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오는 내내 가슴에서 보리가 일렁였다 [문득 여행] 전북 고창 청보리밭 전라도인 admin@jldin.co.kr |
2020년 06월 04일(목) 00: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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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보리만 생각하면 대표 단어 못지않게 떠오르는 시인이 있다. 한하운 시인(1920∼1975)이 그다. 그의 대표작 ‘보리 피리’는 보리를 유추하는 데 대표명사로 자리잡았다. 학창시절에 접해 알고 있던 시편이라 친숙하기까지 하다.
‘보리 피리 불며/봄 언덕/고향 그리워/피-ㄹ 닐니리//보리 피리 불며/꽃 청산/어린 때 그리워/피-ㄹ 닐니리//보리 피리 불며/인환의 거리/인간사 그리워/피-ㄹ 닐니리//보리 피리 불며/방랑의 기산하(幾山河)/눈물의 언덕을 지나/피-ㄹ 닐니리’(시 ‘보리 피리’ 전문). 아마 기성 세대에서는 익히 알고 있는 시일터다. 더욱이 보릿대가 올라오면 그것을 꺾어 입술로 물고 불면 피리 소리가 갸날프게 퍼져 나온다.
이런 경험까지 해본 필자로서는 유년 시절에 많이 봤던 풍경인지라 새삼 별다른 감회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시외를 오가며 창밖으로 봤던 보리밭은 그다지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그런데 청보리밭에 가면 관광명소에 왔다는 심리 때문인지 별의별 생각이 스친다. 공연히 낭만인생을 흉내내려 한다.
분명한 것은 유년 시절 아무리 흔하게 접했다고 하더라도 기억은 점차 잊혀지지만 고향 풍경에 관한 기억은 빠르게 재생된다. 보리밭에서의 하루는 더더욱 그렇다. 몇년만인지 모르겠다. 청보리밭 기행은 꼭 이런 갬성(감성)들을 모두 호출한다.
올해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범국민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터라 나들이가 쉽지 않은 형국이지만 부득하게 원고 작성에 필요해 고창 공음면 선동리 산 119-1 청보리밭(학원농장 일대)를 찾았다. 청보리밭은 40여만평에 달할 만큼 규모가 만만치 않다. 25만평이나 30만평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굳이 면적에 목맬 이유는 없다. 그만큼 광활하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이 드넓은 밭의 보리들이 언덕을 타고 넘어가는 모습과 바람으로 인한 일렁임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보리들의 상큼한, 특유의 내음은 싱싱함 그 자체다.
이처럼 보리와 연관된 단어들을 먼저 정리해본 것 역시 ‘보리 피리’에 압도당해 주저리 주저리 감정의 파편들을 나열할까 싶어서였다. 어쩌면 보리와 관련된 명사들을 나열하는 데 보리 피리가 빠지지 않은 것은 이 시편을 빼놓고 이야기를 전개하기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고창 청보리밭은 1960년대 초 진의종 전 국무총리와 부인 이학 여사가 야산과 황무지를 개간해 일군 곳으로, 봄에는 보리와 유채꽃, 여름에는 해바라기, 가을에는 메밀꽃이 장관을 이룬다. 경관농업 특구지역으로 2004년 선정, 국내 경관농업의 효시로 꼽힌다.
앞서 밝힌 것처럼 규모가 작지 않아 걸어서 15분 정도 소요될 마중길과 노을길 및 님그리는길, 30분 정도 소요될 농장길과 보리밭 사잇길 등 다섯개의 길로 이뤄졌다. 걷기가 지루하다면 트랙터 관람차를 이용하는 것도 좋을 듯 싶다. 2시간 정도 여유롭게 거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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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서 청보리밭 축제장으로 가는 가로수길에는 1960년대 후반 식재한 목백합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튤립나무라고도 하는데 한쪽 목백합나무는 베어내 지금은 한쪽만 남아있다. 다행히 사잇길의 목백합 가로수길은 양쪽이 고스란히 잘 보존돼 운치있다. 그곳을 걷다보면 도심지 복잡한 생각들을 잠시 잊을 수 있다. 삶에 찌든 육신과 정신이 한층 홀가분하다.
