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절의 문화 오롯이…"영화도서관에 담고 싶어요"

‘백투더퓨처’·‘나홀로집에’ 등 추억의 콘텐츠 ‘가득’
1910년 희귀도서·인문학·예술 도서 4만 권 모아
"지역 영화 운동의 연장선…창작·소통의 장 꿈 꿔"

전라도인 admin@jldin.co.kr
2021년 06월 06일(일) 15:14
(2021년 6월호 제97호=글 박세라 기자)


2000년, 잘 되던 비디오 대여점이 하나 둘 문을 닫던 때, 되레 ‘비디오보물섬’이란 판매점을 연 이가 있었다. 끝물에 둔 승부수였다. 폐업하는 가게들을 수소문해 남은 비디오들을 싹쓸이 해왔고, 그 중에서도 귀한 것들은 쏙쏙 골라 모았다. 워낙 영화광이었기에, 처음엔 마냥 좋아서 하다가 나중에는 "언젠가 귀하게 쓸 일이 있겠지" 굳게 믿었다. 그렇게 끌어모은 것이 5만개가 넘었다. 광주의 영화인 조대영 감독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정말로 "무식하게 모았다"며 웃는다. 1982년 우리나라에 비디오가 첫 출시되고 2006년 즈음 DVD에 밀려나기까지. 한국 비디오 25년의 역사가 그에게 고스란히 있다. 도저히 집에서는 수용 불가한 규모라서, 산수동에 따로 ‘방’을 얻어줬다.
지하 책꽂이 가득 그 시절 ‘비디오’가 가득이다. 지금은 그 자체도 찾아보기 힘든데,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진다.
‘007시리즈’와 이소룡, 성룡이 출연한 그 시절 홍콩영화, ‘애마부인’ 시리즈를 포함한 성인 에로비디오도 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로마의 휴일’, ‘사운드 오브 뮤직’, ‘나홀로집에’ 시리즈 ‘백투더퓨쳐’, ‘태권브이’ 시리즈 등 이름만 들어도 추억을 소환하는 반가운 작품들이 무심히도 꽂혀있다.
조 감독은 "그 시절 사람들은 모두 비디오에 얽힌 기억이 있을 것이다. 비디오대여점에서 고심 끝에 골라 온 비디오를 차례로 보던 추억들, 빨리 감기·되감기를 하면서 보고 또 봤던 아날로그적인 감성들이 비디오에 있다"며 "비디오란 물성 자체가 없어지는 게 안타까웠고, 말 그대로 무식하게 모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세계에서 비디오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방송도 여러 번 탔다. 다른 이들에게 비디오는 그저 지난 시절의 추억 정도이지만, 그에겐 애틋한 보물이다. 정말로 좋아하는 마음이 아니었다면, 20년이나 이렇게 보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조 감독은 "요즘에는 4K니, 블루레이니 하는 고화질의 영상도 많고, 고전들마저도 리마스터링해 볼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비디오는 그대로 그 맛이 있다"며 "이것들은 비디오플레이어만 있다면 모든 영화를 지금 바로 볼 수 있다"고 자랑했다.
언젠가 "귀하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던 그의 진심이 통했을까. 조 감독 덕에 오랜만에 비디오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될 전망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올 12월부터 내년 3월까지 비디오를 주제로 한 기획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 비디오를 ‘빌려봤던’ 세대들과, 비디오 자체를 접하지 못한 세대들을 잇는 의미 있는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의 놀라운 ‘수집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조씨가 30여 년 간 주말이면 헌책방들을 돌며 모은 책이 4만권이 넘는다. 책은 광주 한 맨션 지하에 터를 뒀다. 1910년에 발간한 책부터 구하기 힘든 희귀도서들이 빙 둘러싼 서고에 빼곡하고, 제 자리를 찾지 못한 것들은 바닥에 일렬종대로 섰다.


