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는 속이 들끓었던 심사를 쓰다듬어줬는데 마음 편한 경지에 잠시나마 가닿을 수 있었다

[문득 여행] 시인의 고향 곡성 태안사
조태일 시인 키워냈던 숲길 곳곳서 삶과 문학 족적 반추
섬진강변 훑으며 눈 호강…능파각 계곡서 쉼 의미 새겨
사찰 답사 뒤 하산 길에 조태일시문학기념관 들러 관람

전라도인 admin@jldin.co.kr
2019년 09월 18일(수) 11:07
(2019년 9월호 제76호=글·고선주 기자) ‘광주직할시 서구 광천동 대문을 나서며/어머니!/오냐.//전남 곡성군 삼기면 원등 선영을 지나며/어머니!/오오냐.//보성강 태안교를 지나며/어머니,/오오냐, 오오냐.//내 탯자리를 지나며/어머니,/오오냐, 오오냐, 오오냐.’
이 시는 ‘태안사 가는 길’이다. 시에서처럼 광천동은 아니지만 그 건너 임동에서 태안사를 찾아 나섰다. 집밖으로 나왔으나 아침부터 푹푹 찐다. 잠을 잤어도 찌뿌둥하다.
겨우 아침을 털어내고 나서는 길, 아직 정신이 나지 않는 8월9일 오전 벌써 실내 기온만 해도 31도와 32도를 넘나든다. 동남아날씨 그 자체다. 밖을 나서자 후끈 열기가 온몸을 휘감는다. 이달 가볼만한 곳을 떠올리다가 시인의 고향 한 곳을 찾아냈다. 그곳은 곡성 태안사다. 태안사는 한국현대시문학에 걸쭉한 족적을 남긴 조태일 시인의 고향이다. 광주에서 태안사까지 70㎞가 넘는 구간이다. 가깝지 않은 거리다. 이곳을 선택하게 된데는 ‘국토’와 ‘식칼론’의 시인 곡성 출신 죽형(竹兄) 조태일(1941~1999)의 고향이자 그의 20주기가 9월7일이어서 발자취를 따라 가보자는 취지다.
조태일 시인의 당선작이었던 ‘아침선박’ 같은, 그만의 유려한 작품들을 습작기 때 하나의 교과서처럼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와의 인연은 1990년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할 무렵 그의 연구실에 찾아가 뵈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아 그는 세상을 떠났다. 여전히 그에 대한 기억은 그때로 고정돼 있다. 태안사를 시인의 고향으로 이야기한데는 그가 이곳에서 대처승의 7남매 중 넷째로 출생했기 때문이다. 훗날 그를 정리하기 위해 활자와 사진 작업을 할라치면 반드시 태안사를 훑어봐야 할 것이다. 태안사와 조태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일부 남아있는 그의 사진에서 뒷 배경으로 태안사가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태안사가 그의 육체적 고향이자 시적 고향이다.
석곡IC으로 빠졌으면 더 수월했을 여정이 곡성IC에서 빠져나가는 바람에 곡성읍을 지나 섬진강변을 타고 태안사를 향했다. 광주로 돌아가는 길에 석곡IC로 빠져 나갔더니 광주까지 훨씬 수월하게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 전까지 미처 알지 못했다. 누구나 한번쯤 실수로 고속도로에서 국도로 잘못 빠져나간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이날 필자 역시 석곡까지 갔어야 했는데 곡성에서 빠져나가는 바람에 국도만 40여㎞를 훑어야 했다. 태안사에 더 늦게 도착한 것은 좋지 않았으나 덕분에 곡성읍과 섬진강변을 넉넉한 감성으로 바라보며 지날 수 있었다. 섬진강변은 남도에서도 가장 뛰어난 풍광을 보이는 곳이다. 꿀꿀했던 기분마저 풀리는 듯했다. 뒷차가 무섭게 쫓아와 은근하게 신경이 쓰였지만 섬진강 기차마을과 목동제, 고달마을, 두계역, 레일바이크 가정역, 도깨비마을, 대황강 출렁다리 등 섬진강변의 풍광은 그것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찬찬히 훑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보지 않고 지나가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눈길 두는 곳이 모두 절경이었다. 구불 구불한 길을 따라 가느라 운전이 여간 신경쓰였으나 그런 와중에도 눈은 바쁘게 풍경들을 스캔해 가슴으로 전송했다. 이동하면서 차라리 곡성에서 빠지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분주하게 살다보니 섬진강은 너무 멀어 보였다. 좋다는 것을 알지만 쉽게 가보지 못하는, 그런 곳이 필자에게 섬진강이었다. 집밖 나들이를 하면 꼭 광주 인근을 돌았다.
그러니 나주나 화순, 장성, 영광 등지를 제외하면 같은 남도땅이더라도 멀게만 느껴졌던 곳이 섬진강일 수 밖에 없었다. 잘못 든 길이 오히려 호사를 누리는 계기가 될 줄 몰랐다.