들판의 오두막에 올라 청보리밭을 내려다보면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보리는 성장하는 동안 언덕을 넘는 수갈래의 바람을 만난다. 때로는 바람에 휩쓸릴 뻔했다. 또 때로는 강렬한 햇볕 때문에 온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도 감내해야 했다. 보리가 자라는 풍경은 우리네 삶과 영락없이 닮아있다. 오늘 이곳에서 청보리들로부터 배운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과장일까.
하지만 한철 나서, 한철 살다가는 보리도 세상을 푸르게 감싸주는 것처럼 우리네 삶 역시 누군가의 삶을 단 한번쯤은 감싸줄줄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문득 생각이 들었다.
보리밭 가운데 서있는 키큰 나무는 더욱 도드라진다. 보리밭을 푸른 양탄자 삼아 하늘에 팔을 벌리고 있다. 보리밭을 지키는 수호신같다. 여기다 꿀벌들이 꿀을 채취하느라 여념이 없는 유채꽃까지 보리밭 한켠에 얼굴을 내밀며 웃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초록과 유채의 콜라보라 할 수 있다.
오두막에 올라 보리밭을 내려다보면 시원하게 트인 조망(뷰)에 감탄을 자아낼 수 밖에 없다. 물 부족할 때를 대비해 마련해뒀던 물 저장창고를 활용해 만든 전망대에 오르면 한눈에 조아리는 보리들을 내려다볼 수 있다.
청보리밭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나무밭도 방문할 수 있다. 도회지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죽순 자라는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없었을텐데 이곳에는 그리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죽순들은 저마다 키재기하듯 그저 땅에서 솟구쳐 오른다. 그런 죽순을 보노라면 생명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방문객들을 위해 농경유물전시관과 청보리 사잇길 포토존, 도깨비 이야기길, 영화 드라마길, 전통놀이 체험장, 트릭아트, 송아지 조각 한쌍, 백민기념관 등이 구비돼 단조로운 보리밭 기행으로부터 탈피, 풍성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더했다.
덤으로 영화나 드라마 촬영 장소 기행을 좋아하는 분들이 방문해도 좋을 곳이다.
이와함께 주말 버스킹 공연과 가족과 어울리는 추억의 게임, 농악놀이, 고창예술단체 거리공연, 사진공모전 등 풍성한 문화예술 행사와 프로그램이 가동된다고 한다.
그러나 올해는 코로나19 여파로 매년 열리던 축제가 취소됐고, 각종 문화예술행사나 프로그램도 줄줄이 취소돼 아쉬움을 더한다.
청보리밭 한쪽에는 도깨비가 문을 열고 나오던 드라마의 ‘도깨비’의 촬영장소가 보존되고 있다. 벽면에는 도깨비 주인공인 공유와 김고은의 캐리커쳐가 그려져 있어 포토존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이외에도 ‘웰컴투 동막골’, ‘식객’, ‘육룡이 나르샤’ 등등이 촬영되기도 했다.
여기다 보리알이 차기 시작한 보리대공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다. 아직 보리대공을 보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먼저 했기 때문이다. 트릭아트 길을 거닐 때 한 소년이 옛 추억을 꼬집어내듯 보리 피리를 들려줘 청보리밭은 더욱 정겹고 반가웠다. 청보리밭을 떠나려 하자 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코로나19 여파로 나들이가 쉽지 않아서였는지는 모르나 보리잎들의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 삭삭, 사각사각, 슥삭슥삭 귀를 파고 들어온다.
모처럼 청보리밭에서 사느라 못볼 것을 너무 많이 목격해 혼탁해진 눈과 듣지 말아야 할 것들을 너무 많이 들어버린 귀를 청소할 수 있었다. 떠나오는 내내 가슴에서 보리가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