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창작연구소’ 오픈 희망 "동시 사랑운동 전개하겠다"

[광주작가] 심홍섭 시인
낮에는 신문배달, 밤에는 야학…주경야독 ‘문학 꿈’ 실현
가정 형편 때문에 중·고 검정고시 후 대학서 국문학 전공
27년째 창작 꾸준하게 시화전·시집 출간 등 시적 향상 노력

전라도인 admin@jldin.co.kr
2021년 11월 04일(목) 18:00
(2021년 11월호 제102호=글 고선주 기자)낮에는 신문배달을 하면서, 밤에는 야학으로 무지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 치던 소년. 먹고 사는 문제가 자신을 한없이 작아지게 만들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을 차마 꺾을 수는 없었다. 그는 유년 시절 지독한 가난과 싸워야 했다. 광주계림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되지 못해 교육 기회를 놓치거나 교육시설이 없는 지역에서 수많은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줬던 교회의 교육기관인 성경구락부에 들어가 중학 및 고등학교 과정을 거쳐야 했다. 열서너살 때쯤 성경구락부 국어 교사로 5·18때 고인이 되신 문용동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등 문학의 꿈을 꾸게 됐다. 습작을 통해 꿈을 먹으면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할 수 있었고, 성경구락부에서 실시하는 백일장대회에서 실력을 발휘해 두각을 보이기도 했다. 더 나아가서는 김현승 시인의 시적 세계에 감화를 받아 비로소 습작의 길에 접어들었다. 27년째 문업을 이어오고 있는 광주 출생 심홍섭 시인(61·오치동)의 이야기다.
시인은 분명 허기를 달래줄 빵 문제가 시급한 당면 과제였지만 거기에 구차한 모습으로 매달리기 보다는 마음을 씻어주고 달래줄 한줄기 생수를 찾는 일에 몰두했다. 그것은 시(詩)였다. 아름다운 시 속에 파묻힐 수 있었던 이유다.
"계림동 19번지에서 태어나 줄곧 광주에서 살았죠. 계림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중학교에 갈 형편이 못됐어요. 가난은 어느 누구에게든지 인정을 베풀지 않기 때문에 가난과 싸우는 수밖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구락부와 인연을 맺었죠. 거기에는 불우한 청소년들을 친동생처럼 돌봐주는 사랑의 손길이 있었고,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봉사하는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문학에 눈을 뜨게 된 때도 이 무렵입니다. 주경야독을 하면서 김현승 시인처럼 돼야겠다는 각오를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지곤 했죠."
다른 사람처럼 정규학교를 다니지 못해 불만은 있었지만 문학을 통해 극복해 가면서 학업에 매진, 검정고시를 통해 중·고 과정을 마쳤던 것이다. 그는 그때 가난 앞에서 쉽게 물러서지 않았지만, 생활전선에서의 싸움은 기약없는 현실로 매일같이 이어 졌다. 그럼에도 중도에서 물러설 수 없다는 오기가 남아 있었다고 술회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 문학을 놓지 않았던 그가 김현승 시인의 시 작품들에 푹 빠져 지내던 중 심훈의 ‘상록수’를 접한 일은 작가적 열망을 더욱 불타오르게 한 촉매제가 됐다.
1994년에 그동안의 습작 30여 점의 시화를 내건 ‘선교시화전’을 성공리에 마쳤는데 한 지인이 보고 ‘크리스찬문학’이라는 잡지사에 시를 보냈다. 이게 본격 문학의 길로 접어들게 된 계기가 됐다. 그해 첫 시집 ‘뼈 아픈 참회’(시와사람 刊)를 펴내면서 나름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는 설명이다.
그는 앞서 언급했듯 현재 자신의 문학 유산 첫 출발을 어려운 청소년기로부터 찾는 듯하다. 너무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인해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꿈을 접지는 않았다. 그것은 문학에의 꿈이었다. 자신의 환경들이 문학에 끼친 영향을 잊지 않고 들려줬다. 훗날 글을 쓸 수 있는 출발점이었던 셈이다.
"얼마 전 하늘나라에 가신 누님께서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못가는 것을 안타까워해 시내에 있는 야학을 알아봐 줬죠. 주경야독의 시작이었습니다. 낮에는 신문을 배달하고, 밤에는 호남신학교 학생들이 봉사하는 제일성경구락부중학교에서 공부를 해야 했죠. 그 당시 신문을 배달하는 지역이 양림동과 사직공원이었는데 배달하면서 송강 정철의 시문학비를 만났어요. 그것을 볼 때마다 이런 분들은 살아서 어떤 업적을 남기셨기에 이렇게 시비까지 세워져 기리고 기억하는 것일까를 생각했죠."
이것이 단단한 꿈을 키우고 도전하는데 도움이 됐다는 그는 힘든 만큼의 진통이 쓴 약이 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지금은 힘들지만 좀 더 완숙해진 예술을 위한 노력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생계에 매달려야 했지만 단 한번도 문학을 놓지 않으면서 매진했다. IMF때 15년 정도 했던 광고사를 정리하고, 원광대 한방병원에서 10년, 화순전대병원에서 10년, 그리고 첨단병원 등지에서 직원으로 재직하며 예순에 이르렀다. 줄곧 문학은 정신적 본업으로 그의 시적 사유 한 가운데를 관통해 왔다. 요즘 그의 고민은 시적 수준을 끌어올리는데 모아진다.
시화전을 통해 시 사랑운동을 전개하면서 정식 시인으로 등단하고, 시집까지 출간해 시적 업그레이드가 이뤄진 것 같다는 전언이다. 1993년 시화전에 이어 1994년 가을 또 다시 자신이 출석하고 있는 새순교회에서 필리핀 선교기금을 조성하기 위한 취지로 32점의 작품을 출품해 두 번째 시화전을 열었다. 최근에는 화순 첫눈카페 갤러리에서 ‘시로 써내려가는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시화전을 진행했다. 이들 시화전을 열며 사람들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힐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자신의 시적 영토를 더 넓힐 수 있었다는 반응이다.
1. 화순 첫눈카페 갤러리에서 열린 시화전 모습. 2. 사회서비스 돌봄 운영 전문가 대상 취업목적 문학 강좌. 3. 숭일중학교에서 이뤄진 ‘시 하고 놀자’ 인문학 강좌

