어제책문에 ‘호남지역의 모든 적폐를 청산해 새로운 발전을 기할 수 있는 대책을 제시하라’는 내용이 담겨있는 만큼 책문과지에 장원급제한 보성 출신 임흥원의 ‘호남의 7가지 폐단과 해결책’에 대한 대안이 언급돼 있다고 밝혔다. 임흥원의 간찰은 그가 장원을 차지하고 고향인 보성으로 돌아가 이 사실을 승정원 승지로 있던 그의 형에게 알리는 편지라는 설명이다.
그는 임흥원 선생은 관직을 받기 위해 서울로 가던 중 지병으로 숨졌다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훗날 임흥원은 승정원 증직이 재수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 자료들이 "전라도의 위상과 긍지를 높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강조하면서 봉안각(奉安閣)을 예로 들었다.
"‘어제책문’의 머릿글에서부터 ‘호남 지역은 조선의 왕업을 일으키는 최대 땅’이라고 적혀 있어요. 호남을 모든 면에서 뛰어난 지역이라는 것을 인정했다고 봅니다. 이 문화재들은 이를 입증하는 호남의 최대 보물인 것이죠. 호남 인재의 특별 채용은 조선시대에 처음 있었던 일로, 과거 시험장이었던 광주향교에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별도의 시설을 만들었어요. 그게 바로 ‘봉안각’입니다. 어제책문과 어고방 등은 장원급제자에게 하사하기 때문에 이를 필사해 봉안각에서 보관하도록 했죠."
이는 상당한 의미를 부여한 기념비적인 것으로 인식했음을 뒷받침한다. 사본이지만 이를 보관했다는 것만 봐도 특별하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정조는 자신이 지은 대학연의(大學衍義) 원고 편집을 맡긴 호남유생들의 학문적 식견에 감명을 받은 뒤 지역의 뛰어난 선비들을 발탁하기 위해 특별 과거시험를 열었다. 또 그는 어제책문과 함께 공개한 자료들이 그 당시 적폐를 포함한 정치 상황을 비롯 관련 내용을 상세하게 살펴볼 수 있는 등 학문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점을 피력했다.
"어고방에는 정조가 고사한 응시 유생 69명의 성명과 주소, 신분, 본관 등과 함께 채점등수에 따라 임명한 자격 및 관직, 상품 증여에 관한 내용 등을 상세하게 살펴볼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현재까지 학문적으로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 연구 대상이 된다고 평가합니다."
어고방에 등장하는 유생들은 그 당시 호남을 상징하는 학자들이어서 인적사항을 추적해 유적과 족적을 재조명하는 등 문집으로 묶어내면 가치가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어 그는 시험을 치른 후 과지를 걷어 정조가 하나 하나 채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며, 어고과지를 살펴보면 중간에 찍혀 있는 빨간색 점이 채점을 직접 한 정조대왕의 친필표시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김 선생은 ‘어제책문’을 수집해 보관하게 된 과정에 대해 들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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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 전 한 골동품 행상에게서 연락이 와 ‘어제책문’을 살 생각이 있는지 물었어요. 그래서 돈을 마련해 사려는데 서울 사람이 사간 거예요. 몇 날 며칠 눈에 아른아른해 ‘지금은 비록 내가 갖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꼭 가져야지’ 다짐했습니다. 그러다 20여년 전에 서울에서 제 눈 앞에 딱 나타났어요. 그렇게 해서 제 손에 들어오게 됐죠."
그는 소장하기까지 여러 차례 흥정을 거쳤다면서 금액이 크다보니 구입비를 마련하는데 시간이 소요되면서 그 사이 걱정이 돼 두어달 간 일주일이 멀다하고 서울에 상경했을 정도라고 한다. 잘 있는 지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당시 가깝지 않은 거리를 오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후 이름만 대면 알만한 박물관과 관련분야 교수 등으로부터 여러 차례 소장하고 싶다는 문의가 왔지만 정중하게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에게서 전통문화를 연구하는 한학자로서의 올곧은 기질을 읽을 수 있었다.
"금전적인 액수를 떠나 호남의 보물을 손에 쥐고 있다는데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전라도 사람인 제가 소장하며 연구하고, 그 가치를 후대에 전하고 싶다는 욕심도 있고요. 어제책문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제 삶의 이유라는 생각입니다."
그에게 ‘어제책문’은 단순한 문화재라기보다는 자신을 단단히 하는 뿌리 그 자체인 듯 보였다.
이어 한문은 언제부터 공부했는지, 어떻게 전통문화를 연구하는 일에 뛰어들게 됐는지를 물었다.
전남 곡성군 입면 흑석리에서 나고 자랐다는 그는 조선 말 유학자인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학맥을 이은 선친노천(蘆泉) 김종윤 선생에 의해 여섯살 때부터 한문을 배워 현재까지 한학을 이어왔다고 했다.
‘우천’이라는 호에 대해서는 마을의 뜰아래 유명한 약수가 있어 아버지의 호가 이 약천의 ‘천’자에서 따와 ‘노천’이었다며, ‘선친의 학문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의미로 ‘또 우’(又)자를 써 ‘우천’이라는 호를 받게 됐다는 설명이다.
그는 37세 되던 해 우연한 기회로 고향을 떠나 광주로 상경, 광주문화방송 자료조사부에서 고전 자료 해석과 분류를 맡았으며, 광주일보 향토문화연구소 국역위원으로 활동했다. 그 뒤 광주전남 사료조사 연구위원과 광주시 고전 전문위원, 전남대 호남학 연구위원, 전남대 국역 자문위원을 역임하는 등 고문서와 고서화를 수집, 이를 연구하고 번역해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일에 힘써 왔다. 현재 한문서적을 비롯해 고문서와 고서화, 기타 문건 등 1만여점을 소장, 연구하고 있다. 현재 우천고전연구소를 운영 중이다.
지역에서 한자로 작성된 오래돼 보이는 책이나 문서 등에 대해 알고 싶으면 ‘이 사람을 찾아가면 된다’고 알려진데에는 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쌓은 경험과 인맥 덕분일 터다.
마지막으로 그는 한글세대에 선조들의 가치를 전하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고문서들이 학문과 역사적으로 아무리 뛰어난 가치를 지닌다 하더라도 한자로 쓰여 있기에 이를 모르면 무가치할 수밖에 없죠. 따라서 앞으로 한글로 번역해 내놓을 생각이에요. 아울러 발굴한 자료들을 꾸준히 공개할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후손들에 우리 고장에 대한 자긍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2026.10.25 (일) 01: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