죽곡면으로 접어들었다. 이제 태안사가 멀지 않았다. 태안사는 전남 곡성군 죽곡면 봉두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도로에서 좌회전 후 죽곡면 태안로(옛 원달리) 산길로 접어들자 얼마가지 않아 매표소가 나왔다. 그곳에서 입장료 2000원을 지불하고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대형 공사차량이 산길을 오갔다. 산속에도 사람이 사는 곳이니 공사가 없을 수는 없다. 고즈넉한 산사 분위기를 즐겨보려 했으나 다소 불편했다. 하지만 산속의 고요함을 모두 지워내지는 못했다. 흙먼지가 일었으나 금방 가라 앉았다. 조태일시문학기념관을 지나 계속 태안사로 향해 올랐다. 숲터널 길은 작열하는 여름 한낮의 햇빛을 가려줬으나 열기는 어찌하지 못했다. 산속이어도 무덥기는 매 한가지였다. 반야교와 해탈교를 지나 태안사의 금강문인 능파각(凌波閣)이 나오기 전까지는 너무 무덥다는 생각을 지워낼 수 없었다.
능파각은 누각을 겸한 일종의 다리건물로 1981년 10월20일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된 건축물이다. ‘능파’는 계곡의 물과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의미한다. 이런 유래를 알고 능파각을 접선하면 대충 보아넘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다리를 건너면 세속의 번뇌를 던져버리고 부처 세계로의 진입을 상징한다고 하니 속계와 법계의 경계 쯤으로 이해됐다. 계곡의 양쪽에 바위를 이용해 돌축대를 쌓고 그 위에 두 개의 큰 통나무를 받쳐 세운 맞배지붕 형태의건물이다. 자연지형을 그대로 활용해 건축물을 지은 것이다.
사진을 담기 위해 계곡 아래로 내려갔다. 힘찬 물살이 작은 폭포를 이뤄 내려왔다. 이름모를 누군가가 계곡 한 가운데 돌탑을 쌓아올렸다. 그 돌탑이 무심하게 계곡을 응시하고 있는 듯했다. 돌탑을 쌓고 삶의 온갖 근심을 이곳에서 씻고 하산했을 터다.
능파각의 다리를 건너 드디어 태안사 경내에 도착했다. 동리산 태안사 일주문이 먼저 반겼다. 태안사를 찾은 날, 제대로 더위와 대면했다. 이미 옷은 땀에 흠뻑 젖었다. 이마로는 연신 땀방울이 맺혔다. 닦아내도 계속 흘러내렸다.
산사는 그윽했다.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금요일 평일이어서 인지는 모르나 인적은 드물었다. 산사가 더욱 고즈넉한 이유였다. 계단을 올라가자 웅장한 대웅전과 적묵당, 약사전, 스님들의 수행거처 해회당 등 사찰의 본채가 드러났다.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듯했다. 사찰 곳곳을 누비며 물샐 틈 없을 정도로 카메라에 풍경을 담아냈다. 이곳에는 창암 이삼만 선생의 글씨 편액이 걸린 배알문과 적인선사탑, 그리고 보제루에서 열리고 있는 김종권 사진작가의 작품전도 둘러봤다. 산사는 늘 속이 들끓었던 심사를 쓰다듬어주곤 했다. 이번 태안사행도 마음편한, 그런 경지에 잠시나마 가닿을 수 있었다.
사찰을 모두 둘러보고 난 뒤 연꽃 핀 연못과 한 가운데 조성된 삼층석탑과 그 옆에 있는 경찰충혼탑에 들러 사진 몇 컷을 촬영하고, 하산하는 길에 동리산문이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에서 멀지 않은 조태일시문학기념관을 둘러 볼 수 있었다. 공사 중이었지만 실내는 예전 그대로였다.
조태일 시인의 삶과 문학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마당에는 조태일 시인의 대표시들이 시화로 걸려있었다. 그의 대표적인 시 ‘원달리의 아버지’를 비롯해 ‘태안사 가는 길1’,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 ‘눈길’, ‘식칼론1’, ‘동행’, ‘눈물’, ‘자유가 시인더러’ 등이 새겨진 시화들이 바람에 나불거렸다. 다소 바랜듯한 시화들 속에서 생전 그의 웃는 얼굴이 겹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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