"시는 영감의 소리이자 체험이며, 인간의 영혼이고 생명이기에 경건하며 진실하다고 봅니다. 진실한 영혼과 생명의 체험이 고운 영감을 일으켜 우리의 사상과 감정이 승화된 한편의 시를 이룬다고 보죠. 언어의 집인 한편의 시가 예술이 넘치는 작품이 되기까지는 헤일수 없는 땀방울과 가슴앓이를 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어떤 어려움도 극복, 소박하고 진실하게 삶을 꾸리면서 시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했기에 노력은 값진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의 시적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은 현재 진행형이다. 독서를 하면서 시사랑운동을 전개해 왔다. 이는 자신도 모르게 내적 성장과 더불어 세상을 응시하는 관점이 훨씬 성숙해진 것 같다는 고백도 잊지 않았다. 그는 이를 ‘행복한 영적 부자’로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아울러 그는 글쓰기 교실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2005년 일곡자치센터 어린이 글쓰기교실을 시작으로 새순문화센터에서의 독서논술지도사 강사를 역임했으며, 광주여대 평생교육원 독서논술강사를 계기로 2012년 여성인력개발센터 독서논술지도사 수업을 맡아 진행해 왔다. 일곡동자치센터 글쓰기 교실을 통해 8년 동안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봉사를 했는데 그 애들이 성장해 대학생이 되고 성인이 된 이후 그들이 신문에 나오고, 방송에도 소개돼 보람이 되고 있다는 점 또한 빠뜨리지 않았다.
이와 함께 개인적으로 대학원에 진학해 아동문학을 더 공부해보고 싶다고 전제한 뒤 창작기금 확충 등 예술인 복지가 향상 됐으면 하는 희망을 피력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시창작연구소’ 오픈이라는 꿈을 언급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65세에 직장생활을 은퇴할까 합니다. 그때 되면 2층 규모의 시창작연구소를 오픈해 1층에는 작가들이 저렴하게 차도 마시고, 쉬어 갈 수 있도록 하며, 2층에는 시인의 집이라는 명패 아래 시 분야 후진들을 양성하고 싶습니다. 추후 여력이 안되면 안되겠지요. 또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동시 사랑운동도 전개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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