영화관련 도서는 5000여 권이고 소설, 그림책, 인문학·예술 도서 등이 작은 도서관 하나를 차려도 될 만큼이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이게 다 얼마일까’ 계산기를 두드린다. 아닌 말로 집 한 채를 샀어도 모자라지 않았을 것이다.
인문학 도서 모임을 수년 째 이어오고 있는 그라서 책을 좋아하는 줄은 알았는데 이정도일 줄이야, 놀라운 규모다. 중고서점 ‘알라딘’의 최고 VIP 답다. 조 감독은 "하도 책을 좋아해 한 권 한 권 읽다보니, 범위가 넓어지면서 귀하다 싶은 책들을 수집하게 됐다. 일제 식민 치하에 만들어진 옛 책들도 많다"고 했다.
애정으로 모은 것이라 소중하지 않은 게 없는데, 지난해 여름, 폭우가 쏟아지던 날에 일이 났었다. 창고 벽면을 타고 내려 온 비가 결국 바닥에 있던 책들에 스며들었다. 이로 인해 2000권 정도가 훼손돼 눈물을 머금고 버려야 했다. 며칠 간 잠도 제대로 못 잘 만큼 "아팠다"한다. 이들을 안전하게 품어줄 새 공간을 찾는 일에 발동이 걸린 것도 이 뼈아픈 경험 탓이다.
조 감독은 이제 이들에 ‘제 자리’를 찾아주고 싶다. 최근 동구청에서 도서에 관심을 보이고는 있는데, 모두 수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는 "조금씩 찢어지는 꼴은 못 보겠다. 분산되면 의미가 없다"고 못 박는다.
조 감독은 요즘 이들을 ‘빛’ 보게 하기 위해 동분서주 중이다. 동구청을 비롯해 관심을 보인 몇 곳이 있는데 아직 명확한 그림은 나오지 않았다. 어찌 보면 ‘관’ 입장에서는 기회다. 이미 사라져버렸거나 사라지고 있는 중인 한 시절의 문화를 통째로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광주가 참 척박한 게 현실이다. 영화를 평하는 비평문화도, 좋은 영화를 찾아보는 관객문화도 협소하다"면서 "30년 영화운동을 해 온다고 해왔지만, 가시적인 성과는 미약하다. 30년이 아니라 이제 100년을 내다보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오래 꿈꿔 온 ‘영화도서관’이다"고 전했다.
그가 그리는 영화도서관의 모습은 명확하다. 공간은 지역 영화판의 활성화를 위해 뛰어온 ‘영화운동’의 연장선이다. 좋은 영화를 봐야 좋은 작품을 찍을 수 있고, 좋은 작품이 나와야만 영화팬의 확장을 꾀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가장 좋은 그림은 비디오 5만개와 도서 4만권이 분산되지 않고, 한 공간에 꽉 들어서는 것다. 이를 위해선 최소 200평의 공간은 필요한 셈이다. 분야별로 또 콘텐츠의 특색을 고려해 아카이브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다.
무엇보다 그는 마음에 드는 비디오를 당장 플레이 해 볼 수 있는 비디오열람실을 꼭 마련하고 싶다.
그는 "영화도서관은 많은 사람들이 머물며 책을 읽고, 작품을 감상하면서 자유롭게 소통하는 장이 됐으면 한다. 책과 영화 분야의 큐레이팅이 잘 된 공간은 창작자의 영감을 자극하는 가장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 나눠지는 수많은 생각과 이야기들이 좋은 작품으로 탄생하는데 탄탄한 밑거름이 될 거라 믿는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조 감독은 "자산은 충분하나 장소가 문제다. 제 뜻에 힘을 보태어 줄 분들이 있다면 함께 일을 벌이고 싶다. 창고에 잠자고 있는 문화자산들을 꺼내어 줄 귀인이 꼭 나타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던가. 귀한 자산을 품어 지역사회의 소중한 문화공간으로 내어줄 귀인을 그는 오늘도 애타게 찾고 있다. 그의 오랜 꿈 ‘영화도서관’이 문을 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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